예수께서 어부 형제에게 이르길,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라 하였다. 그 세 형제가 누구인가, 그들이 바로 예수의 제자였다. 베드로였고 안드레아였다. 그렇게 그들은 사람 낚는 어부의 첫 물고기가 되었다.


 필자는 상당히 타산적인 방식으로 신을 믿는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믿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다. 문제는 존재할 때다.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그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꽤 속이 좁다면, 믿지 않는 영혼들을 깡그리 지옥의 뜨끈한 불가마로 보낼 것이다. 믿는다면? 축하한다. 당신의 미래엔 아름다운 구원이 약속되어 있다. 믿기 위해 필요한 비용은 없다. 신앙을 위해 짊어져야 하는 페널티 역시 없다. 답은 나왔다. 리스크는 없고 리턴만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필자는 신을 믿는다. 왜 사서 고생을 하는가. 불신자들만큼 멍청한 자들은 세상에 없다.


 대표적인 예시를 들겠다. 필자는 고등학교 시절 썩 원만한 학창 생활을 하지 못했다. 기숙사제의 학교였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학교에서 가장 높은 성적의 40인이 기숙사에 들어갈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물론 거부할 권리는 있었지만, 지방 일반 사립고 주제에 매년 서울대 30명을 보내는 찬란한 학교의 영광스러운 기숙사를 거부하는 것은 멍청한 놈만이 할 짓이었다. 불신자들처럼 말이다. 


 다행히 필자는 영광의 40인에 함께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필자가 나머지 39인들만큼 똑똑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주 당연한 영광을 거부하는 머저리였을 뿐. 바보였던 필자에게 있어 공중전화 외의 방법으로는 1주일 중 6일 동안 외부와 어떤 연락도 취할 수 없고, 모든 유흥을 거부한 채 속세를 떠나야 하는 기숙사가 그리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바보가 틀림없다. 기숙사 안에는 끈끈한 우정과 체계적인 면학 분위기, 한 달에 한 번 '자발적으로' 선배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는데 말이다. 다행히 현명했던 어머니의 진심 어린 설득은 필자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몸만큼은 움직이게 해주셨다. 


 국군에게 자랑스러운 복무 신조가 있듯이 기숙사에도 명문화된 멋진 룰이 있었다. 아쉽게도 멍청했던 필자는 그것을 외우는 것조차 혐오했다. 단 한 가지만 기억날 뿐. '학사는 하나다.'. 그렇다. 학사는 하나였다. 학사는 하나! 


 그러나 하나가 아니게 되었다. 필자가 그들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숙사의 절대불변한 법칙이었다. 그렇게 학사는 둘이 되었다.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다. 필자의 추악함은 '상견례'라는 행사에서 모두에게 드러났다. 이 아름다운 전통이 무엇인가. 기숙사를 위해 1년 먼저 제 몸을 헌신한 선배들의 얼굴을 감히 보아선 되겠는가? 그렇기에 우리는 2시간 동안 고개를 숙이며 그들의 진심 어린 훈계를 듣는 것이었다. 전능하신 선배께서는 필자의 반항을 알아채셨다. 그렇게 그는 필자를 낚았다. '기숙사의 멋진 룰'을 목청 높여 울부짖으라는 그 명령을 필자는 이행할 수 없었다. 무지한 멍청이였기 때문이다. 얼마나 멍청했냐면, 이미 뇌리에 박힌 '학사는 하나다.'라는 말조차 무슨 이유에선지 뱉지 않을 정도였다. 불신자들의 멍청한 고집처럼 말이다.


 그렇게 필자는 무지의 대가를 치렀다. 영광스러운 학교의 전통을 모욕한 필자는 교사들의 죄인이 되었다. 찬란한 발할라의 간수는 필자를 죄인이라 하였다. 그러니 따뜻한 공동체의 일원들도 필자를 죄인이라 하였다. 필자는 죄인이었다. 


 죄인이라면 마땅히 그 대가를 침묵 속에서 감내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필자는 무지한데다가 충동적이기까지 했다. 죄인의 특기는 규율을 부수는 것. 필자는 그렇게 밤을 헤매는 탈옥수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수가 필자를 다시 잡아갔지만, 그것이 진짜 해방으로 이어질 것을 안 필자는 기쁨에 떨고만 있었다.


 그렇게 악독한 필자는 영광스러운 기숙사를 벗어났다. 그러나 찬란한 학교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필자는 영광에 칼을 겨누는 반역자였으니까. 끔찍한 죄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없었다. 반항의 흔적만이 학생의 진단서에 지금까지 남아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악독한 죄인을 한 명성 있는 아고라가 품었으나, 그곳은 서울대가 아니었다. 매년 서울대 30명을 보내는 찬란한 학교의 영광스러운 일원이었으면서 30인에 들지 못하다니. 필자는 지워졌다.


 필자가 죄악에 몸부림쳤을 때, 예수께서 필자를 인도하셨다. 마땅한 고독에 몸부림치던 필자에게 예수께서는 이리 말하였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의 그물 안에 들어갈 수는 있었다. 그것은 구원이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필자는 살아오고 있다. 주와 함께한 날만이 필자를 채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린다. 중학교 시절, 즐거움에 쫓기는 술래잡기. 당시 나는 신을 믿지 않았다. 공상을 위해 자신을 내주던 스케치북과 함께한 어린 시절, 당시 나는 신을 믿지 않았다. 분수에 맞지 않는 영광스러운 40인의 일원이었을 때, 필자는 신을 믿었다.


 그렇게 필자는 사소한 반항을 시작했다. 우선 아침마다 그에게 드리던 기도를 멈추었다. 이어서 왼쪽 네 번째 손가락을 조이던 묵주반지를 뺐다. 그렇게 나는 그물에서 벗어났다. 아늑한 그물에서. 남은 것은 넓디넓은 대양이다. 저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피 냄새에 눈을 부라리는 상어들이 있고, 어두컴컴한 구멍에 숨은 곰치가 있다. 그리고 물고기를 낚는 어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산호 숲 아닌가. 산호 숲에 가기 위해선 저곳으로 헤엄치는 수밖에 없었다. 


 저 뒤에서 고함치는 낚시꾼의 소리가 들린다. 나는 수조에서 탈출한 니모였다. 다만 가고자 하는 장소는 집이 아니었다. 산호초로 가자.


 그는 사람 낚는 어부인가? 나는 낚싯바늘을 피하는 물고기다. 아멘멘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