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8 사후세계

 

난 오늘도 어김없이 만화를 본다.


주인공이 사고로 죽은 이후 신에게 선택되어 능력을 얻고 이세계에 환생하여 어쩌고하는 내용의 만화 같은 것들 말이다.


처음엔 그저 취미였지만, 지금은 만화가 없으면 안될 정도로 만화에 푹 빠져버렸다.


마치 나 또한 그들처럼 비참하고도 초라한 삶을 살다가, 언젠가 만화처럼 반전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것이라고 격려 받기 위해서일까나.


어찌 되었든, 그들의 인생을 종이 너머로 지켜보기만 해도 즐겁다.

 

그렇다면 만화 주인공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산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늘 바라던 내용이다. 만화 주인공처럼 노력하고 성장해서 성과를 이루고 목표에 다가가는..


그렇게 생각할 때면 항상 이런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아, 차라리 나도 저렇게 트럭에 치여서 이세계에서 환생이나 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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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현실은 내게 너무나도 냉정하다.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는 이야기. 나에겐 능력도, 특기도 없다.


이렇다 할 배경도 없고, 주위에서 격려할 동료나 나를 자극하는 라이벌도 없다.


노력해도 전혀 성장하는 것 같지 않고, 소년 주인공들과 달리 내 시간은 너무나도 하염없이 흘러간다.

 

마치 이 세상도 하나의 만화라면 내 인생은 마치 만화 속에 출연조차 하지 못하는 ‘엑스트라’ 같달까.

 

매일 반복되는 같은 생활 속에서 만화 속 세상을 들여다보며 나의 세상을 원망한다.


“내 삶도.. 내 인생도 저들처럼 반짝이고 훌륭하면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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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했다.

 

만화 속 주인공처럼

 

트럭에 치여서 죽자!

 

“비록 이세계로 가거나 능력을 얻을지는 불확실하지만, 이 냉정하고 지긋지긋한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평소 차량이 많이 지나다니는 사거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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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벌써 늦은 밤이 되었다.

 

늦은 밤이어서 그런지, 예상보다는 길을 지나는 차량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기엔 여기까지 온 시간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만약 지금 돌아간다면 내일 출근할 회사에 늦는 것은 분명할 테다.

 

그렇게 꾸중을 들으며 한층 더 비참해질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 더욱 돌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죽는 것이 정말 맞을까.'하는 고민은 시간이 갈 수록 더욱 깊어졌다.

 

그렇게 다시 돌아갈지 망설이며 손톱을 물어 뜯고 있던 그때였을까,

 

늘 만화에서 보던 익숙한 그 트럭이 저 멀리 길가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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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그 순간, 나는 이 기회를 반드시 놓쳐서는 안된다고 필연적으로 느꼈다.


드디어 나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이리라.

 

그렇게 나는 트럭 운전사가 미처 반응하지 못하도록 휴대폰을 보는 척을 하다가,

 

“에잇!” 하며 트럭 앞으로 뛰어들었고, 그 결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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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리니, 세상이 반 바퀴쯤 돌아가있다. 아니, 내가 누워있는 거구나.


“으윽..”

 

내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꿈쩍도 않고 오히려 온 몸이 찌릿찌릿하다.

 

그렇다. 나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던 것이다.

 

멀리서 달려오는 트럭 운전수가  나에게 소리치며 다급하게 무언가 말하는 것 같지만, 귀에서 들리는 삐- 소리 떄문에 도통 들리지가 않는다.

 

이런 낯선 경험은 처음이다.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무언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낀다.


이건, 내 피인가.. 사람이 이렇게도 많은 피를 흘릴 수가 있구나..

 

시간이 지날 수록 시야가 더욱 흐릿해져 앞이 하얗게 변한다.


피부로 느끼던 거칠고도 차가운 바닥과 그런 바닥을 흥건히 적신 나의 뜨거운 혈액을 느끼던 피부의 감각이 점차 무뎌진다.


그리고 마침내, 들리던 삐-소리도 뚝하고 끊기며, 숨쉬기도 버거워진다.


이윽고 나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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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만화처럼 트럭에 치여 죽었다!"


드디어 종이 너머로만 보던 신님을 마주하고 능력을 받고 이세계로 넘어가는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지리라.

 

내가 늘 꿈꾸던 바닥에 깔린 구름을 딛고 신님에게 능력을 부여받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며 기대하던 순간이었다.


머리? 머리는 더 이상 나에게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눈 역시 나에겐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텐데, 신님을 어떻게 마주하지?

 

“구름은 언제 보이는 거지? 아니, 이젠 ‘말’도 못하잖아"

 

젠장, 설마 지옥으로 가는 건가?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지옥으로 가는거지?

 

아니야, 나는 살면서 죄를 지은 것이 별로 없으니 분명 지옥으로 가도 다시 천국으로 갈 기회를 얻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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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그러면 늘 보던 만화에서 나오는 이세계는 없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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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나 스킬 같은, 그런 것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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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천국! 그래, 신님이 계시는 그런 공간은? 제발 신님, 가엾은 저를 소환시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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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지옥, 지옥이라도.

비록 끔찍한 형벌과 고통만 받아야 할지라도 지옥조차 내 앞에 나타나 주지 않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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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신님이 존재하시긴 한가?

 

그렇다면 사후세계엔 뭐가 있는거지?

 

이대로라면 사후세계엔 천국이나 지옥같은 것도 없고 나밖에 없는 것이 된다.

 

아니 애초에 나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지금의 ‘나’를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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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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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죽음 뒤엔 어떤 세계도 없다.

이세계도, 천국도, 지옥도, 신도. 아무것도 없어.

시간도, 공간도, 빛도, 어둠도, 영혼, 생각, 물질, 티끌조차도 없다.

 

죽    음    의    뒤    엔    그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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