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기 때문에 나왔던 폭력적인 행동은 스스로 잊고자 하며

어리기 때문에 나오는 생각은 불필요하다고 여기곤 한다.


아이가 잘 모르는 것은 어른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누군가가 이끌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가 옳다.

그러나 아이는 어른을 따른다.



영화 비평 또한 문학이라고 생각하기에 창문챈에 올려보겠습니다.



하야오는 이번엔 영화를 팔 생각을 버린 듯하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들어갔기에 분석하기에도 까다롭다.

솔직히 말해 많은 이들이 이해하고 즐길 수 있어야 훌륭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본인은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안에는 하야오가 품은 생각이 담겨 있었다.




꽤나 주관적인 해석이 들어갈 수 있다.



며칠 전에 그대들은 어떻게 살았다를 어머니와 함께 보았다.


어머니는 아이가 아이다워지고 가족이 가족같아진다고 하셨다.


옳다.




그러한 가족을 살펴보자.


아버지는 군수공장의 사장이다.

마히토를 아끼고 새 아내도 사랑한다.

그들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지만 공장을 걸지 못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버지에 대한 배경도 볼 수 있지만 다루지 않겠다.


아버지는 사무라이 집안으로 부유층이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아이처럼 집의 재력을 과시하고 마히토의 악의 상처가 남도록 한다.



친어머니는 죽은 사람이다.

어른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친어머니는 마히토에게 긍정적이지 못한다.

마히토에게 일종의 트라우마로 박혀 있다. 어른 어머니를 마히토는 두려워하는 듯하다.


어린 히미는 마히토가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도록 돕는다.

동시에 히사코가 불속에서 사람들을 살린 것과 반대로 불속에 악역들을 넣어 태워 죽인다.



어린 히미도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어른스럽게 와라와라를 보호하는 모습과 아이답게 자유로운 모습

어른스러운 모습은 펠리컨을 불태워 죽였고 자유로운 모습은 모두를 자유케 했다



큰할아버지는 완전한 어른의 모습만 보인다.

책임감 있으며 무언가 유산을 넘기고자 한다.

아이는 아직 잘 모르는 것으로 보며 가르치고자 한다.




마히토는 그 속에 있다.


마히토는 아직 어리다. 응애.


그러나 아이는 스스로 어른스럽기 위해 사회의 규범에 따른다.

이는 그 아이가 취하는 행동의 태도와 징병되는 군인에게 경례를 박는 데에서도 볼 수가 있다.


동시에 사회에 속하지 못한다.

남들과 시비가 걸렸고 마히토는 싸웠다.


이즈음부터 마히토는 아이다워지기 시작한다.


어른스럽게 참았더라면 작품의 이야기는 이렇게 흐르지 못했을 것이다.

자유로움은 없었을 것이며 스스로 저지른 죄는 숨겨질 것이다.



그것이 옳은가?




상처를 숨기지 않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과거의 죄를 마히토는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큰할아버지가 세상에 저지른 죄악을 씻고 완전히 깨끗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지 않는다.


앵무새 대왕은 다른 어린아이들이 따르는 한 어른이다.

그는 과거의 어두움이 없는 깨끗한 세상을 바라서 어두움을 직시하지 않으려 한다.

수단은 어두운 것 칼이다. 칼로 베어버린다.


어린 마히토의 결단은 펠리컨들과 앵무새들을 이끌고 나간다.


앵무새들은 말한다. "조상님들이야!" "여긴 낙원인가?"

그들이 꿈꾸는 낙원으로 돌아갔다.


펠리컨들은 악역으로 태어나 악역으로 죽었다.

그들은 바깥으로 나와서 자유로워졌다.

잃어버려가던 날개를 되찾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위대해지고자 남들을 제약하는 것은 파멸을 불러왔고 그 파멸 속에서 구하는 것은 그 무시하던 아이의 옹고집이다.


마히토가 어른스럽게 남들을 대하는 것은 남들과 거리를 두기만 했고 어른스러움이 사라지고 아이들의 순수함이 되자 나츠코(새마망)와도 가까워졌다.



히미는 어른스럽게 펠리컨을 태워죽였고 아이답게 펠리컨을 살려 자연의 순환으로 돌려보냈다.

부자연스럽게 설정된 악역을 반드시 죽이는 것에서 떠나 그들이 자연의 순환 속에서 먹고 먹히도록 돌려보냈다.





그렇게 아이답게 떠나고서 결국 아이는 크면서 잊어갈 것이라고 왜가리는 말한다.

하여 억지로 기억을 가리고자 하지 않는다.


마히토의 아버지는 마히토의 상처를 머리를 길러 가리자고 했다.

아이는 그 말에 따르지 않고 계속 드러냈다. 키리코는 그런 마히토를 긍정했다.


그 상처가 큰할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에서 자신의 선택을 결정했다.



결국 자신의 어린 아픔과 순수함을 긍정하라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자신의 잘못을 떠올려 기억하라는 것은 아닐까.


영화는 잘만들었다고 하기 힘들지만 나는 꽤 생각이 깊어졌다.

모자란 글솜씨로 그 훌륭하지도 못한 생각이나마 일부마저 제대로 전달할 수 없어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