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 김영수를 제명에 대한 회의가 청와대에서 열렸다. 결론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나는 계속해서 반대의견을 냈다. 미국과 국민의 반발이라는 명목을 내세웠다. 그러자, 차승철은 내게 고함을 쳤다.


“김 부장, 김 부장이 이렇게 물러터지니까 김영수나 김대진이가 각하를 우습게 보는 거 아니야!”


“차 실장, 차 실장이야말로 각하를 우습게 만들지 마시오! 으를 땐 으르고, 달랠 땐 달래야 하는 법이오! 매번 차 실장이 강경하게 나가자 하니 더 난리인 거 아니오!”


“김 부장!”


박준희의 호통이 회의실을 채웠다. 내 이름을 부른 걸로 봐선 나를 질책할 모양이다. 늙은 노인네.


“김 부장이 그렇게 무르니까, 중정 무서운 줄을 모르고, 김영수가 그러는 거 아니야! 중정이 뭘 했어! 김영수 그 새끼, 확실히 제명해!”


그렇게 호통을 치고 박준희는 나갔다. 차승철은 박정희가 뒤를 돌자 비웃는 것처럼 나를 향해 웃은 뒤 박준희를 따라나섰다. 순간적으로 화가 날 뻔했지만, 괜찮다. 어차피 곧 죽을 자들인데 화를 내서 무얼 하리. 내게 중요한 건 명분이다. 분명히 민주화가 된다면 3~4공 청산 움직임이 돌 것이다. 그때 나는 차승철과 박준희의 폭정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꿈꾸고 있었다는 명분을 쌓아놓으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10월 4일, 김영수는 국회에서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들의 날치기 통과로 제명되었다. 그 소식을 집무실에서 들은 나는 수행원을 시켜 차를 대기시켰다.


“부장님, 어디로 갈까요?”


“상도동으로 가.”


삼김과 미리 친해질 필요는 있었다. 내 계획대로면 내각제 개헌이 이루어질 터, 연립정부를 구성하려면 어느 정도 미리 친분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 상도동으로 가자 제명 소식을 들은 김영수가 오고 있었다. 김영수는 문앞에서 기다리던 나를 보고, 기다렸느냐고 물었고 나는 별로 기다리지 않았다고 답하며 집으로 들어갔다.


“김 부장님,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생각이요?”


“저번엔 박준희가 시킨 거고, 이번에는 무슨 일입니까?”


“총재님 제명된 게 참 그래서 그럽니다.”


김영수는 저번의 내가 남긴 언질을 생각해서인지, 더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러다가 김영수의 표정이 굳어지더니만 내게 물었다.


“박준희가 사과라도 하면 제명 취소라도 시켜준답니까?”


“아뇨, 오늘 제가 여기 온 건 순수히 제 생각에서 온 겁니다.”


“순수하게요?”


나는 김영수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것처럼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각하가 요즘 워낙 극단적으로 나가십니다. 차승철이 옆에서 부추기니까 누구 하나 말릴 수가 없어요.”


“김 부장님이 있잖아요?”


김영수는 어찌 되었든 정권의 이인자, 중앙정보부장의 말이면 뭐든지 막을 수 있는 것처럼 얘기했다. 그러나 박준희는 이미 첩에 혹한 사내처럼 차승철 말만 듣고 있었다. 나는 그런 김영수에게 말했다.


“차승철이 말에 혹하셔서 제 말은 듣지도 않으십니다. 저는 그래서 총재님이 의원직이라도 유지했으면 하는 거였습니다. 국회에서 야당 총재로서 막으실 수 있을 줄 알았죠.”


“유신 헌법 이후로, 국회가 뭐 됩니까? 그리고 저는 그러려고 박준희한테 굴복은 못하겠습니다.”


유신 헌법 이후로 사실상 대통령이 다 해먹는 나라라는 점을 김영수는 꼬집었다. 내게 공감해주는 듯하면서도 나 역시 독재정권의 하수인이라는 것처럼 유신 헌법을 꼬집었다. 나는 웃으면서 답했다.


“맞긴 하죠. 총재님 제명도, 결국 각하에게 화로 돌아오실 겁니다. 각하도 그걸 아셔야 해요.”


“김 부장님, 대단하신 분이네요. 옛날에 김형돈이 부장이었을 때보다 낫네요.”


김형돈, 곧 내가 제거할 인물 얘기를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아마 김영수는 김형돈을 좋아하지는 못할 것이다. 김형돈이 중정부장일 때, 김영수에게 질산 테러를 했다가 김영수를 해하는 데는 실패한 사례가 있었다. 이런 짓거리 할 곳이 중정 말고 더 있겠는가? 김영수는 김형돈을 크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와 내가 다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나는 김영수가 남긴 유명한 한 마디를 인용하며 말했다.


“아무튼,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는 법이라고 말씀하셨죠? 세상은 바뀌고 있습니다. 제가 각하께 이걸 말씀드려야 하는데, 듣지를 않으시네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김영수는 내가 자신이 아까 국회에서 했던 말을 인용하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내가 간다기에 한 박자 늦게 작별인사를 했다. 생각에 잠겼다면, 작전은 성공이다. 삼김 중 유명한 그 김영수가 나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게 한 것은 나에 대해 조금은, 아주 조금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영수가 나중에 내가 정계에 들어갈 때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특히, 그가 김대진과 갈라졌을 때 연립정부를 세우려면 나나 김중필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그때 어쩌면 김중필 말고 내가 후보가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김영수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나는 그것을 조금 바꾸어 말해보겠다. 박의 모가지를 비틀어야 새벽이 온다. 이제 거사까지 22일 남았다. 박준희의 모가지는 내가 꼭 비틀어버릴 것이다. 남산으로 돌아온 나는 박형준을 불렀다.


“박 대령, 차승철과 전두한, 그리고 노태원 이들을 좀 조사해봐. 전두한이가 육성회라는 사조직을 만들었다는데, 그것도 좀 알아보고.”


“네, 부장님.”


“아, 조건이 있어. 다른 중정 요원들은 모르게 해.”


“알겠습니다, 부장님.”


슬슬 중정에서 밑작업이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차승철이 박준희를 죽인 걸로 사건을 조작할 수 있다. 그리고 전두한과 육성회도 이 사건에 엮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잡을 수 있다. 어떻게든 12.12 쿠데타가 일어나는 건 막아야 한다. 다행인 건, 차승철과 전두한은 제법 가까운 사이라는 것이다. 둘이 분명히 따로 만났을 것이고, 그때 쿠데타 모의를 한 것으로 몰아가면 전두한과 노태원을 쿠데타 모의로 잡아넣을 수 있다. 그러면 육성회까지 엮을 수 있다.


3일 후, 집무실에 있던 내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 중정 요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장님, 김형돈 잡을 준비 끝냈습니다.”


“잡아. 다만 뒤끝이 없어야 해.”


“물론입니다, 부장님.”


그리고는 한 다섯 시간쯤 지났을 때, 내게 전화가 왔다.


“부장님, 김형돈 처리했습니다. 시신은 어떻게 할까요?”


“근처에 처리할 데 없어?”


“양계장이 있긴 합니다만…”


“거기다가 갈아버리면 되겠네.”


그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다음 날 청와대에서 박준희에게 김형돈 건에 대해 보고했다.


“각하, 김형돈은 잘 처리했습니다.”


“그래, 잘했어. 그 자식이 가져간 돈은?”


“김형돈이 중정 부장 시절 축적한 돈들은 찾았고, 그게 국고로 환수한 돈입니다.”


갑자기 박준희는 열불을 내면서 말했다.


“그 배신자 새끼가 가져간 돈이 얼만데! 그거 고작 찾았다고 그러는 거야? 샅샅이 찾아, 그 자식이 가져간 돈 전부.”


탐욕에 찌든 노인네. 결국, 원하는 건 돈이었다는 건가. 집무실로 돌아오니 박형준이 보고서를 올렸다.


“부장님께서 지시한 차승철 관련 보고서입니다. 전두한의 사조직 육성회에 대해서도 대략적으로는 알아냈습니다.”


“그래, 수고 많았어.”


달력을 보자 벌써 10월 26일까지 18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에 절로 웃음이 나올 뻔했다. 부활한 이후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을 때, 특히나 차승철과 박준희로 인한 스트레스일 때마다 10월 26일만을 기다리며 희열을 느끼는 안 좋은 버릇이 생겨버렸다. 그렇지만, 거사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두근거리는 마음을 막상 참을 수는 없을 것 같다. 10월 26일만 되면 내가 원하는 데로 모든 게 굴러가리라. 걸려있는 박준희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총을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