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적 드문 마을에 있는 너싱홈, 뒤뜰에 테라스가 있는 1층 특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 저녁노을을 보며 침대에 누워 있다. 옆에는 한 청년이 과일을 깎고 있다. 노인의 손주다.

 

“할아버지, 과일 드세요.”

 

청년은 과일을 담은 접시를 침대 머리맡에 갖다놓고는 현관으로 가 오늘 온 위로 선물들을 뒤뜰로 옮기기 시작했다. 정재계 고위 인사부터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까지 발신인도 다양했다.

 

“얘야, 책장 첫 번째 칸 첫 번째 책을 좀 가져다주겠니.”

 

노인의 주문에 마지막 선물을 옮긴 청년이 방으로 들어갔다. 한쪽 벽에는 노인이 받은 상장과 상패들이 즐비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전부 오십 년 가까이 기자로 활동한 노인의 공로를 치하하는 내용이었다. 청년은 다른 쪽 벽에 있는 책장에서 노인이 부탁한 책을 꺼내 왔다. 플라톤의 <크리톤> 이었다.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책등이 떨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노인은 청년에게서 책을 받아들고 가만히 탄식했다. 한평생 자신은 세상에 숨겨진 모든 위선과 가식, 탑독과 언더독의 자기기만에 맞서 싸워 왔다고 자부하면서도, 과연 신 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언론 정의를 행하였는지 자문한다면 부끄럽게도 그렇지 못했다. 그런데 세상은 자신을 ‘깨지지 않는 저널리즘의 신화’ 라 칭송하고 있다.

 

“얘야, 내가 첫 번째로 취재한 상대가 누구였는지 말했니?”

 

노인은 청년에게 물었다. 청년은 노인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등에 베개를 받치며 대답했다.

 

“할아버지의 어릴 적 초등학교 은사님이었던 거장 소설가라고 하셨죠.”

“그래. 그분이 후배 작가들의 글들을 표절하여 매번 베스트셀러를 내고, 자신에게 글을 배우는 여고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는 것을 기사로 고발했지.”

 

노인은 가만히 눈을 감고 회상에 잠겼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그의 우상이었다. 선생님은 못하는 게 없었고, 학생들 모두의 마음을 마치 꿰뚫어본 듯 잘 읽었다. 무엇보다 그때 이미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소설가였다. 어린 노인에겐 영영 무너지지 않을 전설과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전설을 ‘비천한 범죄자’ 로 전락시킨 것이 노인의 데뷔 기사였다. 그 후로도 사회부에서 그는 국내 재벌 및 정치인들, 문화인들의 비리 및 내부범죄와 해외의 내전 국가의 최전방에서 전쟁의 참상과 강대국들의 전쟁 범죄를 취재했다. 은퇴하기 십 년 전까지 신변의 위기나 큰 부상 없이 현장에서 기자 일을 계속할 수 있던 것은 분명 운이 따르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그 선생님을 내 인생 최고의 은사로 꼽는단다. 이유가 뭔지 아니?”

“뭔데요?”

“그분이 종례 시간마다 하셨던 말씀 때문이란다.”

 

<…예로부터 신화는 여러 가지 역할을 해 왔지. 어떤 민족에게 자긍심을 고취해주기도 하고, 시대와 상관없이 보편적인 가치를 일깨워 주기도 한단다. 하지만 선생님은 신화는 결코 신화인 채 남아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단다. 모든 신화 뒤에는 숨겨진 역사가, 편파적으로 조작되지 않은 보편적 진리로서의 역사가 반드시 있단다. 신화라는 껍질을 역사가 깨고 나올 때마다 인간은 조금씩 더 진보한다고 난 믿는다…>

 

노인의 기사가 아니었으면 그는 계속 신화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몇 번이고 사실관계를 재검토한 데는 신화가 계속 신화로서 남길 바라는 마음이 은연중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결국 불멸자의 신화가 아닌 인간의 역사를 선택했다.

한번 역사를 선택한 이후 노인은 역사의 수호자로 여생을 살았다. 철옹성 같은 권위가 몇 번이나 그의 앞에서 무너졌고, 민중의 역사 앞에 드러났다. 그러나 늘 노인의 마음 한구석에는 무거운 짐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신화를 무너뜨리면 무너뜨릴수록 그 자신도 새로운 신화가 되어 갔다는 사실이다.

노인은 청년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을 알고 있니?”

“정작 소크라테스가 그 말을 했다는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고 하더군요.”

“그렇지. 하지만 거꾸로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 는 말을 한 번도 마음에 품은 적 없다는 뜻은 되지 않는단다.”

 

노인은 이어서 말했다.

 

“진실을 구한다고 할 때, 역사를 지킨다고 할 때 우리는 마치 자신이 아는 한계가 진실이고 역사인 양 착각할 때가 있단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에 반하는 더 높은 격률이 언제나 존재하지. 그걸 부정할 때 점점 신화라는 괴물이 되어간단다.”

 

청년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오전에 청년은 주치의에게 오늘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는 말을 듣고는 한 가지 결심을 하고 왔다. 노인의 바이털 사인이 점점 수평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노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마지막에 내가 인간으로 죽게 해 줘서 고맙구나.”

 

청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할아버지가 시한부 선고를 받아 집을 대신 정리하던 중, 청년은 옷장 구석에서 경악할만한 문서들을 발견했다. 은퇴하기 십 년 전쯤부터 사장으로 일한 할아버지가 현재 여당의 비리 문건을 은닉한 기록이나 재벌 기업의 해외지사를 취재한 특파원이 보낸 인권유린 실태를 축소한 기록 등 커리어에 치명상을 남길 수 있는 자료들이었다. 평소 할아버지를 존경하던 청년이었기에 적어도 사후에 공개할 것을 고민했으나,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그게 진정 당사자가 원하는 것은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오후에 병문안을 온 후배 기자들의 편에 증거 자료들을 들려 준 것이다.

청년은 울먹이며 말했다.

 

“저는 할아버지가 인간이셔서 존경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