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너하고 캐롤라인이 나를 집까지 올려다 줬다는 말이지?"

 

 리돌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캐롤라인은 내가 정신 없이 뻗어 있던 사이에, 일단 돈봉투만 이 곳에 놓아두고 그냥 갔다고?"

 
 "그렇습니다."

 

 "그것, 참..."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뒤를 돌아 보았다. 침대 너머 창문 밖은 벌써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나는 침대 위에서 엎드려 있던 채로 신선한 아침, 아니, 저녁을 맞이했고, 어제의 기억은 온데간데 없이 통짜로 날아가 버렸다. 유일한 목격자인 리돌의 말에 따르면, 나는 7시쯤에 누군가에게 전화를 받고서는 집을 나섰다고 한다. 그리고 밤늦게 리돌의 생활비를 전해주러 온 캐롤라인이 계단에서 술에 떡이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고서는, 리돌을 불러 같이 나를 방까지 끌어올렸다고 하는데...

 물론 내 술버릇이 아무데서나 자는 거고, 지금 뒷골이 상당히 땡기는 상태로 저녁이 다 되어가는 시간까지 이렇게 잔 걸 보면 진짜로 많이 마신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술을 마셨으면 육하원칙에서 '어떻게' , '왜' 는 차치하고서라도 '언제', '어디서' '누가' 마셨는지 정도는 기억이 나야 되는데, 그것도 아예 기억 속에서 통째로 삭제되어 있는 상태라는 게 문제다. 그렇게 많이 먹었나?

 

 "거 참 이상하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책상으로 향했다. 일단 다른 건 둘째치고, 어제 오늘 합쳐서 아무 것도 못 했다는 사실이 제일 중요하다. 오늘 공부는 완전히 망했더라도, 일단 책을 들여다 보는 흉내는 좀 내야 될 것 같다.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 마음 좀 다잡으려 하니 뭐 하나 도와주는 이가 없구만. 나는 대답을 하며 대문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아랫층 사는 사람이에요." 

 

 대문을 열자, 나의 눈 앞에는 어제... 어제 맞나? 이제는 날짜감각도 헷갈리는 것 같다. 하여튼 저번에 계단에서 보았던 금발의 미인이 서 있었다. 이 사람 진짜 아랫층에 이사 온 사람인가? 그녀는 나를 보고서는, 얼굴에 약간 민망한 듯한 미소를 띄웠다. 우와, 괜히 기분 좋아지네. 오늘 하루를 날려 먹고서 조금 우울해졌던 마음이, 웃음기 띈 그녀의 얼굴에 싸악 풀린다. 굉장히 눈빛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좀 이상하지만.

 

 "아, 예 그런데 어쩐 일로..."

 

 "아.제.가.얼.마.전.에.이.사.를.와.서.요.떡.을.돌.리.고.있.어.요.드.셔.보.세.요."

 

 그녀는 발음이 약간 좋지 않은 모양인지, 국어책을 읽듯이 나에게 시루떡을 건네었다. 이상하다, 방금 인사는 제대로 한 것 같은데. 뭐, 어때. 요즘같은 시대에 아직도 이런 미풍양속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역시 예쁜 사람들이 마음도 곱다는 옛말이 틀린 게 아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불안한 눈빛으로 나의 뒤를 자꾸 흘끔흘끔 쳐다 보았다. 방에서 벌이라도 봤나? 왜 그렇게 쳐다보지? 나는 일단 감사의 인사를 건네면서 조금 더 말을 붙일 구실을 찾아 보았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저기 괜찮으시다면, 성함을 좀 알려주실 수...."

 

 "아... 김성희라고 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서는, 갑자기 못 볼 거라도 보았는지, 무언가에 질린 표정으로 잠시동안 굳어 있었다. 그러고서는 급작스럽게 만남의 종료를 선언하였다.

 

 "안녕히 계세요. 민재 씨."

 

 뭐야, 내 이름은 어떻게 안 거지? 그녀는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서는, 떡쟁반을 던지듯이 건네주고서는 그대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 버렸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도대체 뭘 봤길래 저러지?
 정답은 현장에 있었다. 문을 닫고 뒤를 돌아보니, 야차의 얼굴을 하고 있는 리돌이 있었다.

 

 "너 표정이 왜그래?"

 

 "아닙니다." 

 

 질투하는 건가? 저번에도 그러더니만. 처음 보는 사람을 뭐 저렇게 혐오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거지? 리돌은 성희 씨가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소리가 멎고서야, 조금씩 표정이 풀려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떡을 올려두기 위해 주방으로 가려던 나의 소매를 붙잡았다. 

 

"민재."

 

 번역기가 아닌, 그녀의 원래 목소리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내 이름만을 부를 때는, 번역이 필요 없어서 그런 건가?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지는, 어디선가 들어 보았던 그 목소리가 내 귀에 들어온다. 물론 처음에 번역기를 끈 목소리를 들어보긴 하였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걸수도 있겠다.

 

 "왜?"

 

 리돌은 나의 대답을 듣고서는, 조금 충격을 받은 듯이 나를 응시하였다. 그러더니 잠시동안 그녀는 나의 소매를 붙잡은 채로, 나의 눈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는 듯이 서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더니 붕 떠서 자기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리고서는 나와 그녀의 방 문 역할을 하는 루비의 포스터를 소리가 나게 닫아 버렸다. 쾅!
 뭐야, 내가 뭐 잘못했나?  왜 저래? 저 녀석이 저 정도까지 자기어필을 한 적이 없었는데.

 

 "리돌아, 뭐 기분 안 좋은 일 있어?"

 

 리돌은 문도 열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목소리가 울린다.

 

 "아닙니다."

 

 "기분 나쁜 일 있으면 얘기를 해. 그래야 도와주지."

 

 "민재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허허, 얘 좀 봐라? 분명히 무언가 나한테 삐진 구석이 있는데 지금 무엇 때문에 이러는 지는... 모르겠다. 평상시에 여자들하고 대화를 해 봤어야 알지. 아니, 그보다 말이 통해야 이해를 하고 말고 하지 이거 원. 

 에라 모르겠다. 일단 나는 잃어버린 나의 시간을 찾기 위해 자기 혼자 협상 결렬을 선언하고 위로 올라가 버린 달나라 대표에게는 신경을 끄기로 하였다. 일단 조금이라도 책을 좀 보고 있자. 조금 후에 내려오면 내려오는 대로, 아니면 아닌대로 따로 말해서 처리하면 되겠지. 
 한국사 책을 피고, 복습을 하면서 단원을 한 두 개쯤 넘겼을 까, 천장쪽에서 입질이 오기 시작했다. 포스터가 널판지가 되어 버린 다음부터는, 열 때 문에 기름칠을 하지 않은 것 같은 특유의 소리가 난단 말이지. 저 녀석은 눈치 못 챘는지 몰라도. 

 

 끼이이...

 

 나는 그 소리를 듣고서는, 핸드폰을 보는 척 카메라 어플로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 곳에는, 마치 공포영화의 한장면처럼 천장 아래로 거꾸로 목만 내밀고 나를 바라보는 백발의 처녀귀신이 있었다!  

 

 "으어! 깜짝이야!"

 

 "꺄악!"

 

 으, 으하!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어떻게든 리돌이 나를 지켜 볼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저렇게 간 떨리는 방법으로 볼 줄은 몰랐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놀란 마냥, 원래 목소리로 비명을 질러 버리잖아, 지금.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한 번 핸드폰으로 뒤를 확인했다. 도, 도저히 무서워서 지금 그냥 바로는 못 보겠다.
 다행히 처녀귀신(?)은 들어간 듯 싶었다. 조, 좋아. 지금이다.

 

 "리돌."

 

 살짝 시간을 두고, 대답이 내려왔다. 대답과 함께 치렁치렁한 흰 머리와, 눈까지만 빼꼼히 내민 리돌의 모습도 같이 내려왔다. 

 

 "왜."

 

 "방금 성희 씨가 뭐 줬는지는 알아?"

 

 "모릅니다."

 

 "떡이라고,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이야."

 

 "음식입니까?"

 

 "그래. 아주 달고, 맛있지."

 

 '달고' 와 '맛있지'에 강세를 주어서 발음을 하는 것이 포인트. 갑자기 리돌의 고개가 홱 돌아서 부엌으로 향한다. 이 녀석 성격상, 먹는 게 먹힐 것 같다 생각은 하였으나 이렇게까지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떡이 다 맛있지만, 저건 특히 맛있다고. 너 지금 안 내려오면 나 혼자 다 먹는다?"

 

 스르륵,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치 액체괴물 흐르듯이, 하얀 옷의 소녀는 바로 아래 위치해 있는 침대로 천천히, 그리고 사뿐히 떨어졌다. 그러고서는 조용히 식탁을 펴더니, 그 앞에 앉아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쯤 되면 무언의 압박인거지. 지금 같이 먹자는. 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다 비웃음을 한 번 날리고서는, 다시 책에 집중하는 척 하였다. 그렇게 무시하고 가만히 있으니, 뒤에서 무어라 무어라 하는 소리가 들린다.

 

 "민재, 혼자 먹으면 안 됩니다. 식사를 중단해야 합니다."

 

 "그냥 굶어 죽으라는 거?"

 

 "민재는 지구상에서 너무나 많이 먹었다. 당신은 나 같은 여자에게 그것을 주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당연한 듯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식탁을 탕탕 치고 있다. 신기하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널 쫓아내려고 안달이 났던 사람이라고, 나는. 그런데 이제는 밥투정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뭐, 이렇게 하루하루 익숙해져 가는 건가. 나는 한숨조로 이야기를 끝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달나라 아가씨가 처음 먹을 시루떡을 잘라 주기 위해서. 

 

 "그래, 많이 먹어라, 많이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