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로변 건물 창문에서 잡동사니들이 쏟아졌다. 병사들이 오가며 대로에 잡동사니로 가벽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피로에 찌든 얼굴이었지만 멈춰서는 사람은 없었다.


굉음이 울리며 성벽 위에 먼지가 피어올랐다. 가벽 위에 반쯤 박살난 의자를 내려놓다 말고 고개를 든 코린은 꽥 소리질렀다.


'머리 조심해라!'


무너진 성탑에서 쏟아진 돌덩이와 나무, 흙먼지가 가벽 일부를 덮쳤다. 대부분은 경고를 듣고 가까스로 잔해를 피했지만 그닥 운이 좋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으적 하는 소리에 뒤이어 선뜩한 비명 소리가 전투의 소음을 찢어발겼다. 


가벽을 쌓아올리던 병사들은 대부분 아무 집에나 뛰어들어 목숨을 건졌다. 빠르게 머릿수를 세어보니 2명이 비었다. 다리가 뭉개진 채 비명을 질러대는 한 명까지 세면 다른 하나는 저 돌무더기 아래에 있는 게 뻔했다. 코린은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잔해 치우고 쓸만한 건 가벽 높이는 데 쓴다. 트뤼도, 넌 아무나 한 명 골라잡고 저놈 끄집어내서 진료소로 데려가, 가는 동안 조용히 좀 시키고.'


트뤼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옆에 있던 병사와 함께 다리가 뭉개진 불행한 놈을 잔해에서 빼내 들고 갔다. 남은 이들은 가벽을 덮친 돌무더기를 들어내기 시작했다. 반쯤 피곤죽이 된 시신이 튀어나왔을 때는 놀랍게도 아무도 토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시신을 들어 방해되지 않는 곳에 치워둘 뿐이었다.



잔해를 치우고 가벽을 보수하는 작업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이제 벗어둔 갑옷을 다시 입을 시간이었다. 누비갑옷과 사슬갑옷을 껴입고 목과 턱을 가리는 목가리개를 걸친 코린은 가벽 너머를 바라봤다. 너덜너덜한 성문과 성문을 지탱하도록 쌓은 잡동사니들이 보였고 성문을 지나 갈라지는 골목들마다 쌓인 가벽들이 보였다. 3개 조 110명 정도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가늠해보던 코린은 금방 그만뒀다. 다른 아군이 내성으로 들어갈 때까지 얼마 버티지도 못할 거였으니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바윗덩이가 성벽을 두들기는 소음이 점점 거세졌다. 코린은 챙이 넓은 투구를 쓰고 옆에 둔 도끼로 땅을 짚으며 일어났다. 기분이 점점 나빠졌다. 언제든 비가 쏟아질 것처럼 우중충한 날씨와 끊임없이 울리는 굉음은 미치도록 짜증났다.


성벽 위에 있던 궁수들이 아직 안 무너진 성탑 계단을 통해 내려오기 시작했다. 더이상 버티기 힘든 모양이었다. 쇠뇌를 든 병사 한 명이 내성 쪽으로 달려가는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코린을 향해 달려왔다. 헥헥거리는 소리가 말을 방해하는 듯했다.


'저, 적이 충차를 성문에 붙혔습니다, 곧 성문을 뚫을 것 같습니다,'


코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바로 옆의 조원이 다른 가벽들에 신호를 보냈다. 보고를 마친 병사는 자신의 조와 합류하기 위해 헉헉대며 달려갔다. 곧 금속이 나무를 때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조원들은 조용히 시위를 당겨둔 쇠뇌를 가벽에 얹고 사기병을 꺼내 성문과 가벽들 사이의 공터에 집어던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금파리와 마름쇠들이 바닥을 뒤덮었다.


모두가 쇠뇌를 하나씩 집어들고 가벽 뒤에 바짝 붙었다. 성문이 뜯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놈들이 가벽에 붙을 때까진 계속 쇠뇌를 쏴, 그리고 가벽 위로 올라오는 놈들이 생기면 그때 각자 무기 들어라. 그리고 흥분해서 가벽 넘어가는 새끼는 나한테 뒤진다.'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충격을 견디지 못한 성문이 잡동사니들과 함께 안쪽으로 무너졌다. 함성 소리가 울리며 일군의 병사들이 잔해를 타넘었다.


가장 먼저 들어온 자들은 사금파리와 마름쇠를 밟고 고꾸라졌다. 발에 이어 온몸에 날붙이들이 박히며 끔찍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뒤이어 들어온 병사들은 잠시 주춤했지만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무어라고 외치자 발로 바닥의 장애물들을 쓸어내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방패를 붙이고 천천히 나아간 그들이 사거리의 중간 즈음에 도착했다.


'쏴!'


코린은 외치는 동시에 쇠뇌 방아쇠를 당겼다. 병사들이 제각기 쇠뇌를 쏘아붙였고 다른 가벽에서도 화살이 날아들었다. 방패를 제때 들어올리지 못한 적들이 화살에 꿰뚫려 쓰러졌다. 코린은 쇠뇌를 뒤에서 장전을 맡은 병사에게 넘기고 다른 쇠뇌를 집어들었다. 다시 한 놈의 머리를 꼬치로 만들어버린 코린은 이를 악물었다. 혼란이 좀 더 길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행운을 바라는 건 무리였다.



성문과 각종 잡동사니에서 나온 판자들이 바닥에 깔린 마름쇠들을 덮었다. 뒤이어 들어온 두 번째 무리는 미리 방패로 느슨한 벽을 만든 뒤 화살을 받아내며 가벽을 향해 달려들었다. 대부분의 조원들이 쇠뇌를 내팽개치며 각자의 무기를 집어들고 가벽 위로 올라섰다. 코린도 양손에 도끼와 쇠뇌를 들고 가벽 위로 오르려 했다.


강력한 충격이 찾아왔다. 머리가 한쪽으로 홱 젖혀졌고 전신이 아찔해졌다. 뒤에서 올라오던 조원이 부축해줘서 간신히 굴러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끈이 끊어져 저만치 튕겨나간 투구와 근처에 떨어진 투창을 본 코린은 곧바로 투창을 던진 적을 찾았다. 새 투창을 꺼내들던 그 병사는 두 번째 투창을 던지지 못했다. 코린은 소모된 쇠뇌를 던져버리고 도끼로 가벽을 기어오르는 적들을 후렸다. 이미 사방에서 금속과 나무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방패가 쪼개지며 파편이 튀어올랐다. 날아든 창날이 목가리개에 튕겼다. 다시 휘둘러진 도끼가 피와 뇌수를 흩뿌렸다. 옆에서 누군가가 피 흘리는 배를 움켜쥐며 허리를 굽혔고 그 얼굴을 향해 창날 네댓 개가 날아들었다. 생겨난 빈틈으로 적병 둘이 피에 젖은 창날을 번득이며 기어올라왔다. 피끓는 고함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코린은 어디서 그런 고함이 들렸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벽을 넘어온 적을 덮쳤다. 놈은 뭐라고 소리지르며 창을 내뻗었다. 도끼자루가 매끄럽게 뻗어나가 창자루를 걷어내었고 도끼의 물미가 놈의 턱을 가격했다. 갑자기 오른쪽 관자놀이 부분이 불타는 듯한 느낌이 찾아왔다. 칼날이 머리 바로 옆에 있었다. 코린은 왼쪽으로 홱 돌아 무기를 휘둘렀고 다시 한 번 칼을 휘두르려던 적 보병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팔꿈치 아래가 사라져 비명을 내지르던 놈은 옆구리를 깊숙하게 찔려서 가벽 아래에 거꾸로 처박힌 뒤에야 조용해졌다.


살아남은 적들이 가벽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약간 어지러운 느낌을 받으며 오른쪽 머리를 아무 천이나 집어다 싸맨 코린에게 부관 역할을 도맡던 멜런이 다가왔다. 아까 튕겨나갔던 코린의 투구를 손에 쥐고 있었다.


'시간은 충분히 끌었습니다, 지금 내성으로 퇴각해야 합니다. 다른 조들도 물러나려 하고 있습니다.'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코린은 투구를 다시 머리에 쓰며 살아남은 조원들을 수습해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공포 섞인 고함을 들었을 때 물거품이 되었다. 40명은 족히 되는 적 보병들이 성문을 통과했다. 하나같이 검은 강철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고 붉은 독수리 휘장을 두르고 있었다.


'퇴각해,'


'예?'


'퇴각해라, 개죽음 당하는 거 싫으면 내성 쪽으로 뛰-'


충격에 튕겨나가 땅에 몇 바퀴 구른 충격으로 온몸이 비명질렀다. 가벽에는 큼직한 구멍이 나있었고 길 한가운데에 말뚝 비슷한 게 파고들어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검은 기사들이 무너진 틈으로 뛰어들어왔다. 가벽에 가장 가까이 있던 병사는 제대로 일어서기도 전에 목을 찔려 절명했다. 가까이 있던 병사들이 일어나 창을 내찔렀지만 유의미한 타격은 주지 못했고 셋 중 둘이 팔을 잘리고 머리가 뭉개지며 쓰러졌다.


코린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사를 보고 도끼를 내밀었다. 기사가 뭐라고 하는 듯 했지만 귀가 울려서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어차피 뭐라는지 알아듣지도 못했다.


'나 니네말 몰라 썅놈아'


기사는 그 말에 답하는 대신 들고 있던 전투 망치를 휘둘렀다. 도끼와 망치가 몇 차례 부딪혔다. 망치의 물미가 코린의 관자놀이로 날아들었다. 왼쪽으로 피한 코린은 도끼자루를 그 기사의 갑옷 고정 끈에 걸었고 그대로 기사의 다리를 걸어 패대기쳤다. 뒤쪽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로 돌며 피하려 했지만 이미 휘둘러진 메이스는 투구 챙을 가격했다. 눈 앞이 핑 돌았다. 도끼는 아직 땅에 넘어진 기사의 갑옷에 걸려 있었다.


코린은 검을 뽑아들었다. 눈 앞이 흐렸다. 메이스를 든 기사가 다시 달려들었고 코린은 마주 달려들었다. 메이스가 휘둘러졌지만 코린은 칼날을 짧게 잡아 일격을 흘렸다. 그리고 짧게 잡은 칼날은 그대로 기사의 겨드랑이 갑옷 틈새를 파고들었다. 기사가 비틀대는 사이 칼날은 뽑혀나왔고 눈구멍을 다시 파고들었다.


코린의 앞에서 기사가 허물어졌다. 그리고 창날이 코린의 오른 어깻죽지를 파고들었다. 고통이 엄습했다. 기사들의 뒤를 따라 적 병사들이 가벽을 넘어왔고 조원들은 전부 피웅덩이 속에 엎어져 있었다. 창 몇 자루가 더 파고들어왔고 뽑혀나갔다. 코린은 뒤로 넘어져 건물 벽에 기대는 모습으로 쓰러졌다. 온몸이 불타는 듯 뜨거웠고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한 기사가 검을 뽑아든 채 그에게 다가왔다. 기사는 무언가라도 집어들려 버르적거리는 코린의 왼손을 잠시 바라보았다. 입에서 피거품을 흘리며 점점 느리게 왼팔을 움직이는 끔찍한 몰골을 잠시 관찰하던 기사는 경의어린 목소리로 뭐라 말했다. 코린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고통을 끝내줄 단검이 목을 파고들 때도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