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라는 감기가 몸을 시리게 하고 머리를 뜨겁게 달군다.

무슨 이유로 나는 이름 모를 꽃밭에 몸을 뉘이고 있을까. 꿈 속에 빠져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 없다. 덧그렸던 꿈은 아득하기만 하다. 오후의 노을이 새붉게 익는다. 새하얀 머리카락의 소녀가 나를 내려다본다.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대고 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일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소녀가 입을 연다.

"저희가 처음 만난 것이 맞나요?" 눈을 껌뻑거리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눈물을 흘리고 있으신가요." 오른손으로 눈가를 건드린다. 촉촉한 자국이 바람에 쓸린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겠다. 무엇이 그토록 아팠던 것일까. 소녀가 내게 손길을 준다. 손을 잡고 허리를 편다. 주변을 둘러본다. 작고 촘촘한 꽃이 새하얗게 지평선까지 피어있다. 종종 솟아오른 빨간 바람개비가 바람에 따라 날개를 돌린다. "여기는 꿈속인 걸까." 소녀가 눈웃음을 짓는다. 신비스럽다. "이곳이 꿈인지 현실인지 도대체 무엇으로 밝혀낼까요.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가 있어 낳게 되지요. 만물에 구분은 필요 없어요." 소녀가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올린다.

나는 말한다. "너의 이름을 알고 싶어."

소녀는 소매가 긴 하얀색 셔츠를 입고 있다. 바람이 기쁨을 느껴 뛰어오를 때마다 보랏빛 주름치마가 흔들린다. 다리가 맨발로 흙을 짓누른다. "이름은 언제나 바뀌는 것이라 말할 수가 없답니다. 그래도 알고 싶으신가요?" 난처함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름이 없으면 너를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소녀는 미소가 헤프다. 양팔을 벌려 한 바퀴 몸을 돌리고 땅으로 쓰러진다. "만물은 있는 것에서 비롯되나, 있는 것은 없는 것에서 나오니 저 또한 마찬가지랍니다. 당신은 부디 확실한 것을 알려 하지 마시고 눈앞에 있는 부드러운 살결을 신경 쓰시면 된답니다. 그것이 당신의 마음을 달랠 수 있을 테지요."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에게 걸어갔다. 여전히 해맑다. 그리고 불긋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소녀의 곁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빛과 어둠이 경계를 나누는 시간에는 불안함을 느낀다. 멀리 누군가가 달려오더라도 쉽게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제가 없는 곳에서 있으셨던 적이 있기 때문이지요." 소녀가 기어와 나에게로 안긴다. 보드라운 꽃에 머리가 휩싸인다. 소녀가 배에 앉아 다리를 양쪽으로 뺀다. 허리를 숙여 나와 마주 본다. "사는 것에 집착하지 않으면 죽음이 없으니, 욕망이 없으면 근심도 생길 일이 없답니다. 당신은 혹시 고단한 삶을 살아오셨나요." 소녀가 나의 뺨을 어루만진다. 눈빛에 담긴 시름이 마음을 서글프게 한다. 이곳에 오기 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기억나지 않으나 감정은 알고 있었다. 본능을 손에 움켜쥐고 소녀를 안는다. 서로의 다리를 꼬아 묶는다. 양팔을 맞대고 손가락을 겹친다. 그윽한 꽃향기가 감돈다. 소녀의 체취도 이와 마찬가지이리라. "당신이 원한다면 마음 가는대로 해도 된답니다. 모든 것을 맡겨주세요." 소녀와 입을 맞추고 혀를 포갠다. 침을 모으고 옮긴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어느새 날이 저문다.

떼어낸 입술에 바람이 스민다. "너를 사랑이라고 불러도 될까."

떼어낸 꽃잎에 바람이 스미어 허공을 메운다. "사랑과 미움에 언제나 같은 놀라움을 느끼세요. 몸과 고난을 똑같은 것으로 여기고 귀하게 여기세요. 당신이 아픔을 느끼는 것조차 당신의 육체가 살아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도 몸을 아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당신께 맡길게요. 저도 똑같이 아껴주세요." 나와 소녀를 빼고는 아무도 들일 수 없는 비밀의 화원에서 밀회를 즐긴다. 허공을 채운 꽃잎이 점이 되어 한데 모인 형상을 드러낸다. "진정한 것은 비어 있으나 언제나 가득하며 넘치지 않아 깊고 맑지요. 당신은 도리를 중요하게 여기세요. 세상보다도 먼저 당신을 위로할 테니까요."

하지만 소녀와 떨어지는 것이 두렵다. 진정한 것은 나를 위로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과 같이 지내면 언제나 행복을 느끼리라. 그것이 나를 위로한다. 아직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미래가 무지한 나를 기다린다. "나와 떨어지지 않으면 해. 영원히 이곳에서 너와 같이 있고 싶어. 그래도 될까."

소녀가 나를 벗어나 몸을 일으킨다. 날린 꽃잎으로 몸을 치장한 소녀의 살결에 눈물이 한줄기 흐른다. "그래서는 안 돼요.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것이지요. 제게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된답니다. 당신이 떠나지 말아야 할 것은 따로 있어요. 당신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껴안으면 사랑이 당신을 떠나지 못해요. 젖먹이와 같은 부드러움을 가지고 마음속에 있는 거울을 깨끗이 닦아내어 가꾸세요. 그리한다면 하늘이 몇 번을 바뀐들 당신은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그러니 만들고 가꾸되 가지려 하지 마세요." 나는 숨을 죽인다. "하지만 이제야 너와 만날 수 있었는걸……."

첫사랑의 감기가 엷게 깔린 꽃잎에 실려 하늘을 날아간다. 이윽고 소녀를 병들게 하고 깊은 고난에 빠트린다. 신음조차 내지 않았으나 눈물은 눈동자를 맑게 바꾸며 붉은빛을 녹여낸다. 혹여 피가 흐르는 것은 아닐까. 급히 다가가 소녀를 품에 안는다. 여린 소녀의 다리가 풀려 바닥에 무릎을 찢는다. 무엇이 소녀를 이토록 절망에 내모는 것일까. 서늘한 밤바람도 소녀의 마음을 식힐 수는 없었다. 어깨가 떨린다. 허리가 들썩거린다. 진심으로 소녀를 사랑하는데도 떨림을 쉽게 없앨 수 없다. "내가 너를 용서할게. 네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세상 모든 사람이 너를 욕하고 때리더라도 괜찮아. 그만큼 너한테 사랑을 베풀 테니까. 그러니 눈물을 그쳐줘." 소녀의 피가 섞인 눈물이 나의 심장에 번진다. 감정이 얇은 막이 되어 심장을 조인다.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는다. 서로의 가슴이 겹치며 고동이 하나로 바뀐다. 소녀의 아픔을 덜어낼 수만 있다면 생명조차 희생할 수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오늘 피어난 풀잎이 모든 꽃잎을 뱉어낸 뒤에야 소녀는 눈물을 그쳤다.

소녀가 지쳐 쓰러진다. "미안해요. 당신께 미안해요……."

여전히 나의 품속에서 몸을 후들거린다. 소녀의 허연 피부가 붉게 물들었다. "마지막 부탁이 있어요. 부디 저와 같이 잠을 자주세요." 소녀가 그리 말하며 적적한 눈웃음을 짓는다. "네가 평온함에 빠져 다시 밝게 웃을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소녀의 등을 오른손으로 두드리며 자장가를 입에 담아 부른다. 허연 꽃잎에 몸을 뉘고 다리가 우리를 묶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서 숨을 내쉬며 잠에 빠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행복을 느낀다. 어느새 찾아온 잠에 정신과 육체를 맡긴다. 자장가는 잠결에 끝난다. 내일이 되고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면 소녀한테 해맑은 인사를 건넬 것이다. 마지막으로 눈동자와 함께 미소 짓는다.

"잠자는 당신이 듣지 않기를 원하며 내뱉는 혼잣말과 함께."

다시 눈을 떴을 뜨자 위에서 천장이 시허옇게 피어나고 있었다. 열린 창문에서 흐르는 경쾌한 바람이 몸을 닦아낸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이불을 걷어내고 기지개를 핀다. 햇살이 창가를 스친다. 거울이 빛을 반사한다.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거울에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곳에 있는 내가 한줄기 눈물을 흘린다. 오른손으로 눈가를 건드린다. 촉촉한 자국이 바람에 쓸린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겠다. 무엇이 그토록 아팠던 것일까…….

저는 아직도 꿈을 꾸면 닿는 머나먼 끝에서 빌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는 당신이 이곳에 찾아와 아픔을 겪지 않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어느새 이곳에서 저와 함께 있었다는 것조차 잊는 당신을 지켜보며, 붉디붉게 물드는 하늘 아래에서 영원한 슬픔에 취하고 있지요. 겨우 찾아온 행복은 운명과 함께 제 손길에서 벗어납니다. 당신이 슬픔에 취하지 않도록 거짓말을 입에 품습니다. 당신은 저를 기억하지 못하지요. 슬픔을 당신과 같은 것으로 여기어 언제나 놀라워하는 저는 끊임없이 돌고 도는 세상에 홀로 남겨집니다. 당신을 위해서 만나지 않는 것을 원하고 있으나, 제 마음은 언제나 사랑을 가지고 싶어 하지요. 이렇듯 모순은 언제나 자신을 찌르는 흉기가 됩니다. 새벽이 지나가고 다시금 피어나는 꽃을 바라보며 뻘건 피를 흘리지요.

줄곧 당신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당신과 몸을 맞대고 사랑을 나누어 결실을 볼 수만 있다면, 바람을 깊게 품는 순간마다 아련히 바뀝니다. 사랑해 마지않는 당신의 감정에 따라 눈물을 쏟는 자신의 나약함을 대신할 것은 없을까요. 저의 나약함마저 용서하고 마는 당신의 다정함은 언제나 똑같답니다. 저희에게 내일은 없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도 전부 그 다정함 때문입니다. 어찌 당신 앞에서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눈물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 움직일 수가 없는데, 부디 건강히 있어 주세요. 웃음을 지켜주세요. 부디, 또 다른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여주세요. 저는 괜찮답니다. 당신과 함께 있을 나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요. 만약 세월이 흘러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조그만 흔적을 더듬어 당기어 당신께 찾아가겠습니다. 당신이 있는 세상에서 웃을 수 있었던 것, 당신과 함께 할 수 없는 미래를 원망하였던 것, 당신의 목소리와 손짓을 비롯한 모든 사랑에 끝을 고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품고 마는 미련한 다짐을 가지고서 꽃밭에 몸을 뉘이고 얕은 미소를 짓는 당신을 바라봐요. 검지를 입술에 갖다대어 다시 비밀을 만듭니다. 사랑스러운 당신이 눈을 뜨는 그 순간에 인사를 건네며, "저희가 처음 만난 것이 맞나요?"


まふまふ 작사 작곡 かくしごと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떠오르는 대로 써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