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가을은 신의 축복이 임하였노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들판에 가득한 밀은 나부끼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흔들렸다. 황금빛 물결을 스친 바람은 수확하는 농민들의 땀을 씻기고 고된 노동을 달래주었다. 하늘은 파랗고 맑아 끝이 보이지 않게 높아보였다. 잘 보기 힘든 햇빛까지 내리쬐는, 이상적인 가을날이었다.


마을 광장에서는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입구에서 쫓겨났을 집시들은 오늘만큼은 마을 안으로 들어와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집시들이 연주하는 이국적인 선율 아래 마을의 청년과 처녀들이 어울려 춤울 추었다. 콧대 높은 귀족들의 우아한 춤은 아니었으나, 선율과 자신의 흥에 따라 움직이는 춤에는 사람들을 춤판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순박한 시골 청년은 잠깐이나마 도시물을 먹고 온 처녀의 눈웃음에 볼을 붉혔다. 마을 곳곳에서 빵과 고기를 굽는 냄새가 퍼졌다.


촌장은 나중에 마시려고 꼭꼭 감춰둔 명주를 꺼내왔다. 귀한 술로 목을 축인 대장간 막스가 말했다.


"어엇, 촌장님 너무하신거 아닙니까? 이런 맛있는 걸 혼자만 드시려고!"


"이 사람 뭐야? 그럴꺼면 이리 내게!"


"줬다 뺐는게 어딨습니까? 치사하게!"


두 사람의 만담에 마을 사람들의 웃음이 울려퍼졌다. 평화롭고 은혜로운 날이었다. 음악과 웃음, 저녁을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가 은은히 어울려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집시들은 다음 마을까지 가기 위한 식량을 넉넉히 챙겨 신께 감사를 드렸고, 마을 사람들은 풍요로운 한 해를 보내게 된 데에 감사하며 기도를 올렸다. 그 날은 모두가 사랑하는 그런 날이었다. 낮 동안에는 그랬다.


달이 어스름히 떠오를 무렵, 한 무리의 피에 젖은 사람들이 찬송을 부르며 나타났다. 신의 자비와 평화를 노래하며 사나운 빛을 발하는 그들의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나아가 물었다. 


"우리는 간악한 악마의 앞잡이 칼뱅파를 멸하는 신성한 군대이다. 충분한 양의 식량을 봉헌하라."


촌장은 신교니, 구교니, 칼뱅파니 뭐니 하는 건 알지 못했지만 귀족이나 칼을 든 자에게 대항하면 안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촌장은 곁에 있던 장정들을 시켜 마을 창고에서 막 수확한 밀을 꺼내오게 했다. 


밀을 가져다 바쳤음에도, 그들의 눈은 가득 차 있는 창고에 고정되어 있었다. 탐욕으로 그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네 이놈! 감히 우리를 기만해? 네놈은 더러운 신교구나. 악마와 교접한 쓰레기들을 쓸어라!"


이미 눈이 돌아간 이들은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고 날뛰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촌장의 목이 날아갔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성난 이리떼와 같은 패잔병들은 창을 꼬나들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침묵이 내려앉아있던 마을을 짓밟기 시작했다. 순박하던 청년은 자신이 좋아하던 여자를 뒤에 두고 낫으로 병사들을 베어넘겼다. 두 명째 베어넘기던 그는 이내 세 방향에서 찔러들어온 창에 무릎을 꿇고 절명했다.


황금빛 풍요가 일렁이던 밭은 붉은 빛으로 물들었고, 이내 밭고랑에 넘쳐흘렀다. 사람들을 군침돌게 하던 빵과 고기 냄새는 비린내 짙은 피 냄새로 바뀌어갔다. 흥겨운 음악소리와 웃음소리는 이내 짐승들의 신음소리와 처녀들의 비명, 남자들의 단발마와 부모 잃은 아이의 울음소리로 덮여갔다. 악마와 교접했다고 사람을 베어넘긴 이들은 그들이 악마라 칭한 이들을 취하고 있었다. 잔학한 아이러니였다. 




이들이 마을에 들어오기 전, 십인장이 지휘관에게 물었다.


"누가 구교고 누가 신교인지 어떻게 구분해야 합니까? "

 

지휘관이 답했다.



"모조리 죽여라. 판단은 신께서 하실 것이다."


1643년의 겨울은 시리도록 추웠다고, 살아남은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하곤 했다.





30년 전쟁(1618~1648)


1618년 부터 1648년까지 진행된 유럽의 전쟁. 유럽 최후의 종교전쟁이자 최초의 국제전쟁이라 불린다. 발단은 종교 갈등이었으나, 이내 이익을 추구하는 전쟁으로 변모한다. 


전쟁의 주요 무대가 된 독일 도시와 공국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전투에 참가한 많은 군인들이 용병이며 이들 용병 가운데 다수는 급료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기 때문에 보급품 충당을 위해 시골 마을을 약탈했다. 


예전부터 유럽 사회를 괴롭히던 전염병까지 돌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으며 전쟁과 전염병으로 인해 모든 경제활동이 마비 상태가 되고 결혼율 및 출산율은 급감하고 난민이 대거 양산되면서 독일 지역의 인구 손실은 극에 달했다. 30년의 전쟁 기간 동안 사망한 독일인은 무려 800만 명으로 당시 신성 로마 제국 인구의 1/3에 달했으며 살아남은 2/3도 거의 죽어나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독일은 처참하게 파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