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함을 품은 적적한 비가 내리던 때 언제나 지나쳐가던 곳에 그대가 고개를 숙인 채로 홀로 앉아있었다. 알 수 없는 그리움을 품은 비가 밀려오는 거리는 하나의 세상을 이룬다. 새벽을 흐르는 작달비가 나의 맨발을 적신다. 투명한 비닐우산을 한 바퀴 돌리며 뒤를 돌아본다. 잘못 본 것인가 싶었지만, 그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싸늘한 새벽의 공기가 차분히 가라앉아 고개를 숙이는 것일까. 가까이 다가가서 옆에 쭈그려 앉는다. 투명함을 자신의 색깔로 칠하는 그대에게 뺨을 붉히며, 위태로운 미소를 짓는 서로와 마주 본다. 가로등에서 나오는 샛노란 불빛이 빗방울을 반딧불이로 바꾼다. 떨림과 함께 말을 건다.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니?"

맨발로 계단에 앉은 그대가 원피스를 빗물에 적신다. "집 앞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비가 오면 바깥으로 나오니까요." 꺼먼 하늘이 자리를 잡는 시간에는 아무런 열기도 남아있지 않다. 새로운 여름이 찾아오고 이미 한 달이 지났어도 아직 햇살을 살결에 대지 못한다. "아직도 죄책감을 느끼나요? 저는 당신한테 사랑을 고백하려고 마음먹었던 순간을 후회하지 않아요. 그 선택이 다시 저를 죽음에 내몰아도 똑같지요." 새벽을 오가는 밤길은 위험하다. 그래서 그대를 지나치지 못했다. 그림자가 불빛에 흔들린다. "우리가 나눌 사랑을 세상은 찾을 수 없겠지." 숨을 멈추고 말을 삼킨다.

"과거에 있던 일은 잊고 싶었지만 결국 미래를 잊을 수밖에 없어. 과거와 미래를 잊고 나면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을까."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곳에 멈추어 있다. 왼손으로 우산을 들어 어깨에 걸친다. 오른손을 꺼내어 그대한테 건넨다. 그때도 머나먼 여름을 넘어온 따스한 손을 찾아냈다면 맞잡을 수 있었을까. 보드라운 그대의 살결이 나를 묶는다. 손가락이 얽혀 만든 매듭을 지키고 싶다. 맞잡은 손이 떨어지면 나는 다시 혼자가 되는 것일까. 발가락을 조몰락거린다. 입고 있던 반바지가 물에 젖어 핏빛으로 바뀐다.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느끼고 있는 온기도 거짓일까. 그대가 손을 움켜쥔다. 고개를 돌려 그대를 바라본다. 옆모습이 슬픔으로 잠긴다. 쏟아지는 빗방울이 물결을 이루어 하수구로 모여든다. 눈물 때문에 큰 물결이 다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 그대에게도 닿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떠올려볼까요." 젖은 눈동자가 웃음을 짓는다. 우산이 위태롭게 사이를 걸친다. 그대가 집에 찾아왔을 때도 비가 오던 새벽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만나지 못하였다. 아픈 가슴에 손을 올린다. 고개를 떨구는 순간마다 그대가 행복했던 기억이 사라진다. 빗소리가 튕긴다. 향기가 짙어진다.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우산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매섭다. 손을 놓는다. 우산이 바닥에 떨어진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마음에 아무것도 담기지 못한다.

부끄러움을 내쉰다. "너한테 찾아가서 사랑을 고백하려고 했어. 진심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남은 왼손을 뻗었다.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고개를 비틀어 오른뺨에 입술을 찧는다. 당혹스럽게 달아오르는 살결에 입술이 불그레 물든다. 충만한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 가능한 그대가 죽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네가 살아났다고 믿을게." 입술을 떼고 얼굴을 바라본다. 그대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오직 나 뿐이기를 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일은 이제 일어나지 않으리라. "피를 흘리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 당신의 입술에 뺨을 붉히는 것도 똑같지요. 하지만 저는 당신의 따스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수줍은 듯이 눈웃음을 지으면서도 말소리는 단호했다.

"비가 그치면 네가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비는 슬픔으로 만들어지고 사람의 발길을 한 곳에 묶어둔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다면 설사 슬픔을 느끼더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

"당신도 죽을래요. 제가 죽여드릴게요." 하지만 선뜻 대답하지는 못한다. "깊은 슬픔은 언제나 죽음으로 향하는 지름길이지요. 미련을 떠나보내는 수밖에 없답니다. 제가 온 이유도 마찬가지지요." 죽은 사람과의 만남은 이상야릇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저와 만나지 못하게 되어도 서로가 사랑했다는 사실만은 남아있을 테니까요."

그대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콘크리트를 내딛는 그녀의 맨다리가 빛에 번득인다. 시허연 원피스가 비추는 그대의 살결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치맛자락을 들고서 한 바퀴 몸을 돌린다. "이토록 비참한 꼴로 전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닿고서 번져가는 고동을 느끼어요. 이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대가 양팔을 등으로 옮긴다. 허리를 앞으로 숙인다. 넋이 나간 채 바라보고 있던 나의 얼굴에 그대가 겹친다. 입술이 잇닿는다.

정적이 몸을 갉아 먹는다. 변하는 풍경을 등에 업고 괴로운 숨을 내쉰다. 쇠락한 삶의 끝에서 그대가 미소를 짓는다. 그것만이 서늘하게 젖은 마음을 새로이 덥힌다. 자신을 기만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낀다. 그대가 다시 나의 감촉을 벗어나는 순간에 눈물을 흘린다.

"나는 영원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네가 없는 세상은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너를 만나지 못한다면 나한테 살 가치가 있을 것 같니. 서로가 사랑을 나누었다는 기억은 죽음을 가져다주지는 못할망정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독이자, 삶을 시한부로 전락하게 만든 불치병일 뿐이야." 상온에서 방치되어 썩어가는 사랑에 눈물을 뿌려 생명을 연장한다. 숨쉬기가 괴롭다. "다시 나에게 다가와 줘. 상실감을 불태우지 않는다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 네가 죽고서 고작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눈물에 닿는 감정에 녹이 슨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느리게 흐르던 풍경이 멈춘다. "너도, 나도 싫어." 사랑에 타오르던 불꽃을 지피는 숨이 꺼진다.

그대의 품에 안긴다. 심장에 속삭이던 말이 피를 타고 온몸으로 퍼진다. 마비되는 감각이 자신을 구속한다. "확실히 내 눈앞에 있는 너를 없다고 말하다니 말도 안 돼." 내가 내뱉었던 말이 빗방울에 섞여 투명하게 바뀌기 전에, "아직도 얽혀들어 떼어낼 수 없는데도." 그대의 허리를 감싸던 양팔이 살결에 묻혀 저민다.

나의 머리를 쓰다듬는 양손이 머리카락에 파묻혀 스민다. 귓속에 그대의 목소리가 울린다. "잠시 이별이랍니다." 무릎이 바닥에 추락한다. 고개를 떨군다. 허공을 스치는 감각이 애달프다. 어느새 비가 그쳤다. 물이 만든 깊은 웅덩이에 얼마나 많은 것이 녹아들었을까. 그대를 애도하며 불렀던 투명한 사랑의 노래가 사라진다. 위태로운 미소가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라는 말은 얼마나 허망한 것일까. 태양이 아스팔트를 내리쪼이지 않도록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망한다.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 날도 비가 내리기를 덧붙인다. 엇갈리던 선이 하나로 겹치는 순간이 찾아오면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 자신을 꿈으로 밀어넣는다.

그날 그대가 무참히 칼에 찔려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리라. 사랑이란 고통과 행복을 합쳐 만든 것이다. 그대가 곁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만 있다면 나도 괜찮아질 수 있을까. 사랑이 마음에 큰 구멍을 뚫는다. 새로운 아침의 빛이 비에 젖은 풍경을 터트린다. 세차게 튀어나오는 색채가 눈동자를 더럽힌다. 눈이 점차 시력을 잃는다. 고열이 머릿속에 화상을 남긴다. 물이 바람에 씻겨 기화하며 몸의 열을 빼앗는다. 피어오르는 서늘한 향기가 코를 좀먹는다. 바람이 귀를 드나들며 처량한 소리를 내던진다. 오감에 빠져 웅덩이에 머리를 빠트리고 정신을 잃는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당신과 제가 살아서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반드시 그곳에 있을 것이라 맹세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제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던 것처럼 심술을 부리지요. 당신의 빈손을 양손으로 쥐고 있어도 저를 눈치채지 못합니다. 사실은 언제나 곁에 있어요. 세상에 고통만큼이나 행복도 있다는 것을 당신과 만나며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세상을 믿지 않으려고 하지요. 다른 사람은 자신의 고독과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곁에 앉아서 당신의 눈물을 닦아주어요. 얼굴을 들어 제 허벅지에 앉히고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요. 부디 제 몫까지 미소를 짓고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과 제가 다시 만나는 곳에서조차 희망을 찾을 수 없더라도, 제가 살아서는 안 되었던 존재라고 할지라도 당신이 저를 원하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끝없는 우울함에 빠져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고는 하지 마세요. 당신한테 모든 것들을 바칠 테니까요. 지금, 이 순간을 위하여 그동안 실수를 저지르면서 나아가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오늘은 모처럼 하늘이 맑으니까요. 심란함을 풀어내고 바깥에 나가보세요. 살면서 한 번도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어요. 설사 그 실수가 절망을 부르고 자신감을 잃어 어둠 속을 해맨다면 당신을 비추는 빛이 되어 드릴게요. 새로이 눈을 뜨는 순간마다 당신의 상처가 아물겠지요. 언제나 세상을 떠나지 않는 햇빛이 되어 당신의 아침을 축복할게요. 기쁨의 눈물과 함께 뺨을 붉히고 눈을 비비면서 잠에서 깨어나는 당신이 깨닫지 못하도록 몰래 입을 맞추면서, 당신의 미소를 볼 수 있는 구석에 앉아 끝나지 않는 여름을 고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