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수습마법사의 평범한 나날-2 인간의 조건

 

대륙의 유일한 제국, 하나뿐인 황제를 알현하는 영광의 홀은 제국의 광영을 보여주는 듯 찬란히 빛났다. 제국의 발 아래 놓인 수많은 가문의 상징을 새긴 깃발이 태양빛이 들어오는 창에 차례로 걸려있었다. 긴 회랑의 끝에 놓인 황금빛 옥좌 뒤로는 제국의 상징을 조각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어, 일견 옥좌를 신성히 보이게까지 했다. 


그 홀 한가운데에 예복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모르게 후줄근한 로브를 입은 남자가 무릎꿇리고 두 손이 결박된 채 있었다. 그 남자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영광의 홀에 있기에는 지나치게 이질적으로 보였다. 어떤 사람이라도 궁금증을 가지고 볼만한 광경이었다. 나라도 그랬을꺼고. 아니, 나라면 비웃었을껄? 뭔 짓을 했으면 저러고 있냐ㅋㅋ 그랬겠지.


ㅡ그래, 거기에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면.



오늘도 어김없이 연구실 책상에서 엎어져 잔 나를 깨운건 미리 설정해뒀던 알람소리가 아니었다. 


"죄인을 포박하라!"


나는 일어나자마자 느껴는 거친 사내들에 손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꽤 추해보였다.


"으어어어어어어?"


내가 잠에서 깬지 1분이 지나고 막 병사 하나가 내 두 손을 묶는 걸 마쳤을 때, 그제야 머리가 좀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 그래. 쟤네가 입고 있는 제복은 황제 폐하 직속 감찰반이고, 재들은 황제 폐하 직속 요인 처단부잖아? 뭐야 젠장. 


임의로 백작가 하나를 털어버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이들이 이 좁은 방에 들이차 있었다. 


"저.... 경?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에게 물었지만, 무뚝뚝한 얼굴의 그는 아무말도 없이 하던 일을 마저하고 있었다.


"마력 구속구를 가져와라."


구속구? 이것까지 끼운다고? 대역죄인 취급이잖아? 아니 근데 난 진짜 잘못한거 없는데? 


이상한 건 또 있었다. 우선 이들이 나를 끌고가는 방향은 죄인들을 수감하는 지하감옥 쪽이 아니었다. 오히려 황궁의 중앙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마주치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하나같이 쓰레기나 변태를 보는 표정이었다. 


계속해서 고민하며 끌려간 후 다다른 곳은 영광의 홀이었다. 


"폐하, 반역자 유가람을 명하신 대로 포박해왔나이다."


미치겠네. 내가 뭐했는데 반역자래? 어제도 황성 대마법 수호진 손보다가 야근했는데.


"들라."


영광의 홀의 육중한 물이 열리고, 난 그 앞에 꿇려졌다. 일단 인사는 해야지.


"대륙 8개 왕좌의 주인, 신앙의 수호자이자 진리의 가장 높은 별, 마탑의 첫번째 후원자이신 지고한 황제 폐하를 수습마법사 유가람이 뵙습니다. 사정이 이러하여 제대로 예를 올리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소서."


보통 이렇게 인사를 올리면 인사를 받아주시고 고개를 들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나는 20분을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그 와중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 슬쩍 보니, 고위귀족들이었다. 이내 발자국 소리가 잦아들고 황제 폐하가 말씀하셨다.


"경."


"예 폐하."


"경이 무슨 잘못을 하였는지 알고 있는가?"


"우매하여 알지 못하옵니다."


"경이 이곳에 왔을 때, 법 체계를 손봐줄 것을 부탁했네. 그리고 실제로 입법된 것이 많지. 아니 그러한가?"


"폐하의 말씀대로 이옵니다."


내가 오기 전 이곳의 법은 개판이었다. 지역 관습법, 영지법, 교회법, 제국 초기 법령이 뒤죽박죽 섞여있어 뭐가 언제 적용되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걸 내가 좀 손봤다. 1년도 채 안되긴 했지만 어쨌거나 대학에서 대충 배웠거든.


"그 중 짐이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는가?"


"조혼 금지법이었지."


".....예, 그러하옵니다."


"그런데 어찌 경은 경이 제출한 법안을 앞장서 어기고 있는가!"


예에에에? 조혼금지법? 내가 머리에 피도 안마른 여자애를 건들었다고? 난 로리가 아니야!


"폐하,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듯 하옵니다. 신은 한 번도 성인이 되지 않은 소녀를 건든 적이 없나이다."


"뭐라? 그렇다면 짐의 정보부가 거짓을 고한다는 것인가?"


황제 폐하는 내 앞에 보고서를 던져두었고, 나는 이내 분노에 치를 떨었다. 그 호위기사 새끼, 정보부였나? 아니 근데 이딴 개뻥을 써놓는다고? 목숨 살려주니까 날 죽이고 있네? 이 새끼는 내가 손수 족친다.


보고서에는 마법사 유가람이 공주를 유혹하여 결혼을 꾀한다고 쓰여 있었다. 확신하는데, 그 새끼는 모쏠이 틀림없다. 애가 그냥 한 말하고 진심하고 구분도 못하냐? 무, 물론 좀 진심도 약간 있는거 같았지만 어쨌든! 


"폐하, 크나큰 오해이옵니다. 저는 추호도 공주님과 결혼할 생각이 없나이다."


"뭐라? 우리 리라가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다는 뜻이더냐!"


아니 어쩌라는 겁니까 폐하. 문 밖에서 소란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무슨 일이냐!"


"폐하, 황녀 전하께서 들어가길 청하나이다!"


"뭐라? 막아라!"


그러나 우리 공주님은 마법도 매우 잘하셨기에, 이내 문이 뚫렸다.


콰앙!


페하는 야차같던 표정을 어디다 치워버리고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태세 전환 한 후 나를 가리며 물었다.


"허허, 우리 어여쁜 따님이 무슨 일일까?"


리라는 그런 폐하를 무시하고 나에게 와 무릎을 꿇고 물었다. 충격을 바가지로 드신 폐하는 잠시 재쳐두자.


"오빠 괜찮아? 세상에, 이거 손목 쓸린거 봐. 진짜 너무들 한다..."


어어 리라야, 너희 아버님 우실거 같은데?


"리라야!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더니 이 아비는 뵈도 않는거냐..."


"그 좋아하는 남자를 끌고 온 아버지가 할 말은 아니신거 같네요."


"꼭 이 아빠하고 결혼하겠다고 했으면서!"


"나 다섯 살때요? 이젠 아니게 됐네요. 오빠가 있으니까."



어 리라야, 그건 좀 마이너슨데..? 그 말을 하는 내내 리라는 황제 폐하 쪽을 한 번도 보지 않았고, 그럴수록 폐하는 '사춘기가 온 딸'을 보는 아버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계셨다.


"리라야, 세상에 남자는 많단다. 조금 더 생각해보는게 어떠니?"


"오빠가 아니면 싫어요!"


그때 내 기분은ㅡ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귀여운 여자애가 나 좋다는데 싫지는 않을거 아니야? 문제는 황제폐하가 대륙 모든 왕국과 맞다이를 떠서 이기던 시절의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리라야, 저기 공작 영식은 어떠니? 후작 영식은?"


"그 무식하고 느끼한 애들이요? 줘도 안가져요."


공작각하, 후작각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한건 없지만 어쨌든 죄송합니다... 시무룩한 두 분을 보고 있자니 절로 숙연해졌다. 황제 폐하는 이내 체념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리라야, 너의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일단 약혼하고 네가 성년이 될 때까지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결혼하거라."


"정말로요? 사랑해요 아빠!"


거 아무리 그래도 차이가 너무 심한거 아니니, 리라야.


"대신 조건이 있다."


음? 왜 이렇게 오한이 들지?


"유가람 경도 황실의 일원이 되었으니 '황족의 의무'를 해야할 터. 그것을 짐이 정하겠노라."


에이 씨, 설마.


"경은 훌륭한 마법사이니, 이 나라의 마법 발전에 기여토록 하라."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곳엔ㅡ


"어머, 우리 실험체 1호 아니야? 내가 얼마나 그리워했다고?"


약병을 들고 웃음 짓고 있는 싸이코 은색 도마뱀 새끼가 있었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