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인의 대답 뒤로 침묵이 지나가고 있다. 나는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가지 상념을 말로정리해서 내뱉을 재간이 없어서, A4용지를 뚫어져라 쳐다 보고 있을 뿐이었다. 지배인은 그런 나를 지그시 쳐다볼 뿐이었다. 결정을 재촉하는 것이 아닌, 올바른 판단을 바란다는 눈빛으로.

 사실 지금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곧바로 결정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대답은 하나 뿐이다. 나는 서류들을 그러모으면서 지배인에게 말했다.


 “하루만 더 생각해 볼게요.”


 “그래. 민재야, 그런데 이런 일은 왠만하면 빨리 결정하는 게 좋아. 그래야 너도 네가 따로 계획한 시간이 잡아 먹히지 않지.”


 나는 지배인의 진심어린 충고에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서, 별말 없이 목례로 작별을 고했다. 지배인도 말없이 손을 흔들어 줄 뿐이었다. 별달리 오고가는 말 없이 모텔의 하루는 그렇게 종료되었다. 



 그 날, 집에 돌아 오는 길에는 계속 밤하늘을 바라 보았다. 별을 보기 위해서 고개를 굳이 높이 쳐들 필요는 없었다. 약간만 고개를 돌려만 보아도, 서울 하늘에는 이미 엄청나게 많은 별들이 있다. 생각보다는 낮게 떠 있는, 형광등으로 만들어진 별들이. 


 내가 잡아야 할, 그 별들이.


 저 높은 하늘 위에 떠 있는 진짜 별들은 가로등 불빛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매캐한 매연의 공기는 보이지 않는 은하수 대신 어두운 조명과 길거리를 간간이 돌아다니는 차들의 엔진소리를 태우고 거리 위를 흐르고 있었다. 


 오늘 말한 면접으로, 나도 이 물결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 조금 더 빨리?


 어차피 떨어지면 돌아오지 못할 시간인데, 굳이 시간 낭비하지 않고 계속 시험을 준비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은 생각을 낳고, 무거워지는 머릿속에 계속 내 걸음은 느려지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나는 집에 돌아가는 그 때 까지는 결정을 내려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일에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느려지는 걸음은 결정을 유보하고 있었다. 모순적이게도.


 결국은 집 앞에 도달할 때 까지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였다. 나는 의미없는 몸짓으로 번호키를 눌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리돌은 생각보다 일찍 잠에 든 모양이다. 집 안에 불은 꺼져 있었고, 마치 아무도 없는 듯한 고요함이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요새 이렇게 조용한 적이 별로 없었지. 저 달나라 소녀는 지금 내 삶에 참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자친구도 아닌데 말이지. 동거인이라는 존재는 별달리 말이 통하지 않아도, 같이 산다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나 보다. 문득 리돌이 자는 방을 올려다 보고, 그대로 시선을 돌려 책상을 돌아보았다. 이 좁은 방에서 시선을 돌리는 것은 찰나에 불과하였다. 그 안에 집기가 무엇이 있는지 파악하는 것 역시. 


 아무런 의미 없는 동작. 하지만 내가 사는 이 곳을 돌아본 그 하나만으로, 오늘 나를 지탱하던 긴장감은 마음 속 어디엔가에서 툭 하고 끊어졌다. 거기에서 나는 왠지 더 생각을 질질 끌고 싶다는 생각을 버렸다. 일이 끝났을 때의 육체적 피로감, 그리고 퇴근 후 지금까지 했던 마음고생이 겹쳐 나는 그대로 옷도 벗지 않고 침대 위로 나자빠졌다. 내일 떠오르는대로 결정하기로 마음 먹으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 



 지배인이 주었던 계약 서류는 넌덜머리나게 돌아 보았지만, 아직도 못다 외운 영어단어들은 있다. 나는 이어폰에서 나오는 집중에 좋다는 단조로운 리듬의 음악들로, 리돌 보라고 켜 놓은 아이돌 영상의 음악에 정신이 팔리지 않게 애쓰면서 모르는 단어들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결정을 하고 그 다음 날, 지배인은 3주 뒤가 면접이라고 이야기했다. 생각보다는 빡빡한 스케줄에 살짝 당황했지만, 차라리 이게 나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조금이라도 빨리 끝나야 공무원시험 공부에도 방해가 되지 않을 테니까. 

 그 뒤로, N사에 대한 정보를 닥치는 대로 찾아 보았고, 보통 이런 기업들의 면접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를 끊임없이 검색해 보았다. 처음 며칠은 공무원 시험 공부와 병행해 보려 하였으나, 곧 포기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공부하는 방식이 하나에 몰두하면 다른 걸 신경쓰지 못하는 것도 있다. 근데 그것보다, 같은 영어공부라고 하더라도 공무원시험용 수험영어와 기업에서 쓰는 실무에 필요한 영어는 단어 자체가 다르다. 지금까지 외워왔던 것은 전혀 필요 없이 완전히 다른 어휘들을 익혀야 되는데, 이걸 병행해 보니까 둘 다 외워지지 않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하루를 공을 치고 나니, 처음으로 내 머리가 이렇게 나빴나 하는 자괴감도 들고 조금 더 집중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공무원 시험은 딱 3주간만 뒷전으로 미뤄두고 면접에 모든 것을 쏟아붓기로 하였다.


 오늘 민아 씨한테 별다른 변명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공무원 시험을 위해서 모든 열과 성을 다 쏟는 사람들 앞에서 ‘다른 공부 때문에 준비를 못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내가 욕을 먹고 마는 게 속 편하다.


 다행히도 리돌과 나비는 내가 공부하는 동안 별다른 방해를 하지 않았다. 이건 사실 리돌 혼자만 있을 때도 내가 책상에 앉아 있으면 딱히 나를 건드린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군이 아무 짓도 하지 않는데 가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어느새 시계바늘은 눈에 띄게 움직여 있었다. 세 시간 정도 지났나? 그 정도의 시간을 할애해서야 A4용지 한 장에 있는 단어들을 모두 외울 수 있었다. 물론 내일이 되면 남는 단어들만 머릿속에 남아 있겠지만. 확실히 아직 눈에 익지 않은 단어들이라 그런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나는 기지개를 펴고, 잠시 몸을 풀 겸 의자에서 허리를 돌려 스트레칭을 하면서 리돌과 나비 쪽을 돌아 보았다. 


 그 곳에는 침대 옆에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침대 옆에서 공중에 뜬 발판을 만들어 춤을 연습하고 있는 리돌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공중에 떠 있었기에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 내가 눈치를 채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리돌은 무언가 춤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난해하고, 그렇다고 연기라고 보기에는 두서가 없는 몸동작을 보여주고 있었다. 팔이 안으로 꺾였다, 밖으로 돌아갔다 하면서, 다리는 또 제각기 놀고 있다. 이런 일련의 동작들이 바닥에 발을 붙이지 않고 공중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니, 그저 허우적거림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꼭두각시 인형극 같이. ...일단은 저 애처로운 몸짓을 춤이라고 봐 줘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옆에 틀어 둔 TV를 보았을 때, 여성 아이돌 그룹이 추는 안무 중에 저 끝장나는 몸짓과 비슷한 동작이 얼핏 보이는 듯 하니까.


 지금 뭐여. 노래 공부하라고 음악 채널을 틀어 놨더니 정작 춤에 맛들린 거여? 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리돌을 주시하고 있음에도, 리돌은 진지한 표정으로 TV를 주시하며 동작을 따라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나비가 리돌을 쳐다보며 뭐라뭐라 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지금 내가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 뭐라고 말하는지 들리지 않는군. 이어폰을 빼자, 나비의 우렁찬 교습 내용이 귓속에 꽂혔다.


 “그게 아닙니다, 주군! 조금 더 손끝을 살린다고 생각하면서, 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십시오! 생각을 하는 것은 춤추는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최대의 실수라고 하였습니다! 조금 더 강하게 비틀어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춤을 가르치는 선생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분명히 리돌은 저 TV에 나오는 춤을 그대로 따라하고 싶을 것이다. 근데 나비 녀석은 지금 리돌에게 몸 가는대로 리듬을 타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야 배우는 보람도, 가르치는 보람도 없다. 죽도 밥도 안 되고 있으니까 그런데 나비 녀석에게는 그게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이 고양이놈은, 그냥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수염 아래로 근근이 새어 나오는 실소를 보면 알 수 있다.


 무아지경의 춤사위 중 리돌은 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리돌은 무척이나 힘들어 보이는 모양새로 나에게 굳이 설명을 하려 하였다. 춤을 멈추지 않은 채로. 헐떡이는 호흡은 무척이나 가빠 보였지만 여전히 번역기는 리돌의 말을 무척이나 평온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교정해 주었다.


 “노래에는 가사가 있어 학습이 어려워집니다. 노래는 얻기가 어려워서 춤 추는 법을 배웁니다.”


 도대체 여기에 어떤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할까. 뭐라고 한 마디라도 태클을 걸면, 나까지 휘말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 그래, 힘내라.” 라고 격려의 메세지를 남겨 주고서는, 다시 이어폰을 끼고서 광란의 현장과 나를 분리시키고 공부에 몰두했다. 저러다 지치면 알아서 그만두겠지.


 그리고 또 두 시간 가량이 흘러갔다. 못 외운 영어 단어들도 어느 정도 머리속에 정리 되었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 마음 먹고서는 돌아본 내 집의 한 가운데에는,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