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풍구에서 나오자 건물 안에는 수많은 컴퓨터들이 돌아가고 있었다. 어떤 컴퓨터는 프롬프트 창에 알 수 없는 문장들을 쏟아내었고 또 어떤 컴퓨터는 시뮬레이팅을 하는지 그래픽 화면에 더해 이상한 기호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굉장하긴 한데 내가 이걸 왜 해야 되는거냐 ㅅㅂ."
공돌이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수많은 컴퓨터들 사이에서 검열이 낑낑거리며 본체를 올라타 넘어갔다. 딱딱하고 반들반들해서 오르기 힘들어보였지만 다행히 쿨러 부근에 뚫린 작은 구멍들을 타고 등반할 수 있었다.

검열은 코더의 관리자 옵션에 쓰여있던 과학자를 찾아나섰다. 그 메시지에 따르면 코더에게 그것을 부여한 것은 그이고, 다행히도 아군이라고 했다.
그러나 검열이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여진 물체들을 쓱 훑어보았다. 먹다 만 음식들과 무언가가 쓰인 종이와 뚜껑이 열린 펜 등이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면 음식들은 썩었을 테지만 전혀 상하지 않은 것을 보아 분명 방금 어디론가 나갔을 것이었다. 그리고 뚜껑이 열린 펜의 존재도 이를 방증했다.
검열은 이 방에 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찾아나서기 위해 전기코드를 타고 책상 밑으로 내려왔다. 전류와 마찰 때문에 온몸이 찌릿찌릿했지만 중상은 아니었기에 버텨내었다.
책상에서 내려온 검열은 뒤늦게 찾아온 고통에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과학자를 찾으러 바닥을 돌아다녔다. 평소라면 10걸음도 안 돼서 갔을 거리였지만 몸이 작아진 상태라 치타같이 빠르게 달려도 일반인들의 눈에는 개미나 다름없을 것이었다.

그 때 바닥에 어마어마한 진동이 울렸다. 검열은 과학자가 왔음을 직감하고 그를 맞이하려했다. 다시 책상 위로 올라가려고 생각했지만 이내 이 몸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학자의 발이 나타났다. 슬리퍼를 신고 있었는데 얼마나 오래 썼는지 밑창이 다 닳아있었다. 그리고 그 슬리퍼의 발걸음이 바닥을 위협적으로 쓸었다. 검열의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과학자가 믹스커피를 타고 있던 티스푼을 바닥에 떨구었다. 챙하는 소리가 검열의 귀를 강타했다. 검열은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와 ㅅㅂ 깜짝이야!'
티스푼이 두 번 정도 바닥에 튀기더니 이내 검열이 있던 곳까지 날아올랐다. 검열은 정지상태가 된 몸을 즉각 해동시키고 생존본능에 몸을 맡겼다. 순간적인 변화에 놀라 일시적으로 폭력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검열의 이러한 감정표현이 거인에게 들릴 리가 만무했다.
거인이 티스푼을 찾아 나섰다. 거인이 허리를 굽히고 티스푼을 찾으러 책상 밑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한 발짜국 내밀자 그의 발이 말 그대로 검열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밟힐 뻔 했다는 것에 섬뜩해진 검열의 속마음에는 온갖 욕설과 함께 기도가 난무했다.
거인이 구석진 곳에 손을 넣었다. 그러나 너무 멀리에 있어서 닿지 않았다. 과학자는 손을 뻗어 구석구석 휘둘러보았다. 검열은 그럴 때마다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자동차가 전부 레이스카마냥 달리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었다.
검열이 그 손을 피해 겨우 밖으로 나왔다. 과학자도 소득이 없는 것을 보고 포기하기로 했는지 일어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 때 왼손에 든 컵이 점차점차 기울더니 이내 흔들리며 커피가 왈칵 쏟아졌다. 다행히 그 커피의 일부분만 맞아서 화상을 입지 않았지만 기분이 잡쳤다.
과학자가 커피가 쏟아진 걸 보고 닦으려고 그쪽을 보았다. 그제서야 그 거인은 무언가가 옆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여기요! 여기요!"
"우와, 이게 뭐야?"
검열이 구원자를 영접한 심정으로 과학자를 향해 크게 소리질렀다. 과학자는 그걸 보고 놀라면서도 검열을 살며시 집어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이 세상에 소인이 있었던가? 아, 그 작아지는 인간인가보다.'
"저기요! 고등학생한테 관리자 옵션을 부여해준 그 과학자 맞죠?"
개미만한 목소리로 들리는 그 소리에 과학자는 귀를 기울였다. 작은 남자는 거기서 뭐라뭐라 하고 있었다.
"저기요! 관리자 옵션 창에서 여기로 오래서 왔어요! 들리세요?"
온 신경을 모아 집중한 과학자가 마침내 그 말을 알아들었다. 메시지가 전달되었구나 하는 안도감과 다행  그리고 작아지는 인간을 실물로 본 것에 대한 호기심이 느껴졌다.
"오, 드디어 왔구나!"
"네! 이제 뭐하면 되죠?"
잘 들리도록 검열이 소리쳤다. 과학자가 조금 생각하다가 답했다.
"근데 내가 상태창 준 애들은 어디갔냐?"
"걔네들은 지금 다른 데 있어요. 여기로 올 사람을 뽑았고 그 중에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 제가 들어왔어요."
"뭐?"
과학자가 몸을 홱 틀어 또다른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시뮬레이터처럼 보였던 그 모니터는 사실 바깥상황을 보여주는 화면, 즉 현실세계의 게임화면이었다.
그곳을 보니 플라즈마 소드를 든 소년이 드래곤족의 소년과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 코더가 보였다.
"저기 있다!"
과학자가 코더를 찾은 후 다른 모니터를 조작해 침략 세력의 리더인 성녀 하이렌을 추적하였다. 과학자는 화면을 보고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성녀 하이렌 또한 사회 채널에 있었고, 그 옆으로는 다른 주요 인원들이 한데 모여있었다. 그리고 기관사복의 남자가 아무렇게나 쓰러진 채 에너지가 뽑히고 있었다.
과학자는 매우 다급해졌다. 만약 저 남자에 대한 의식이 다 끝나면 더 이상 어떤 수단으로도 막을 수 없는 헬게이트가 열릴 터였다.
과학자가 단숨에 커피를 마시고 급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무슨 장비를 챙기고는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근데 넌 커질 수 없니?"
운 좋게도 작아지는 장면은 보지 않은 과학자가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화면으로 모니터링할 때 3번씩이나 그 참혹한 순간을 절묘히 피해가는 것도 가히 재능이었다.
"커질 수는 있죠. 그런데 그 방법이 썩 좋지가 않아서요."
"그래? 그럼 그냥 가도록 하자. 여기 들어가볼래?"
과학자가 믹스커피 상자에서 봉지를 뒤엎고 보여주었다. 검열은 다른 마땅한 방법이 없었고 팬티보다야 나으니까 그냥 수긍했다.
"그러죠. 근데 그 상태창 못 쓰세요? 그걸로라면 저도 조작하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죠."
"아, 그거 코더한테 줬어. 2개나 만들기는 너무 빡세잖아. 그래서 다른 애들한테는 일부만 간 거고."
"그럼 아저씨, 아니, 과학자님은 안 쓰세요?"
"일종의 도박이었지. 그래도 시뮬레이팅 결과가 이게 확률이 가장 높았거든."
"그렇군요."
검열이 궁금했던 부분들을 해결하고 믹스커피 상자에 들어갔다. 생각보다 아늑해서 고양이가 된 느낌이었다.
"그럼 가볼까?"
과학자가 뚜껑을 닫고 밖으로 전속력으로 냅다 뛰어나갔다. 과학자는 까딱하다가는 세계가 곧 멸망한다는 사실에 다급해졌다. 그러나 그가 달리면서 생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차라리 이럴 바엔 팬티가 낫다... 우웩..'
검열이 벽에 급격히 쏠리며 헛구역질을 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과학자가 코너를 돌 때 다시 다른 벽으로 굴러다녀야 하는 충격을 감내해야만 했다. 급한 건 알겠지만 검열에게는 우주인들의 중력시험이나 다름없는 고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