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대학원생(=허생)은 원룸촌에 살고 있었다. 줄곧 남산(南山) 밑에 닿으면 원룸촌 안에 해묵은 현관문이 서 있고, 방이 그 현관문을 향하여 열려 있으며, 원룸 한 칸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한 채 서 있었다. 그러나 허생은 글 읽기만 좋아하였고, 그의 여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여 겨우 입에 풀칠하는 셈이다. 하루는 그 여동생이 몹시 주려서 훌쩍훌쩍 울며 하는 말이,
”당신은 한 평생에 석사 학위나 따오고 박사는 하늘의 별따기니 이럴진대 글은 읽어서 무엇하시려오.“
하였다. 허대학원생은,
”난 아직 글 읽기에 세련되지 못한가 보오.“
하고 껄껄대곤 했다. 여동생은,
”그러면 공장 생산직 노릇도 못하신단 말예요.“
하였다. 허대학원생은,
“공장의 일이란 애초부터 배우지 못했으니까 어떻게 할 수 있겠소.”
하니, 그녀는,
”그럼, 알바생 노릇이라도 하셔야지.“
한다. 허대학원생은,
“알바생 노릇인들 철면피(鐵面皮) 없고서야 어떻게 할 수 있겠소.”
하였다. 그제야 그녀는 곧,
“당신은 밤낮으로 글 읽었다는 것이 겨우 ‘어찌할 수 있겠소‘ 하는 것만 배웠소그려, 응? 그래 생산직 노릇도 하기 싫고, 알바생 노릇도 하기 싫다면, 도둑질이라도 해보는 게 어떠오? 늘 하는짓이 내돈 도둑질에 논문 도둑질이니, 익숙한 일이겠구려!”
하고는 몹시 흥분하는 어조로 대꾸했다. 이에 허대학원생은 할 수 없이 노트북을 덮어 치우고 일어서면서,
‘아아, 애석하구나. 내 애초 글을 읽을 제 사학(史學)박사를 따렸더니 이제 겨우 7년밖에 되지 않는군.’
하고는, 곧 울면서 동생의 발에 치여 문밖을 나섰으나, 한 사람도 아는 이가 없었다. 그는 곧장 네거리에 가서 만난 저자 사람변상승과 그의 패거리들에게 만나는 대로,
‘”여보시오“ 라고 허대학원생이 변씨를 보고서 길게 읍(揖)하였다. 다짜고짜 불려진 변씨가 그를보니, 허대학원생이 조금의 막힘도 없이 말하였다.
‘내 집이 가난해서 그대에게 만금(萬金)을 빌리러 왔소.’
했다. 변씨는,
”그러시오.“
하고는, 곧 만 원(萬元)을 내주었다. 그러나 그는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어디론지 가 버렸다. 변씨의 자제(子弟)와 빈객(賓客)들은 허생의 꼴을 본즉, 한 비렁뱅이였다.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나 술이 다 뽑혀 버렸고, 가죽 구두를 뀄으나 뒷굽이 자빠졌으며, 다 망그러진 케이티 위즈 야구 캡에다 시멘트색 바탕에 단추는 빠지고 검은 그을음이 흐르는 과잠(科蠶)을 걸쳐 입었는데, 비염이 난 코에서는 맑은 물이 훌쩍훌쩍 내리곤 한다. 그가 나가 버린 뒤에 모두들 크게 놀라며,
“아버지, 그 손님을 잘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변씨는,
”몰랐지.“
”‘그러시다면 어찌 잠깐 사이에 이 귀중한 만 원을 평소에 면식도 없는 자에게 헛되이 던져 주시면서 그의 성명도 묻지 않음은 무슨 까닭이십니까.“
했다. 변씨는,
“이건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대체로 남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엔 반드시 의지(意志)를 과장하여 신의(信義)를 나타내는 법이다. 그러고 얼굴빛은 감히 부끄럽고도 겸손하며, 말은 거듭함이 일쑤이니라. 그런데, 이 대학원생은 옷과 신이 비록 떨어졌으나 말이 간단하고 눈 가짐이 오만하고 얼굴엔 부끄런 빛이 없고 자신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물질(物質)을 기다리기 전에 벌써 스스로 물질(物質) 뿐만 아니라 이성(理性)과 염치(廉恥)또한 잃어버린 자임이 분명하다. 주지 않겠다면 눈에 심지를 켜고 우스꽝스럽게 달려드는 것을 달음박질로 피한후 수배하기 위하여 묻는다면 모를까, 기왕 깽값 만 원을 줄바에야 성명을 물어 무엇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