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봐야 5~6층 남짓한 층수의 낡은 아파트에는 애당초 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어디에서나 볼 법한 이웃과 스스럼없이 지내던 아이들, 옆집 젊은 부부, 4층 끝에 혼자 사는 80줄의 노인과

복도 창문에 기대 담배를 피우던 청년.. 많지 않으나 평생을 이곳에서 볼 것만 같은 친숙한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감염과 격리가 시작되자, 그들에게 있어 그 장소에 담긴 인연이나 추억은 별것 아니었는지 하나둘 떠나기 시작해 

허름하고 낡았지만 밝았던 아파트는 허름하고 낡은 데다 어두운 아파트가 되어 버렸다.



· · · 



어질러진 입구와 빛이 바래 잘 보이지조차 않는 아파트의 명패를 보자 머릿속에 희미한 광경이 떠오른다.

내 손을 붙잡고 겨우겨우 중요한 짐과 패물만을 쑤셔 넣은 커다란 가방을 멘 채 아파트를 나서던 어머니의 모습.

지금의 나와 몇 살 차이 나지도 않았던 어머니는 당시 어떤 심정이었을까.


멍하게 명패를 쳐다보며 사색에 잠겨있던 도중, 침묵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졌다.

기척 없이 현관에 서 있던 노인이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낡아 헤진 옷가지들과 정돈되지 않은 수염, 머리카락들로 남루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지만

그에 반해 허리가 곧추세워지고 어깨를 편 그의 자세에서 이상하리만치 건강한 느낌을 받았다.


"어.. 어.. 자네 그 저.."


"아, 예 접니다. 그.. 창문에 테이프 붙였던 아랫집이요."


"아이고..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나! 어미랑 같이 나간 줄로 알았건만 아직 이 도시에 있었는가?"


작은 한숨을 쉬고 나는 눈을 찌푸리며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후우.. 결국 나가지 못했거든요."


그는 이해한다는 눈초리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간이 꽤 흐른 데다 세상도 바뀌어 버렸으니 무슨 일이 있었어도 이상하지는 않지. 일단 내 집으로 올라가서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나 하겠는가?"


"예, 그러죠. 분명 404호, 4층 끝의 집이셨지요?"


"용케도 기억을 하고있군. 그 집이 맞어. 그런데 이젠 집을 1층으로 옮길까 생각하고있어서말이야..

이 나이가 되니 4층을 계단으로 오르내리기는 힘이 들고, 아파트엔 나밖에 없으니 상관없지 않겠나?"


"그렇군요. 확실히 이제 남아있는 사람은 할아버지 말고는 없어보이네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남아있는 사람이 몇 사람은 있었는데.. 모르는 사이에 다들 집에 물건도 그대로 두고는 없어져 버렸어.

갈 것이라면 인사라도 하고 가면 좋았을 것이네만.. 섭섭할 따름이지."


노인과 대화를 나누며 녹이 슨 철제 계단 난간에 팔을 올리고는 계단을 오르는 동시에 옛 기억을 떠올리며 현재와 대조해 본다.


벽에는 그 어렸던 날 아파트의 동갑내기들과 함께 펜으로 한 낙서가 있었다. 그때에는 분명 눈높이에 한 것 같았는데

지금 보았더니 그 낙서의 위치는 해봐야 내 허리께에 미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 시간이 지났으니. 어렸던 나의 눈높이는 달라졌으니. 


이 계단 난간은 어린 시절 당시에도 녹이 슨, 다 부러져 가던 낡은 것이었다. 지금은 그때보다도 더 상태가 안 좋아

군데군데 봉이 빠져있거나, 부러져 있거나, 쪼개져 있었다. 3층의 계단엔 아예 난간이 남아있지도 않았다.

손잡이에서 손을 떼니 비린 쇠 냄새가 코를 자극해 눈살을 찌푸렸다. 


불쾌한 냄새를 참으며 과거를 곱씹던 사이, 우리는 노인의 집 앞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현관문은 다 낡아 헤져있는 교회, 설비시공, 배달 음식 전문점 등의 전단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데다 문의 손잡이와 모서리 부분에는 대부분 쇠가 다 드러나 녹이 슬어있어 남루한 노인의 행색을 떠올리게 했다.


"들어오게나."


십수 년 전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그 집과 똑같은 구조에 기억을 되새기며 이리저리 훑어보던 나는 쇠냄새가 더욱 강해진 것을 느꼈다. 얼른 손을 재킷에 싹싹 문질러 냄새를 닦아내고 노인의 안내하는 테이블에 앉았다.


"이야.. 정말 어린 시절이라 별 감흥도 없고 기억도 잘 안 날 줄 알았는데, 막상 와보니 느낌이 또 다르네요."


"기억이라는 것은 머릿속 깊은 곳에 있는 것이라네. 평소에는 기억하려 해도 못해내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면 관련된 일들이 주르륵 떠오르게 되는 거지. 나도 세상이 이 지경이 되니 잊고 살았던 옛날 파병 갔던 시절이 떠오르더구나."


"할아버지께서도 파병 다녀온 적이 있으셨군요. 저희 친할아버지도 파병을 나갔었거든요. 어찌나 그 때 이야기를 많이 하던지.."


"허허.. 자네 조부도 이야깃거리야 많았겠다만, 내 일화에 비할 순 없을거다. 나는 그때 정말이지 괴상망측한 경험을 했거든..."


노인은 말을 멈추고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잠시 침묵했다.


"어떤 경험을 하셨길래?"


"그 날은 일진이 안 좋았어. 정찰 도중에 길을 잃고 울먹거리는 민간인 아이를 진정시키려고 다가갔는데 아이의 몸에서 폭탄이 터졌었지. 다치지는 않았지만 내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버렸고, 그 광경을 목격한 전우들은 뒤도 안돌아보고 다른 폭탄이 더 터질까 두려워 도망갔다네. 나 또한 피범벅이 되어 정신을 놓아버렸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밀림 깊숙한 곳의 개울에서 피를 씻고있었는데, 뒤에서 찰박 찰박 소리가 들리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벌떡 일어나 총을 쥐고 뒤로 돌았지. 어린 원주민 소년이 첨벙거리며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네. 현대 문물의 손길을 아예 받지 않은 듯 한, 나무줄기나 잎을 얽어 만든 모자와 목걸이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는 까무잡잡한 아이였지. 극도의 불안 상태였던 나는 총을 겨누고 그 어린 것을 노려보며 저리 꺼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는데, 그 아이가 고개를 살짝 돌려 눈이 마주치자, 신기하게도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내 불안은 눈 녹듯이 사라졌고, 그 물기 어린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 만으로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느낌을 받았다네. 아이는 나에게 이리 오라는 듯 자기 쪽으로 손을 흔들며 손짓했어. 나는 쥐고 있던 총조차 개울가에 버려둔 채 그 소년을 따라 발을 내디뎠는데, 한 걸음 내디뎠다 생각한 순간 이미 풍경은 바뀌어서 그 소년이 살고 있는 원주민 부락에 도착해· · · "


"흐음.. 재밌는 이야기네요."


나는 이 늙은이의 정신이 오락가락한 건 아닌지 의심하고 다른 생각을 하며 이야기를 대충 흘려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꽤 있었다. 내가 이 아파트에서 살던 당시에도 이 노인은 80줄의 오락가락하는 노인이었는데, 어째서 20년 쯤 지난 지금도 이렇게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인가?오히려 그 당시보다 더 젊고, 멀쩡해 보인다. 의문을 품은 내가 말을 꺼내려 했으나, 아직도 노인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 · · 랍게도 그 부락에 노인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어! 그들의 주술적인 무언가가 있었던 게지. 그들은 토착 신에게 부락의 일원을 바쳐 인신 공양을 하고 있었다네. 나 또한 산 제물이 될까 지레 겁먹었는데, 외부인은 그 의식의 제물이 될 수 없는 것 같더군.. 아 ! 마실 것도 없이 너무 긴 이야기를 했군. 별거 없지만 마실 거라도 가져올 테니 잠시 있게."


노인은 갑작스레 일어나더니 마실 것을 가지러 가버렸다. 이상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나, 지루한 노인의 심심풀이 상대가 되어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노인을 기다리며 잠시 눈을 돌려 집을 구경했는데, 문 하나가 바깥에서부터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문의 손잡이와 문은 깨끗한 것과 별개로, 문의 바로 아래에는 거무튀튀한 곰팡이 같은 자국이 크게 있었다. 이상하다곤 생각했지만, 이런 낡은 집이니 당연한 것 이겠지.


"여기 있네. 입에 맞으면 좋겠는데.. 내가 자주 마시는 건포도 차라네."


노인은 투명한 유리잔에 적갈색의 음료를 두 잔 가져왔다. 짙은 색의 액체는 완벽하게 불투명해 유리잔 너머로 그 속을 들여다보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별다른 이유도 없이 호의를 거절할 순 없었기에 잔에 입을 대려는 순간, 은은하게 집에 퍼져있던 쇠 냄새가 강해졌다. 께름칙한 기분을 느낀 나는  마시려던 차를 다시 테이블에 올려놓으려던 중, 노인과 눈이 맞았다. 노인은 이상하리만치 총기 있는 눈을 크게 뜨고, 기괴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정자세로 내 눈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마시지 않는 겐가?"


"아. 지금은 별로 목이 안 말라서요."


"그래도 한 입 정도는 마셔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나를 봐서라도 말이지."


"아니요. 정말 괜찮습니다. 사양할게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직시한 채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끈질기게 음료를 권하던 노인은 실망했다는 듯 한숨을 쉬더니 표정이 풀렸다.


"후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마시지 않아도 된다네."


"예.. 그런데 제가 지금 시급한 일이 생각나서요. 곧장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진 않았다. 100세에 가깝지만 이상하리만치 건강한 노인과, 기괴한 부락의 토착 신앙에 대한 이야기, 노인의 집에서 진동하던 쇠냄새와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진 문 아래의 자국..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기괴함을 넘어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나는 서둘러 노인에게 작별을 고하고 집을 빠져나와, 아파트를 떠났다.



· · · 



 몇 달이 지나, 근처 술집에서 내가 살았던 아파트의 일을 들었다.


유일하게 아파트를 지키던 건강했던 노인이 갑작스레 죽었다고.


나는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지만, 그것은 곧 맥주에 휩쓸려 사라졌다.


읽기만 하면서 살다가 난생 처음 게임 개발하다가 삘받아서 써봤는데 어떰?
내가 미스터리계나 판타지를 좀 좋아해서 마구 넣어봤는데 만족스럽기도 하고 뭔가 불만족스럽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