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병 담는 플라스틱 박스 한켠

라벨마저 낡아 바스러진

초록색 병 담긴 봉투더미에

난 말없이 꼬깃한 지폐 몇장 쥐어준다.


그 이는 술 냉장고로 발을 돌려

알코올에 물탄 것이 가득찬 무언가를

여느 때와 다름없이 봉투에 집어 담는다.

투명하고 순수한 어떤 환상에 취하려는 걸까.


어느 늦은 밤. 시름같은 어둠이

지글 거리는 전선위에

까마귀떼 마냥 걸터 앉았다.

삭아가는 주름살은

이 빌어먹을 달동네 모두에게

깊이 새겨져 가리라.


손가락 몇개 없는 중년 일당 아저씨.

조폭 똘마니를 꿈꾸며 우리 사장님에게

담배를 빌려달라 했던 어느 아는 형.

지능이 모자란 어린 딸을 데리고

술에 절어 사는 늙은 아버지 모두.


어느 누군가는

흔해 터진 절망속에

술병을 물어늘어지고

또 어느 누군가는

가망없는 희망을 바라며

착실히 돈을 모으리라.


하지만 종국엔

경제붕괴에 모든 게 무너져내려

지폐는 쓰레기가 되고

오로지 술병 만이 값어치 나가는

독일의 어떤 병신같은 시대를

여기 나는 뼈저리게 느끼겠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