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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인식하는 「발해(渤海国)의 귀속문제(한반도측논지)」


중국에서 인식하는 
Bo hai guo 뽀 하이 궈
발해(渤海国)

Gui shu zheng yi 꾸이 슈 쩡 이

归属争议(귀속논쟁)
본 내용은 중국 바이두 백과에서 발췌한 내용으로
되도록이면 있는그대로의 표현을 살려 번역하였음을 알립니다.
중문번역 이시민

 

归属争议(귀속논쟁)

 

渤海国是公元7—10世纪东北亚地区的一个重要政权,但几乎没能留下第一手史料,
발해국은 기원후 7-10세기 동북아시아 지역의 중요한 정권이나, 거의 역사적 사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后世考察渤海国所依赖的只有唐朝和日本的相关记载以及考古资料。
후세에 발해국을 고찰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당나라와 일본의 관련기록 및 고고학적 자료들을 뿐이다.

 

由于史料的匮乏,关于渤海国的很多问题都无法达成共识,
사료가 빈약하기에, 발해국에 관한 수많은 문제들 모두 공통의 인식을 맞출 방도가 없으며,

 

尤其是其历史地位与归属问题更是有关各国(尤其是中韩)争议的焦点。
더욱이 그 역사적 지위와 귀속문제는 훨씬 더 관련되는 각국간(특히 중한) 논쟁의 초첨이 된다.

 

 

朝鲜半岛(조선반도)

 

朝鲜自新罗以来,历代均未将渤海视为同族之国。
조선은 신라이래, 역대 발해를 동족의 나라라고 보지 않았다.

 

新罗文人崔致远在《谢不许北国居上表》中称渤海本为依附高句丽的“粟末小蕃”、“靺鞨之属”,
신라의 문인 최치원은 《사불허북국거상표》에서 발해는 본래 고구려에 의지하던 속말소번, 말갈의 족속인데,

 

但在《与唐江西高大夫湘状》、《与礼部裴尚书瓒状》及《上太师侍中状》中又说
《여당강서고대부상상》,《여례부배상서찬상》및《상태수시중상》에서 말하길

 

“惟彼句丽,今为渤海”、“昔之句丽,则是今之渤海”、“高句丽残孽类聚,北聚太白山,国号为渤海”,
"그들은 구려이나, 지금은 발해이다.", "예전의 구려는 즉슨 지금의 발해이다.", "고구려의 잔당들이 태백산에 북쪽에 모여,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라고 말하는데,

 

似乎一方面认为渤海是靺鞨人的国家,另一方面又认为渤海是高句丽的继承国。
마치 한편으론 발해는 말갈인의 국가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이라고 말하고 있다.

 

有学者认为新罗之所以故意将渤海置于高句丽名下,就是要提醒唐王朝,
학자들은 신라가 고의로 발해를 고구려 이름하에 두게 하여, 당나라에게 경각심을 주게 하려 했다고 보기도 하는데,

 

使其把对高句丽的余恨转嫁到渤海头上。
그것으로 하여금, 고구려에 대한 여한을 발해에게 전가시켰다.

 

在高丽史籍《三国史记》和《三国遗事》中,
고려사적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도,

 

也将渤海称为“渤海靺鞨”、“靺鞨”、“北狄”、“狄国”等,
발해를 발해말갈, 말갈, 북적, 적국 등으로 칭하며,

 

说明其不把渤海引为同类。
발해를 같은 부류로 끌어들고 있지 않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朝鲜王朝初年郑麟趾等所修《高丽史》也谓“渤海本粟末靺鞨也”。
조선왕조 초년 정인지 등이 감수한 고려사에서도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라고 이르고 있다.

与此同时,朝鲜人中也萌生了将渤海视为本国历史的观念。
이와 동시에, 조선인들중에서도 발해를 자국의 역사라고 보고 관점이 싹트게 되는데,

 

高丽太祖王建不仅优待渤海人,如收留渤海世子大光显并赐姓王、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인들을 우대했을 뿐만 아니라, 발해의 세자 대광현과 양성왕을 받아들였고,

 

嫁女于渤海人高模翰等,而且对后晋声称渤海是“我婚姻也”、“吾亲戚之国”。
발해인 고모한 등에게 여자를 시집보내며, 게다가 후진에게 "우리는 혼인관계다", "내 친척의 나라"라고 주장하였다.

 

最早将渤海列为朝鲜半岛历史的,
발해를 조선반도의 역사로 끼어넣게 된 가장 오래것이, 

 

是高丽王朝后期学者李承休所撰的《帝王韵纪》。
고려왕조 후기 학자 이승휴가 편찬한 《제왕운기》였다.

 

而提出“南北国”这一说法的,则是朝鲜王朝后期文人柳得恭,
남북국이라는 표현을 제기한 것은, 즉 조선왕조 후기의 문인 양덕공이며,

 

他在1784年所撰的《渤海考》一书中强烈呼吁为渤海正名,
그는 1784년에 편찬한 《발해고》에서 강력히 발해의 정명(*바로잡이)을 호소하는데,

 

 

其序文一段写道:
그 서문에 이렇게 쓰여져 있는데 ;
(*흠.. 이 아래부터는 현대중국어와 다른 한문 인용문이라 정확히 번역하기 뭐하네요. 그동안 중국어를 번역해온 감각에서 한문을 번역해봅니다.)

 

“高丽不修渤海史,知高丽之不振也。
고려는 발해사를 감수하지 않았는데, 고려의 부진(부족함)을 알아야한다.

 

昔者高氏居于北,曰高句丽;
옛사람들은 고씨가 북쪽에 있으니, 고구려라 했고,

 

扶余居于西,曰百济;
부여가 서쪽에 있으니, 백제라 하였고,

 

朴、昔、金氏居于东南,曰新罗,
박, 석, 금씨가 남동쪽에 있으니, 신라라 하였다.

 

是为三国,宜其有三国史,而高丽修之,
이것이 삼국이니, 마땅히 그것은 삼국사이다. 라고 고려는 그렇게 감수하였는데,

 

是矣;及扶余氏亡、高氏亡,金氏有其南,大氏有其北,曰渤海,
부여씨, 고씨가 멸망에 이르고나서, 김씨가 그 남쪽에 있었고, 대씨가 북쪽에 있었는데, 이를 발해라 하였다.

 

是谓南北国,宜其有南北国史,而高丽不修之,非矣。
이를 남북국이라 하여, 마땅히 남북국사로 봐야하는데, 고려는 그렇게 감수하지 않았다. 이건 아니다!

 

夫大氏者何人也?乃高句丽之人也。其所有之地何地也?乃高句丽之地也。”
대씨의 아버지는 누구요? 바로 고구려의 사람들이다. 그 모든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의 땅이지."

 


到了20世纪初,民族主义史学家申采浩又重提渤海归属问题,
20세기초에 이르자,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는 발해귀속문제를 거듭 제기하는데,

 

他批判金富轼以事大主义为指导思想写《三国史记》而忽视了北方的渤海,
그는 김부식이 사대주의 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삼국사기》를 써서 북방의 발해를 소홀히 하였다는 점을 비판하고, 

 

他甚至还在提及渤海高王大祚荣和宣王大仁秀时抬高称为“高帝”和“宣帝”。
그는 심지어 발해고왕 대조영과 선왕 대인수때를 높이 치켜세워, "고제"와 "선제"라고 칭하였다.

 

尽管有这些呼声,但将渤海史视为朝鲜半岛历史在20世纪60年代以前尚未成为主流,
비록 이러한 주장하고 불구하고, 20세기 60년대 이전까지 발해사를 조선반도의 역사로 보자는 내용이 주류가 되지 못하였고, 

 

“统一新罗”仍是普遍看法,
통일신라가 여전히 보편적인 관점이었다.

 

然而20世纪60年代以后,随着韩国民族主义史学逐渐取代实证主义史学,
그렇지만 20세기 60년대 이후, 한국의 민족주의사학이 점차 실증주의 사학의 자리 빼앗기게 됨에 따라,

 

渤海国开始被认为是韩国历史,代表人物为李龙范和李佑成;
발해국은 한국역사로 인식되지 시작하였고, 대표적인 인물이 이용범과 이우성이 된다 ;

 

与此同时,朝鲜也开始重新审视渤海历史,
이와 동시에, 조선(*북한)도 발해역사를 거듭 중요시하게 되어,

 

最早对新罗统一提出质疑的是朝鲜前领导人金正日,
신라통일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것으로 가장 오래된 건 조선의 前영도자 김정일이었으며, 

 

他在1960年发表的《对三国统一问题的再检讨》一文中强调新罗没有统一三国,
그는 1960년에 발표한 《삼국통일문제에 대한 재검토》의 문서에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지 않았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因为北方还有高句丽继承国渤海存在。
이유는 북방에는 아직도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此后以朴时亨、张国钟为代表的朝鲜学者也掀起了渤海史的研究。
이후 박시형, 장국종이 대표가 된 조선(*북한)학자들도 발해사 연구를 불러일으켰다.

 

如此一来,渤海国也就被朝鲜和韩国归为本国历史了。
이와 같이, 발해국도 조선(*북한)과 한국에 의해 자국역사로 귀속되었다.

 

现代朝鲜和韩国的基本观点是渤海国属于朝鲜半岛历史,
현대 조선(*북한)과 한국의 기본적인 관점은, 발해국은 조선반도의 역사에 속해있으며,

 

渤海是高句丽的继承国,大祚荣为高句丽遗民,渤海的主体民族也是高句丽人。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이자, 대조영은 고구려의 유민이며, 발해의 주체민족도 고구려이다. 라는 점이다.

 

其中韩国将渤海与新罗视为相互对峙的“南北国时代”,
그중에 한국은 발해와 신라를 상호대치의 "남북국시대"로 보고 있으며,

 

而朝鲜更是将渤海视为民族正统,将新罗排除在外。
조선(*북한)은 더욱이 발해를 민족의 정통으로 보고 있으며, 신라를 배제하고 있다.

 

他们将中国史籍记载渤海为
그들은 중국사서에서 발해를 기록한 것중,

 

“高丽别种”、“本高丽种”及日本史籍中称渤海为“高丽国”
 "고려별종", "본고려종", 및 일본사료중 발해를 "고려국"이라고 칭하며,

 

作为大祚荣是高句丽人、渤海是高句丽继承国的依据,
대조영을 고구려인으로 만들어,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근거를 가지고

 

并通过考古资料得出渤海文化延续高句丽文化的结论。
아울러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발해문화는 고구려문화와 이어진다는 결론을 내게 된다.

 

朝鲜学者朴时亨认为渤海王室大氏与高句丽王室高氏是同一血统,
조선학자 박시형은 발해왕실의 대씨와 고구려왕실의 고씨는 같은 혈통이며,

 

张国钟认为渤海人70%—80%都是高句丽人,靺鞨和其他种族不过20%—30%,
장국종은 발해인의 7,80프로가 고구려인이며, 말갈과 기타 종족이 불과 2,30프로라고 주장하였고,

 

宣称史书中称渤海为靺鞨或粟末靺鞨是为否定渤海为高句丽继承国而故意捏造的。
사서에서 말한 발해를 말갈 혹은 속말말갈이라 칭한 것은 발해를 부정하고, 고구려의 계승국이란 걸 부정하기 위해 고의로 날조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韩国虽然在这方面与朝鲜没有太大区别,
한국은 비록 이 부분에서 조선(*북한)과는 큰 차이는 없지만,

 

但并非铁板一块,如韩国的渤海史专家宋基豪便承认大祚荣为粟末靺鞨人,但又说是高句丽化的靺鞨人,
그렇다고 철판(*북한)처럼 완고하지는 않아서, 한국의 발해사 전문가 송기호와 같이, 대조영이 속말말갈인 내지 일설의 고구려화된 말갈인이라고 인정은 하였는데,

 

归根结底仍强调其高句丽的属性,
결국 여전히 고구려의 속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并认为渤海国上层统治者为高句丽人,
아울러 발해국 상층통치자들은 고구려인이며,

 

而下层则是靺鞨人居多;
하층민은 말갈인들이 다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也有韩国学者指出新罗和渤海之间没有同族意识与统一意识,
이에 한국의 학자들은 신라와 발해 사이에는 동족의식 및 통일의식이 없었다고 지적하기에,

 

因而很难称得上是“南北国”。 
때문에 명칭상 "남북국"이라 칭하기 어렵다.

 

除了渤海国的归属问题以外,朝鲜和韩国学者一般都倾向于渤海是独立国家,
발해국의 귀속문제를 제외하고, 조선과 한국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발해는 독립국가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朝鲜学者称渤海为“天子国”或“皇帝国”,否认渤海为唐朝属国,缩小或回避唐朝册封渤海的作用;
조선학자들은 발해를 천자국 혹은 황제국이라고 칭하고, 발해가 당나라의 귀속국이란 걸 부정하고 있으며, 당나라가 발해를 책봉한 것에 대해서 축소하고 회피하고 있다. 

 

韩国学者则认为渤海具有对唐藩属国和对内皇帝国的双重属性(即所谓“外王内帝”),
한국학자들은 발해는 당나라의 번속국이자 내황제국(외왕내제)의 복합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还有韩国人干脆以“渤海帝国”称之。
한국인들은 깔끔하게 "발해제국"이라 칭하고 있다.

 

而他们认为中国将渤海视为隶属于唐朝的地方政权的观点是对渤海和新罗采取双重标准,
그들은 중국이 발해를 당나라에 예속된 지방정권이라고 보는 관점에 대해, 발해와 신라를 똑같은 관점에 두어, 

 

批判中国“歪曲”渤海史。
중국이 발해사를 왜곡하고 있다며 비판하고 있다.

 

由此可见,中国与朝鲜半岛在渤海国历史问题上的分歧相当大。
이를 말미암아 볼 수 있는 건, 중국과 조선반도는 발해국 역사문제의 분기(차이)점이 상당하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