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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인식하는 「고구려(高句丽)」

 

중국에서 인식하는

Gao gou li 까오 꺼우 리

고구려(高句丽)

본 내용은 중국 바이두 백과에서 발췌한 내용으로
되도록이면 있는그대로의 표현을 살려 번역하였음을 알립니다.
중문번역 이시민

 

高句丽 (古国名)
고구려 (고대국가명)

 

高句(gōu)丽(lí)是公元前一世纪至公元七世纪在中国东北地区和朝鲜半岛存在的一个政权。
고구려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에 중국 동북지역과 조선반도에 존재했던 정권이다.

 

其人民主要是濊貊和扶余人,后又吸收一部分靺鞨人,古朝鲜遗民及三韩人。
그 주요 인민들은 예맥과 부여인이며, 후에 일부 말갈인, 고조선유민 및 삼한인이 흡수되었다.

 

由于高句丽的特殊地理位置,而且国土横跨今日的中国及韩国、朝鲜,中国及韩国、朝鲜都声称高句丽是自己本国的原始民族。
고구려의 특수한 지리적 위치와 더불어 국토가 지금의 중국 및 한국, 조선(*북한)에 걸쳐있기 때문에, 중국과 한국, 조선(*북한) 모두 고구려는 자신들 자국의 원시민족이라 보고 있다.  

 

高句丽极盛时疆域,东部濒临日本海;南部控制了汉江流域;西北跨过辽水;北部到辉发河、第二松花江流域。 
고구려 전성기의 강역은 동쪽으론 일본해에 점해있으며, 남쪽으론 한강유역을 장악하고, 서북쪽으론 요수를 넘었으며, 북쪽으론 휘발하 및 송화강유역에 이른다.

 


中文名称(중문명칭) 高句丽(고구려) 
简    称(약    칭) 句丽、句骊、高丽,5世纪后简称高丽(구려, 구려, 고려, 5세기후 고려가 약칭)
首    都(수    도) 纥升骨城→丸都山城/国内城→平壤城(흘승골성→환도산성/국내성→평양성)
官方语言(표준언어) 高句丽语(고구려어)
政治体制(정치체제) 君主制(군주제)
国家领袖(지도자) 朱蒙、大武神王、好太王、高藏(주몽, 대무신왕, 호태왕, 고장)
主要民族(주요민족) 高句丽人(고구려인) 
主要宗教(주요종교) 萨满教、佛教、道教(샤머니즘, 불교, 도교)

 


国号(국호)

 

高句丽,史书中记作“高句骊”,简称“句丽”或“句骊”,
고구려는 사서에서 고구려(高句驪)로 기록되었으며, 약칭으론 구려(句麗) 혹은 구려(句驪)였다. 

 

是公元前1世纪至7世纪时期生活在中国东北地区的一个古代民族。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7세기까지 중국 동북지역에서 생활했던 고대민족이다.

 

汉元帝建昭二年(公元前37年)扶余人朱蒙在西汉玄菟郡高句丽县(今辽宁省新宾县境内)建国,故称高句丽。
한나라 원제 건소 2년(기원전 37년) 부여인 주몽이 서한 현토군 고구려현(지금의 요령성 신빈현 영내)에 나라를 세웠고, 고구려라 칭하였다.

 

公元5世纪后,高句丽被普遍简称为“高丽”,其君主也被中国皇帝册封为“高丽王”。
기원후 5세기후, 고구려는 보편적으로 고려라고 불리게 되는데, 그 군주도 중국 황제의 "고려왕"으로 책봉된다.

 

但需要注意的是,高句丽灭亡200多年后朝鲜半岛出现的王氏高丽并非其继承国。
하지만 주의해야할 점은 고구려멸망 200여년후 조선반도에서 출현한 왕씨 고려는 결코 그 계승국이 아니다.

 

 


民族(민족)

 

朝韩观点:
조한(남북한)관점:

 

高句丽为扶余人所建。
고구려는 부여인이 세웠다. 

 

而扶余人是朝鲜人的主要来源之一。
부여인은 조선인의 주요 기원중 하나이다.

 

高句丽(卒本扶余)和百济(南扶余)都是扶余国的延续。
고구려(졸본부여)와 백제(남부여) 모두 부여국의 연속이다.

 

高句丽被灭之后,其主要居民成为新罗和渤海国居民。
고구려가 멸망된 후, 그 주요 거주민은 신라와 발해국의 거주민이 된다.

 

而渤海国在被契丹灭之后,其居民大多迁移到王氏高丽。
발해국이 거란에 의해 멸망당한 후, 거주민의 대부분은 왕씨 고려로 이동한다.

 

(注:战争中军队与平民是不同的。新罗灭高句丽后,高句丽在朝鲜半岛的平民大多是留在朝鲜半岛的。)
(주 : 전쟁중 군대와 평민은 똑같지않다. 신라가 고구려를 멸한 후, 조선반도에 있던 고구려 평민들 대다수가 조선반도에 남았던 것이다.)

 

在王氏高丽建立以前,新罗贵族弓裔曾要复兴高句丽并建立后高句丽。
왕씨 고려의 건립이전에, 신라귀족 궁예는 일찍이 고구려를 부흥시키고자 후고구려를 세웠다.

 

可见新罗人和王氏高丽人都认为 他们与高句丽属同一民族的不同分支,
신라인과 왕씨고려인은 모두 그들이 고구려와 동일민족에 속한 분파라고 인식하고 있어,

 

并都用高丽命名自己的王朝。
아울러 고려를 자기 왕조의 이름을 사용한 걸 볼 수 있다.

 

 

中国观点:
중국의 관점:

 

扶余人构成了高句丽及百济的王室。
부여인들은 고구려 및 백제의 왕실을 구성하였다.

 

而高句丽下层则包括了当时位于中国东北地区的多个不同部族实体。
고구려의 하층민은 당시 중국 동북지역에 위치한 다수의 다른 부족민들을 포함하였다.

 

与韩半岛南部的三韩部落差异很大。
한반도 남부의 삼한부락과는 차이가 매우 크다.

 

至于,渤海国居民“大多”被迁移到王氏高丽的断言则并非历史事实。
이에 따라, 발해국의 거주민 "대다수"가 왕씨고려로 이동하게 되었다라고 단언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渤海国民留在当地及掠入契丹并融入中国的人口数远大于逃入王氏高丽的人口。
발해국민은 현지에 머물렸으며, 거란의 난입과 아울러 중국에 융화된 인구수가, 왕씨고려로 도망친 인구보다 훨씬 더 많다.

 

中国学者已写有多篇论文论述这一问题。
중국학자들은 이미 다수의 논문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이 문제를 논술하고 있다. 

 

在过去的很长时期里,由于中国学术界对高句丽的历史缺乏全面系统的研究,
과거의 기나긴 시간 속에서, 중국학술계는 고구려에 대한 역사는 전면적인 계통의 연구가 부족하여,

 

而将高句丽与三韩人王建公元918年建立的高丽王朝混淆,
고구려와, 삼한인 왕건의 고려왕조(918년건립)를 혼동하였는데,

 

也正因此,使高句丽被不少中国学者误认为是韩国古代国家。
이로인해, 고구려를 적지않은 중국학자들이 한국의 고대국가로 오해하게 되었다.

 

八十年代以来,随着中国学者对高句丽历史研究的深入,
80년대 이후, 중국학자들은 고구려에 대한 역사연구를 심화함에 따라,

 

中国史学界意识到了这一严重历史判断错误。
중국사학계는 이 중요한 역사적 판단 착오를 인식하게 된다.

 

为纠正这一错误,现在中国史学界已出版了大量有关高句丽的历史专著。
이 차공를 규정하기 위해, 현재 중국 사학계는 대량으로 고구려관련의 역사전서를 출판하고 있다.

 

如刘子敏先生的《高句丽历史研究》、耿铁华先生的《中国高句丽史》、马大正先生的《古代中国高句丽历史丛论》、《中国高句丽历史续论》、杨军先生的《高句丽民族与国家的形成和演变》等等。
리우즈민 선생의 《고구려 역사연구》, 겅티에화 선생의《중국의 고구려사》, 마다이정 선생의《고대 중국의 고구려 역사총론》, 《중국의 고구려 역사속론》, 양쥔 선생의 《고구려 민족과 국가의 형성과 변천》 등등과 같이,

 

在中国史学界,
중국사학계에서, 

 

“高句丽是中国东北古代民族建立的王国,与位于现在韩半岛上的王氏高丽(建立于公元918年)是两个除了名称,在主体民族等各方面都有着重大区别的国家”
"고구려는 중국 동북 고대 민족이 건립한 왕국이며, 현재 한반도상에 위치한 왕씨 고려(918년 건립)는 둘다 명칭을 제외하고, 주체민족 등 여러방면에서 중대한 차이점을 가진 국가이다."

 

的历史观点已成为共识。
라는 역사적 관점이 공통의 인식으로 자리잡았다.

 

但是,韩国的学者对此持有异议。
하지만, 한국의 학자들은 이에 대해 반대를 주장한다.

 

韩国历史学者多认为高句丽只属于本国历史与中国无关,
한국의 역사학자의 다수가 고구려는 자국역사에 속해있으며, 중국과는 무관하고,

 

他们认为高句丽人创立了属于自己的独特文明,
그들은 고구려인이 자신들이 속한 독창적인 문명을 창립하였으며,

 

曾建立了与古代中国平起平坐的大帝国。
일찍이 고대 중국과는 동등한 지위의 대제국을 건설했다고 주장한다.

 

其代表著作有徐炳国所著的《高句丽帝国史》与申滢植所著的《高句丽史》。
그 대표적인 서적이 서병국이 저술한 《고구려제국사》와 신형식이 저술한 《고구려사》이다.

 

由于韩国学者在解读完全由汉语写成的古代史料时具有一定的困难。
한국의 학자들은 완전히 한어로 된 고대사료를 해독할때, 일정한(필연적인)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因此,中韩在高句丽历史研究上的交流也有着一定的难度。
이로 인해, 중국과 한국은 고구려 역사 연구의 교류 또한 일정한(필연적인) 어려움이 처해있다.

 

朝韩历史学者的主要问题是对史料存在着为我所用而任意曲解的倾向。
조한(남북한)역사학자의 주요문제는 사료에 대해 자신들의 도구로 삼아 임의로 곡해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对于古代史书中能彰显高句丽“独立性”的历史素材就大加凸显,
고대역사서에서 고구려의 독립성이란 역사적 소재를 크게 부각한다는 점이 잘 나타나지만, 

 

而对于能说明高句丽与中原在政治、文化、经济上的联系的史料就刻意忽视。
고구려와 중원이 정치, 문화, 경제적인 관계를 설명하는 사료에 대해서는 매우 소홀히 여긴다.

 

应该指出,在韩半岛历史学者中,这一现象不是孤立的,而是普遍的。
마땅히 시사하는 점은, 한반도의 역사학자중에서, 이러한 현상이 고립적이 않고,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而中国学者在高句丽历史研究中所存在的主要问题则是“象牙塔主义”。
중국학자들은 고구려역사 연구에서 존재하는 주요 문제가 바로 "상아탑주의"라는 것이다.


从而使很多不合理的有关高句丽的历史认识没有在更大范围内得到应有的澄清,
따라서 수많은 불합리성을 가진 고구려 관련의 역사인식은 큰 범위내에서 응당한 해답을 얻을 수 없기에,

 

造成普通民众的历史认识错误。
보통의 민중의 역사인식의 착오를 조성한다.

 

中韩对高句丽历史认识的分歧是客观存在的。
중국과 한국이 고구려 역사에 대해 인식하는 분기점은 객관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考察高句丽的历史就必须了解韩半岛国家与民族的形成时间。
고구려의 역사를 고찰하는 것에는 한반도국가와 민족의 형성기간을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

 

中国的学者们多认为韩半岛最早的国家是形成于公元前11世纪的箕氏朝鲜,
중국의 학자들 다수가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국가는 기원전 11세기의 기자조선으라 인식하고 있다.

 

而韩、朝学者多认为韩半岛最早的是形成于公元前31世纪~公元前24世纪的檀君朝鲜,
한국, 북한의 학자들 다수는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국가는 기원전 31세기에서 기원전 24세기의 단군조선으로 인식하고 있다.

 

而朝鲜学者依据“檀君陵”出土的人骨,将此时间上推至公元前3018年)。
조선학자들은 단군릉에서 출토된 인골에 의거하여, 이때를 기원전 3018년전으로 추정하였다.

 

实际上,由于将神话中的“檀君”作为信史的历史研究方法本身所具有的虚妄性,朝、韩历史学家的主张是难以成立的。
실제로, 신화상의 단군을 진실된 역사라고 하는 역사연구 방법 그 자체가 나타내는 허망성은, 남북 역사학자의 주장들이 성립되기 힘든 것으로 만들고 있다.

 

具体原因我们将在对“檀君”这一词条的解释中予以阐述。
구체적인 원인은 우리들의 단군에 대한 해석에서 명백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中国的大部分学者都认为箕氏朝鲜与卫氏朝鲜是韩半岛上最初形成的国家,
중국의 대부분 학자들은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한반도에서 최초로 형성된 국가라는 것이며,

 

而这两个古国是属于中华古代封国的性质。
이 두 고대국가는 중국 고대봉국 성질에 속한다는 점이다.

 

也有中国学者在最近出版的《东亚史》一书中认为,
또한 중국학자들이 최근에 출판한 《동아시아사》에서 인식하는 것은

 

在高句丽、百济、新罗之前曾存在于韩半岛上的箕氏朝鲜、卫氏朝鲜、辰国,都不是真正意义上的国家,而更接近于邑落联盟体系。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이전에 일찍이 한반도에 존재했던 기자조선, 위만조선, 진국들은 진정한 의미의 국가가 아니며, 읍락연맹체계에 가깝다는 것이다.

 

半岛上的百济与新罗以及其邻近的高句丽才是在这一地区最初形成的国家(均为在公元2、3世纪前后)。
한반도상의 백제와 신라 및 그 부근의 고구려는 이 지역에서 최초로 형성된 국가이다(한결같이 기원전 2,3세기전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