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시험을 망친 날에도


대학에 떨어진 날에도


면접도 못 보고 탈락 문자만 받다가


결국 여기에 처음 발 들인 날에도


기분 나쁜 날마다 네 앞에 앉아


콩나물을 수놓은 다섯 가닥 실을 뽑아내곤 했어



겨우 택시비 받을 걸


열두 시 반까지 종이 상자를 포장하며


주일에 쌓아온 모든 회포를


일요일 아침 303호 아줌마와 305호 아저씨에게


망치와 현의 노래 들려주며 대신 풀고는 했어



그런대 왜


지금도 기분이 나쁜데


여든여덟 개의 하얗고 까만 이를 드러내고 비웃는


너를 연주할 수 없는 걸까



아니야, 그렇지 않아


스스로에게 말했어


그리고, 루바토를 곁들인 클레어 드 룬의 멜로디를


B 로크리안 서스 포 애드 나인 반주와 아울러


휘몰아쳤어



한 방울, 두 방울


건반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내려다보는


너를 향하던 시야에 커튼처럼 드리우던 머리카락은


다듬기 어려움을 이유로 짧게 잘려 사라졌고


워낙에 시간이 없어도


이따금 기분이나 내려고


볼이나 입술을 빨갛게 칠하던 것도


영영 못하게 되었네



17.6이라 내게 남은 손가락 하나씩에


할당된 건반의 수...


로는 너무 큰 수


불가능을 의미하는


어쩌면 내가 감당하던 마음의 상처의 인분수


내가 다달히 받던 돈을 10만원으로 나눈 값이자


어쩌면 아주 조금 작은 수



나흘 내리 쪽잠 잔 게 전부라


유난히 졸리던 어느 날


상자 대신 내 왼손을 포장하고서는


산재 보상금을 받아낼 수 있었을 확률의 추정값



고물상이 몰고 도착한


소형 트럭의 무게를 100킬로그램으로 나눈 값...



잘 가렴.


다시 시작하기 위해


추억은 정리해야겠지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네



앞으로 기분 나쁜 날마다


난 무엇을 하고 견디어야 하나


견디지 말고




끝내야 할까?







*루바토- 곡에 서정성을 더하기 위해 템포를 의도적으로 변형하는 것.


*클레어 드 룬-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제 3곡. 우리나라에는 '달빛'으로 잘 알려져 있다.


*B 로크리안 서스 포 애드 나인- 대강 주먹으로 건반을 눌렀을 때 얻을 수 있을 법한 불협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