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빈 마마, 전하께서 연회에 나와 흥을 돋우라고 말씀하셨나이다."


  언젠가 당신은 내게 말했었다. '너는 나에게만 춤을 추는 나비가 되어라. 나는 너의 날개 짓에 흩날리는 꽃잎이 되겠다.'

그 말 그대로 나는 당신에게만 춤을 추겠노라 다짐했다. 그래, 그 빌어먹을 맹세에 나의 일생을 걸었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마마."


  공손한 척 조아리는 시녀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필시 화가 났으리라.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길거리에서 춤이나 추며 웃음을 팔던 내가 이 자리에 앉아있으니 분명 단단히 골이 났을 것이다. 


"그래, 잠시 채비할 시간을 주지 않으련?"


  순간 머리가 시큰거리며 어지러웠다. 궁궐의 삶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호화롭고 사치스러웠다. 이곳은 붉은 오동나무로 기둥을 세웠고 한쪽 벽에는 금실로 수놓은 봉황이 당장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아녀자 혼자 쓰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방이었지만 당신은 기어코 나를 여기에 밀어 넣었다. 귓가에 속삭이는 당신의 사랑 노래에 홀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비가 장대같이 쏟아지던 그날, 군사들을 피해 내달리던 그 산길에서 발목을 삐었을 때에도 나는 슬퍼하지 않았다. 떨고 있던 나의 몸에 당신의 온기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당신의 새장에 갇혀서 산 채로 썩어간다.


"마마, 허리 끈을 묶으시는 것이 보기에 좋사옵니다."

"아니, 그냥 내버려두렴. 춤 실력이 떨어졌으니 이런 요행이라도 해야지."


  내게 오던 시녀의 손이 허공을 어지럽힌다. 아무리 내키지 않는 윗전이라고 하여도 궁중의 법도는 지엄한지라 차마 몸에 손을 대지는 못한 모양이다.  한걸음, 한걸음 물먹은 솜처럼 늘어진 몸뚱이를 억지로 움직였다. 어디서 불어온 바람에 바깥 정원의 나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비웃는다. '어리석은 무희야, 사내의 연정을 믿은 결과가 이것이냐?' 마음껏 웃으렴, 나에게 궁은 처음부터 지옥이었으니 이쯤이야 쉬이 견뎌낼 수 있단다. 


"마마, 아직은 밤 공기가 선선한지라 고뿔이라도 걸리실까 염려되옵니다. 외투라도 걸치소서."


  뒤에서 따라오던 시녀가 거추장스러운 외투를 덮어 씌웠다. 떼어낼 힘도 없어서 모른 척하며 계속 걷는다. 연회장이 이리도 멀었던가? 뿌연 안개가 낀 머릿 속을 억지로 헤집어 본다. 필시 이 정원을 가로지르면 나를 위해 대리석으로 깎아 올린 새하얀 연회장이 나올터였다. 한때는 한걸음에 내달리면 눈 앞에 나타나던 그곳이 내게 유일한 안식처였다. 당신은 나를 위해 연회장 울타리에 장미꽃을 무수히 심어 놓았다. 그래, 당신은 나를 향한 그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그 대신 붉은 장미가 피어나는 날, 몰려드는 나비 떼로 당신의 사랑을 느끼라며 어린 아이처럼 치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너는 나비를 닮았으니까, 이 꽃잎들이 흩날리면 분명 기뻐할 것이다.' 


"전하, 희빈 들었사옵니다."

"들라하라."


  허리가 굽은 내관이 옆으로 물러서자 이름 모를 보석들로 치장한 커다란 문이 좌우로 갈라졌다. 연회장의 풍경이 두 눈을 가득 메웠다. 발정난 수백마리의 짐승들이 시녀들을 희롱하며 난잡하게 뒹굴고 있었다. 물론 그 꼭대기, 가장 높은 곳에서 당신은 여느 때처럼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