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


깜빡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익숙한 계기판과 조종간이 보였다. 아, 또 죽었었구나. 그런데 어떻게 죽었더라. 자세히 기억이 나지는 앉지만 머리가 깨질 듯 인파오는걸로 봐서는 무언가에 저격수의 총알에 맞았던 것 같은데.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다른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내 몸은 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의식하지도 못한채. 접전이 일어나고 있는 곳에 도착하자 서로 대치한 채 마주보고 있는 두 진영이 보였다. 다행이다. 늦지는 않은 것 같네. 


잠시라도 양측의 숫자가 달라지면 전세가 급격하게 뒤바뀌기 때문에 바로 전방으로 합류했다. 하나, 둘, 셋... 그런데 왜 적 진영에 숫자가ㅡ


타ㅡ앙


그 순간 전장 전체에 총성이 울렸다. 


"적 저격수다. 머리 숙여!"


우리 진영 쪽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난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우리 동료 중 한명이 머리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뮤지션이 되고싶다는 유쾌한 애였는데. 하지만 그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곳에 서있는 사람 중에서 그런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잠시간의 소강상태를 다시금 찢어놓는 총성이 울렸다.


타ㅡ앙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계기판에 금이 갔다. 씨발, 이번 목표는 나였나. 이렇게 된 상황에서 나는 뭐라도 쏴서 견제를 해야했으나ㅡ


이번 지휘관은 빡대가리 새끼가 틀림없었다. 저격수가 눈 시퍼렇게 뜨고 편하게 저격하는 걸 보고만 있다니. 제발, 제발 부탁이니까 저 위쪽으로 뭐 좀 쏴봐. 하지만 내가 이렇게 미친 듯 외쳐도 내가 하는 짓거리는 변함이 없었다. 그저 앞만 보고 총만 갈겨댈 뿐.


어느 순간 내 갑옷이 수리되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다시 뒤를 돌아보니 남은 사람은 몇 없었다. 이러니까 그랬지. 남은 사람은 치유사 둘과 나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적에 맞서야 할 사람은 고작 셋이었으며, 내 갑옷마저 부서진다면 어떤 희망도 없다는 뜻이었다.


후퇴? 절대 불가능했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그건 단순한 죽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세계의 완전한 종말ㅡ다시 시작할 어떠한 희망도 없는 붕괴였으니까. 앞을 보았지만, 상황은 달라진 것 없이 절망적이었다. 


뒤쪽에서 누군가가 칼을 뽑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우리 치유사 한 명의 목이 날아갔다. 젠장. 계기판이 경고창으로 붉게 물들었다. 그리곤 폭발했다. 그래. 나는 이제 겨우 치유사 한 명과 함께 별 도움도 안되는 권총으로 저들과 맞서야 했다.


치유사는 나에게 미친 듯이 치료를 하려했다. 물론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주사기가 내 등 뒤에 박히고 치료가 된다. 다친 부위가 저절로 아무는게 보인다. 평상시의 나라면 절대로 못 볼 그로테스크한 장면이었지만 지금은 그딴 사소한 거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상처가 더 이상 머물지 않는게 보였다. 


타ㅡ앙

 

잊고 있던 저격수였다. 배에 화끈한 통증이 느껴져 손으로 가리니 끈적하고 뜨거운 것이 매만져졌다. 총알 한 발이 배를 뚫고 갔나봐. 다음은 머리일 텐데. 


망치에 목이 부러져 죽을까?


저격수의 총알을 맞아서 죽을까?


아니면 표창?


얼음만 아니면 좋겠는데. 추운 건 싫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모든게 끝나있었으면 좋겠다.


죽음을 직감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 * *


깜빡


깜빡


어?


어? 


왜 또 여기지? 아직도 안 끝난거야? 나 그만하면 안돼? 


내가 울고 있다는 걸 목이 매이고 나서야 알았다.


왜, 왜 항상 나는 죽어야 돼? 나도 다른 애들처럼 평범하게 살면 안돼? 나 더 아프기 싫은데. 누군가, 제발 누군가가 이 사슬 좀 누가 끊어줘.


* * *


"야, 이거 왜 음성대사 안들리냐?"


"음소거 한거 아님?"


"아닌데?"


"아 시발, 렉 뭔데! 화면도 존나 흐릿해 시발!"


"똥망겜 클라스 오지네. 아 아직도 소리 안들림?"


"아, 아 들린다."



"......D.Va 온라인."


평소와는 조금 다른 잠긴 목소리였지만 그걸 신경쓰는, 아니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소녀는 그렇게, 뫼비우스 위를 걷듯 다시 전장으로 나아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