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히 침울해있던 주연재를 달래주던 추강찬은 주연재와 따로 떨어지고 화장실에 갔다. 그러자 중요한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헌책방에서 가져온 마도서에 적힌 이야기가 사실이었다는 것이었다.
오행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모든 것은 예측대로였다.
추강찬은 이 이야기를 주연재에게 해야 했다. 그러나 전화와 문자 등 스마트폰의 사용은 주최 측에서 이미 막아놓은 지 오래였다.
추강찬은 속으로 결심하고 바로 주연재에게 가서 말했다.
"오늘 저녁 같이 먹자."
"그래. 어디로 갈까?"
주연재는 추강찬의 제안을 쉽게 수용했다.
"그럼 근처에 있는 고깃집으로 가자."
추강찬이 가자고 한 고깃집은 기숙사 가까이에 있는 식당들 중 하나였다. 주연재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추강찬과 주연재는 같이 그곳을 나서 참가자들을 수송하는 버스에 탔다.


주최 측에서는 대회가 없을 때 통금시간이 있는 밤을 제외하고는 자유시간을 준다. 이 때는 외부출입이 완전히 자유다. 그래서 이 자유시간에 추강찬과 주연재가 고깃집으로 갔다.
추강찬이 고른 고깃집은 의자가 있는 곳과 앉을 수 있는 곳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식당이었다. 그 중에서도 추강찬은 미닫이 문이 달린 작은 방으로 가서 음식을 시켰다. 고기가 나오고 어느 정도 다 먹어가자 이런 분리된 공간으로 온 이유인 마도서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주연재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그것을 쳐다보았다. 추강찬이 주연재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내가 헌책방에서 우연히 얻은 건데, 너도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게 뭔데?"
"세계마법위원회에서 썼다는 마도서."
주연재가 믿기지 못한다는 눈으로 추강찬을 바라보았다. 세계마법위원회라면 세계십력을 발견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쓴 책을 추강찬이 발견해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추강찬은 마도서를 주연재에게 건네고 읽게 했다. 주연재가 무의식적으로 경외감을 느끼며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마도서를 바닥에 내려두고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유물을 다루듯이 넘겼다. 그리고 주연재가 어느 한 곳에서 다시 고개를 들어 추강찬를 바라보았다.
"제팔력도 있었네?"
사실을 깨달아 경탄하지만 아직까지 경외감이 남아있어 어조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추강찬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응. 나도 해볼 수 있으려나 하다가 아무래도 쓰면 리스크가 너무 크니까 엄두가 안 나더라고. 그리고 애초에 내가 못 쓰는 마법이도 하고."
주연재가 그 말을 듣고 해당 문단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약간 실망했다. 비밀 유출 방지를 위해 제팔력의 개요와 딱 한가지의 주문과 그 주문에 대한 설명만이 써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주연재는 그 내용을 보고 기겁하더니 어이없어했다.
"여기 공개된 마법이, 어디보자... 제파르를 소환하는 마법? 잠깐, 설마 그래서 제팔력인 거야?"
추강찬이 그 말에 크게 공감해 헛웃음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세계마법위원회의 작명 센스가 어지간히도 비상한 것 같았다. 물론 좋은 의미로 그렇다고 느끼는 건 아니다.
"그보다도 마법 내용이 쓸데 없네. 음, 쓸데는 있으려나. 아무튼 악마같긴 하네."
주연재가 추강찬이 글이 잘 보이도록 마도서를 돌렸다. 마도서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여자의 마음을 마음대로 바꾸어 남자가 어떻든간에 강한 사랑의 감정을 품게 만든다. 소환한 사람은 매우 음란한 인간이 된다. 또한 제파르의 손이 닿은 여자들은 불임이 된다.'
"그리고 제팔력 개요에서도 웬만한 제구력이나 제삼력으로는 버틸 수 없다고 되어있고. 이 조건이라면 나도 못하네. 김초은이라면 또 모를까."
주연재가 정보를 알았으나 활용할 수 없다는 것에 살짝 아쉬운 얼굴을 보였다. 그리고 다시 책 페이지를 넘겨 다른 내용을 살펴보았다.

"오행? 음양오행할 때 그 오행?"
"응. 그 오행."
"오오. 그럼 이거 진짜야?"
"응. 너도 이게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 지 알면 소름끼칠 걸?"
주연재가 오행에 대한 글을 다 읽고 나서 추강찬에게 설명해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추강찬은 그 신호를 읽고 친절히 알려주었다.
204강전에서부터 시작해 오늘 있었던 4강전의 경기의 1차전과 2차전까지. 주연재는 이것을 들으면서 저도 모르게 놀라서 입이 벌어져있었다. 모든 퍼즐이 한번에 끼워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주연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었던 표정에서 벗어나 고개를 양옆으로 몇 번 세게 휘저으며 정신을 되찾았다. 그리고 뭔가 생각이 떠올라 확인을 위해 물었다.
"각각의 오행이 어떤 방위에 속하더라?"
"불은 남쪽, 흙은 가운데, 나무는 동쪽, 쇠가 서쪽, 물이 북쪽이지."
추강찬이 이 마도서 때문에 어느새 다 외워져버린 정보들을 읊었다. 주연재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네 성씨가 뭐지?"
"가을 추(秋). 안에 불 화가 들어가고. 너는 성씨가 뭔데?"
"두루 주(周). 여기는 안에 흙 토가 들어가."
"역시. 그러면 패자부활전에서 이겼다는 게 들어맞네. 패자부활전은 서울에서 열렸으니까."
이 말을 하고 나서 추강찬 본인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주연재의 말이 더욱 더 그들을 놀라게 했다.
"그나저나 네가 남원시 출신이랬지? 남원시는 지리산이랑 얼마나 가까워?"
"남원시 안에 지리산이 포함되어있으니까. 근데 왜?"
추강찬이 이번에는 뭐가 나올까 기대하면서도 긴장했다.
"지리산이면 남쪽이니까 불 화(火)이잖아! 네 성씨 안에 들어있기도 하고!"
주연재의 그 한 마디가 결정타였다. 경기장 위치뿐만 아니라 태어난 지역도 영향을 미쳤을 줄은 둘 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고보니 너는 흙 토(土)이고 서울이잖아. 김초은도  쇠 금(金)자이고 인천 출신이고!"
그랬다. 김초은이 태어난 곳은 인천 중구로, 우리나라에서 매우 서쪽에 있는 지역이었다. 또한 주연재가 태어난 곳은 서울에서도 가장 가운데에 있는 종로구였다. 그래서 오행의 영향을 매우 강하게 받았던 것이었다.
그렇게 둘이 서로 세계의 비밀을 맞춰갔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고기에 신경이 가지 않았다. 고기를 집다가 떨어져도 그다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기가 불판에서 모두 사라지고 한참이나 지난 후에도 그들의 열정적인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추강찬은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올 수 있는 곳을 생각해두기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한참이 지나서야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짐을 주섬주섬 챙겨 기숙사로 되돌아갈 준비를 하고 길을 떠났다. 가는 길에도 이야기꽃은 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김초은 걔를 꼭 이겨야된다?"
"당연하지. 그게 아니면 승산은 없으니까. 그리고 경기장도 잘 뽑혀야 할 텐데."
추강찬과 주연재는 나름대로 작전구상을 하면서 기숙사 대문을 통과했다.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는 분리되어 있었기에 여기서 서로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그 둘의 이야기꽃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장면은 누군가의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너희 둘 역시 사귀냐?"
자유시간이 막 끝나고 들어온 조정수였다. 조정수는 키득거리면서 예의상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그게 아ㄴ..."
그 말에 추강찬은 바로 반박하려 했다. 그러나 주연재가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며 그를 제지했다. 추강찬이 의아해하며 주연재를 바라보았다. 주연재는 추강찬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냥 사귄다고 할까?"
"뭔 소리야? 아니잖아."
추강찬이 화들짝 놀라 움찔하며 주연재처럼 작게 말했다.
"그래도 계속 이대로 오해받는 것보다 아예 거짓말하는 게 낫지 않아? 그리고 앞으로 같이 만나야 될 텐데 그러기 위한 거짓 핑계도 생기고."
주연재의 설득에 추강찬은 납득하고 알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주연재와 추강찬은 거의 동시에 조정수에게 답을 주었다.
"응. 사귀어."
"오, 서로 마음도 통하나 보네. 서로 동시에 말하는 걸 보... 잠깐, 뭐? 사귄다고?"
조정수가 당황한 걸 보니 그냥 놀릴 목적이었던 것 같다고 추강찬과 주연재가 생각했다. 조정수는 당황했던 마음을 조금 추스르고 말하는 방향을 조금 수정하였다.
"오, 얼마나 사랑하는데? 평소에는 뭐해? 진도는 어디까지 갔어?"
추강찬과 주연재는 갑작스런 공세에 흠칫했다. 조정수는 아까보다 훨씬 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추강찬은 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너는 어디갔다 왔던 거야?"
"나? 내가 또 화력덕후잖아. 그래서 연습 좀 하고왔지."
그러고보니 개막식 때 모두에게 엄청난 화력을 선보여주겠다고 했었다. 추강찬과 주연재는 그게 이런 뜻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런데 그거 알아? 나 패자부활전 때 너희 만났다?"
"응? 언제?"
추강찬과 주연재가 동시에 말했다. 조정수가 살짝 키득거렸다.
"역시 케미 쩌네. 어쨌든 잘 생각해봐. 양파의 노래 생각나지?"
추강찬과 주연재는 바로 떠올렸다. 2번째 순서로 문제를 낸 선수가 프랑스 군가의 곡명을 내서 당황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 사람이 얘였다니, 한국이 참 좁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조정수는 뭔가 재밌는 게 생각난 듯이 말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임경빈 알지? 너희 둘 사이 그렇고 그런 거 걔가 알려줬다?"
추강찬과 주연재는 대회에 떨어져서도 참으로 끈질기다고 생각했다. 그런 임경빈이 살짝 원망스러워졌다.
조정수는 바로 본래의 화제로 되돌아갔다.
"아무튼 둘이 되게 잘 어울린다. 너희 언제부터 좋아하게됐냐?"
허를 찌르는 질문에 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건 알 필요 없잖아."
추강찬과 주연재가 얼버무리며 넘어가려 했다.
"응? 아이, 뭔데 뭔데? 말해 봐봐. 궁금해 궁금해." 
그러나 상대는 임경빈의 후예라는 느낌이 드는 조정수. 슬쩍 넘어가기는 힘들어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최대한 그럴싸하게 말해야 했다. 먼저 말한 것은 주연재였다.
"나는 강찬이가 204강전 때 차가운 줄만 알았는데 걱정해주니까 고맙다고 했을 때. 그때 뭔가 마음이 이상해지고 처음 느끼는 감정이 올라오고..."
주연재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얼굴이 붉어졌다. 추강찬도 자신의 흑역사라 덩달아 부끄러워졌다.
"그럼 추강찬 너는?"
조정수가 조금 더 강도있게 심문하는 말투를 썼다. 그러자 추강찬이 말했다.
"8강전 때 연재가 나 치유했을 때. 그게 가장 설레였거든.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야."
말하면서도 부끄러웠는지 추강찬이 고개를 피했다.  주연재는 그 자리에서 얼굴이 단풍잎마냥 물들어가며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추강찬의 얼굴은 이미 그렇게 되어있었다.
"진짜?"
주연재가 조용히 되물었다. 추강찬이 고개를 하늘을 향하려다가 조정수가 뭐라고 할 것 같아서 주연재를 있는 힘껏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으, 응. 그때 가장 그런 느낌이었어. 너도 진짜야...?"
"응, 당연하지."
주연재의 말끝이 흐려졌다. 주연재가 시선처리를 하려다가 추강찬과 시선이 마주쳐졌다. 그러자 둘은 분위기를 어찌할 줄 몰라하며 다시 서로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어어, 그래. 항복. 더는 오그라들어는 못 보겠다. 그럼 다음에 봐. 아, 그리고 내가 꼭 이길거니까 각오해라."
조정수는 더 이상 달달한 걸 보면 토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그 자리를 떠났다. 
조정수가 가자 추강찬은 정신을 가다듬고 남자 기숙사로 가려고 했다. 추강찬이 주연재에게 살짝 인사를 하고 길을 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주연재는 아직도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리고 몇 초 뒤, 주연재는 정신을 다잡고는 빠른 속도로 뛰어갔다.
'이런 데는 내성이 없나보네."
그리고 순간 귀엽다고 생각한 추강찬은 다시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다시 기숙사로 향했다.



그리고 조정수는 그가 떠나면서 한 선전포고와는 다르게 3경기와 4경기에서 추강찬과 김초은을 상대로 모조리 패배했다. 이와 별개로 조정수는 자신의 완패를 별로 신경쓰지 않고 추강찬과 주연재의 뒤를 따라다니며 키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