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돌이 갑자기 그 사이에 끼어 들었다. 덕분에 저번과 같은 쓸데 없는 소모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이 녀석이 눈치를 읽어서 무언가 말려야 겠다 라는 생각을 했을 리는 없고,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말 하려 끼어든 것일 게다. 나도 저번 같은 쓸데 없는 뺑뺑이를 또 다시 재탕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한숨을 쉬고서는 리돌을 돌아 보았다. 


 “리돌, 그러니까 말야. 이 녀석이 한 말은 잊어. 선이라는 건 말이지...”


 “글쎄,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집에 오면 다른 사람이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은 괜찮습니다. 나는 단지 손님이었습니다.”


 감정이 격해지니, 이 녀석의 번역 상태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더욱 더 알 수 없어졌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 녀석이 아직까지 내 말을 받아 들일 준비가 안 되었다는 건 확실해 보인다. 얘는 또 왜 갑자기 자기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폭주 시킨거야?! 

 가만 보니, 아까보다 리돌의 정신 상태가 더 안 좋아지긴 한 것 같다.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며, 간신히 눈물을 참는 듯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는 걸 보면. 아무래도, 잠시 방치해 둔 그 사이에 자기 혼자 감정의 계단을 세네개씩 건너 뛴 모양이었다. 지금은 일단 이 녀석을 진정시키는 게 우선일 듯 싶다. 나는 야생동물을 달래듯, 두 팔을 벌려 침착하라는 제스처를 취해 보이며 말을 꺼냈다. 


 “아니, 그러니까, 사람 말을 좀 듣고서...”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를 무시하고 틀렸을 것 같습니다. 지금 나는 성희와 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쎄, 이제 가야 합니다.”


 “리돌, 그런 게 아니라니까...”


 “안녕히 계세요, 민재.”


 리돌은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 


 “주군, 주군!”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나비는 그 뒤를 쫓았다. 


 나는 갑자기 찾아드는 허탈함에, 그냥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어쩌라고, 자기 혼자 결론 내버리고 저렇게 나가 버리면? 아무것도 해결 되는 건 없잖아? 남겨진 사람은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

 천천히 돌아오는 제정신 속에서, 저 녀석의 입에서 성희 씨의 이름 두 글자가 나왔다는 것만을 간신히 추려 낼 수 있었다. 일단은 아랫집의 성희 씨 네로 간것 같은데, 그렇다고 지금 바로 찾아 가기는 좀 그렇다. 내 정신상태도 지금 만신창이니까. 나는 일단 앉은 상태 그대로 허리를 눕혀, 있다가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할지 생각을 좀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생각이라는 것은 따로 할 필요가 없어졌다. 몸을 눕히자 마자, 갑자기 내 방문을 부서져라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민재 씨, 민재 씨! 문 좀 열어 봐요! 도대체 리돌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애가 울면서 내려와요?!”




 “그러니까... 민재 씨는 그냥 선을 보러 갈 뿐이라는 거죠?”


 “그렇습니다아. 지금 리돌이 성희 씨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그냥 부모님하고 통화하면서 선 보러 나간다는 이야기 하나만 한거에요. 그걸 저 녀석이 자기 멋대로 해석한 거고. 제발, 더 이상 다른 오해는 말아 주세요.”

 

 “어떤 일인지 이제서야 좀 감이 잡히네요. 다짜고짜 방문 앞에서 울고 있길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올라온 거에요.”


 성희 씨는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울고 싶은 건 나라고. 잘못 들은 말 하나로 도대체 누구한테까지 변명을 해야 하는 거야.

 지금 성희 씨와 나는 현관 앞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성희 씨는 급하게 올라온 듯, 츄리닝 바지 위에 얇은 패딩 하나만 걸친 차림이었다. 바로 윗층 올라오는데 패딩을 입고 오지는 않지. 보통은. 아무리 우리집이 옥탑이라고 하더라도.


 “네, 그럼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녀석한테, 설명 좀 잘 해 주세요.”


 어쨌든 이제사 한 시름 놓았다. 경위야 어쨌건 리돌은 같은 집에 사는 식구다. 더 이상 괜한 오해로 서로 간에 얼굴 붉히는 일은 없어야 된다. 그래도 성희 씨가 설명해 주면, 좀 낫겠지. 

 

 그런데, 뭔가 있어서는 안 될 정적이 감돌고 있다. 원래 지금 정도면 성희 씨가 '네, 그럼 가서 제가 별 일 아니니 어서 돌아 가라고 말해 두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문을 나서야 될 것 같은데, 빤히 내 얼굴을 쳐다 보고 있는 것이다. 마치 내 얼굴에 무어라도 두고 온 마냥.


 “서, 성희 씨?”


  나는 괜히 뻘쭘하여,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며 분위기를 환기해 보았다. 하지만, 성희 씨는 요지부동이었다.  내 말은 듣지도 않은 채, 이제는 숫제 두 손으로 사각형을 만들어 그 안에 내 얼굴을 넣어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왜 내 견적을 재고 있어? 


 “저, 성희 씨, 도대체 무슨...”


 “민재 씨, 요새 미용실 간지 얼마나 됐어요?!”


 갑자기 내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성희 씨의 급박한 질문에, 나는 하려던 말을 잊어 버리고 말았다. 나는 마치 바보가 된 것처럼 어버버 거리다, 무엇에라도 홀린 듯 대답을 주워 섬겼다.


 “네? 네... 그... 한 2달 정도 된 것 같은데...요?”


 갑자기 성희 씨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손목을 잡고는 무작정 계단 쪽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가요, 민재 씨.”


 “아니, 가긴 어딜 가요, 갑자기. 무슨 일인지 얘기를 해 주셔야 될 것 아니에요?”


 나는 당황하여 나를 잡은 손을 죽 끌어 당겨 성희 씨의 몸을 돌렸다.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성희 씨는 그제서야 아, 하는 표정을 한 번 짓더니, 다시 나를 돌아보고서는 내 몸 구석 구석을 삿대질하기 시작했다. 


 “보세요. 선을 본다는 분이 지금 이런 몰골로 어디를 가겠다는 말이에요? 머리는 산발을 한 것 마냥 팍팍 퍼져 있고, 피부 관리도 하나도 안 되어 있고, 옷은... 지금 뭐라 말하기 좀 그렇네요. 어쨌든, 지금 민재 씨가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자기 관리에요. 공부가 아니라. 어서 옷 입고 나오세요. 일단 제가 알고 있는 미용실부터 같이 가요. 시간 되면 옷도 좀 사고.”


 나는 그 때 깨달았다.

 전에 성희 씨가 리돌을 데리고 백화점에 간 것은,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어떤 책임감이 아니라 그냥 천성이 그랬다는 것을.  그냥, 누구한테나 모성애를 발휘하는 그런 타입인 것이다, 이 아가씨는. 

 그리고 그 사이에 무심코 들어간 팩트는 폭력이 된다는 걸 잘 모르는 것 같다, 이 아가씨는.

 나는 속으로 쓰린 눈물을 삼키며 아무 말 없이 집 안에 들어갔다. 옷을 갈아 입기 위해. 성희 씨의 말에 반박을 딱히 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간단하다. 난 더 이상 괜한 일에 머리를 쓰고 싶지 않다. 이 초대를 거절하면 성희 씨까지 뭐라고 할 것이 뻔한데, 더 이상 내 정력을 뭔지도 모를 변명에 투자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 최고 미인과의 데이트 찬스를 걷어 차기 싫어서가 아니다. 절대로.

 성희 씨는 문 너머로 다시 한 번 나의 의지를 재확인했다.


 “민재 씨, 옷 갈아입으러 들어가신 거죠?”


 “네이네이.” 


 나는 체념한 말투로 대답했다. 내 대답에 성희 씨는 조금 기쁜 듯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옷 입고 내려오세요~ 저도 준비해서 나올게요.”


 “네이네이.”




 “와, 저 금발 여자 누구야? 화보 찍나?”


 “오늘 어디 방송국 촬영 있어?”


 아아, 들린다. 나와 성희 씨를 둘러싼 수근거림이.

 강남역 지하철을 오르내리는 수많은 사람들. 모두 제각기의 개성이 있는, 갑남을녀들.

 그런데, 왜 지금 내 옆에 있는 존재는 그들과 섞이기를 거부하는가. 덕분에 옆에 있는 나까지 도매금으로 엮여 있는 느낌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지금 강남 거리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지금 우리에게,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옆의 절세미인에 꽂혀 있었다. 갑자기 퍼뜩 들었던 삼행시가 떠오른다. '이 세상에서 나만이 영원하리라.' 아마 그 말은 성희 씨를 위해 준비한 말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옆에 저건 매니저야?”


 ...그래, 난 그렇게 보이겠지. 지금은 '저거' 취급을 받아도 뭐라 할 말이 없다.  사실, 노량진에서 강남까지 지하철을 타고 오는 내내 계속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왜 옷이 날개라고 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성희 씨의 지금 패션을 이야기하자면, 다리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레깅스에, 흰 티 위에 검은 가죽 자켓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매일 같이 트레이닝복을 입은 모습만 보아도 그 미모가 적응이 안 되었는데, 지금은 말 그대로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것 같은 여신의 모습이다. 그리고 살짝 얼굴을 덮은 기초화장은, 이때껏 본 적 없었던 성희 씨의 또 다른 매력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를 빼고 성희 씨가 화장한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그 하나만으로 사람이 이렇게 달라 보인다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달았다. 청순? 섹시? 단아? 어떤 단어 하나로 성희 씨의 지금 자태를 규정할 수는 없을 듯해 보였다. 그저, 아름다울 뿐이었다. 지금 이 장소에서는 '아름답다'라는 단어는 그녀만을 위해 봉사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민재 씨?”


 “아, 아닙니다!”


 “?”


 성희 씨는 옆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얼빠진 놈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 보았다. 진짜, 누구라도 성희 씨를 한 번 바라보게 되면 시선을 빼앗길 수 밖에 없다. 나는 계속 그 옆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흘끗 쳐다 본 것만으로도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보아도 보아도 새로운 매력이 있는 얼굴이란 말이지. 나는 잠시 가출했던 정신을 수습하고서는, 분위기를 환기하려 아까 전에 일에 대해 질문하였다.


 “흠, 크흠. 저, 리돌한테는, 어떻게 잘 설명이 된 거에요?”


 “네, 일단 민재 씨가 선 보러 나가는 일에 대한 오해는 풀어 두었어요. 도대체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거에요?”


 요새 소위 말하는 '판사님, 우리집 고양이가 그랬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면... 미친놈 취급 당하겠지. 나는 일단 책임을 매스미디어에 전가하기로 하였다.


 “인터넷 비디오로요.”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량불법비디오를 시청함으로서 비행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정말 대충 둘러댄 말이지만, 성희 씨는 왠지 내 생각에 깊게 동의한다는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 정도면 되었으려나. 난 더 이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아서, 지금 가는 목적지에 대해서 다시 질문하였다.



 “미용실을 이렇게 멀리 다니시는 거에요? 강남이면 꽤 먼 편인데.”


 “일반 미용실이 아니라 전문적인 샵이에요. 전에 얘기 드렸듯이, 아무래도 몸치장하고 옷 입는게 일이다 보니까요.”


 “어떤... 일이요? 전에 저한테 얘기한 적이 있다구요?”

 

 성희 씨가 나한테 직장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나? 난 지금까지 성희 씨가 하도 집에 먹을 것만 해 들고 오길래, 영양사나 요리 쪽으로 일하는 줄 알았다. 성희 씨는 내 반문에 조금 당황한 듯 나를 쳐다 보았다.


 “네? 기억 안 나세요? 처음 뵈었을 때 제 소개 때... 아.”


 성희 씨는 왜 기억을 못하냐는 듯이 어이 없어하는 표정을 짓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 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정면을 주시하고서는 말을 끊었다. 뭔데?


 “무슨 일인데요? 성희 씨 처음 만났을 때 무슨 일 하는지 말씀해 주셨었나요?”


 성희 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