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프랑스에서 살았던 마리 에머리라는 여자가 쓴 '악마가 사랑한 여인'이라는 책을 보면 책임 안지는 거짓말의 기술이 나온다

국가나 집단이나 개인 등의 대상에게 메타적으로 정보를 알려준 뒤, 대상에게 상대적인것들을 설정시키거나 상대적인것들이 설정되있을때 그때 공간에서는 틀리지 않지만 사실은 거짓말인 제안을 하는데, 그때 대상이 설정된 상대적인것들에 의해 그 제안을 승인하게되면 대상에게 원하는 행위를 책임 안지면서 저지를수 있다는것이다

당연하겠지만 대상에게 정보를 알려주는것은 직접 전달하는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가 절대적으로 변질되지 않는다는 대전제가 있다면, 편지를 통해서 전달하거나 기사를 통해서 또는 심부름꾼을 통해서 전달할수도 있을것이다. 매체가 전화 수화기에 해당되기만 한다면 형식에 구속되지 않는다.

또 대상에게 직접 전달하지 않고 대상과 가깝거나 같이 묶여있거나 대상 집단의 일부에게만 전달할수도 있다. 대상에게 전달하지 않는것은 대상 주변인에 의해 정보가 전달될때, 그 주변인의 이미지 또한 상대적인것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합리적인 인간의 추론능력 범위 내에서, 절대적으로 옳은 소스에 기반한 기호와 은유와 상징을 통해서도 정보를 전달할수 있다.

상대적인것들이라 함은 문화, 움직임의 방향, 감성, 감정, 기분, 욕구, 시각적인 자극, 많은 사람들의 수, 처세적 욕구, 트렌드, 눈치, 체면, 이미지, 정보전달 매체에 대한 평가, 사회적 위치 등 여러가지일것이다

절대적인 소스를 기반으로, 추론에 의해서만 파악되게끔 보편적인 인간의 능력 범위 끝자락에 걸친 상징 패턴을 만들고, 그 상징을 간접적이지만 접근성은 낮지않은 매체를 통해 유효숫자의 끝자락에 걸친 구성원 일부 숫자에게 정보를 전달하고는, 같은 권리의 분깃을 가진 일부에 의해 구성원들에게 전달시키게 유도하는것이 예이다

그 기술의 태생 디자인 자체에 사악한 의도가 담겨있기에, 대부부의 경우 끝자락에 걸친것들의 프랙탈로 이루어져있어 사실상 눈가리고 아웅하는것이나 다를바 없지만 그래도 어느 때까지는 껍데기적으로, 언발에 오줌누는식으로 유지할수 있다

구성원들은 '음모론'이라는 카테고리의 이미지와 느낌만 보고는 같은 권리의 분깃을 가졌으나 초라해보이는 일부 구성원들의 정보를 보고도 그 정보에 따른 움직임을 취하는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침묵이 그 일에 대한 승인이 되게끔 설계하여 대상의 지배력을 대가없이 확보하는것이다

또 정보에 대해 미리 알려주지 않고 거짓말로 대상에게 상대적인것들을 설정시키고 관성 속에서 유도하다가, 메타적으로 그것을 포괄하는 정보를 알려준 뒤 대상에게 상대적인것들과 절대적인것 둘중 하나를 택하게해 처음의 불법성까지 합리화시키는 방법도 있다. 이 경우에도 개념적으로 정보를 전달만 하면 되기에 끝자락들에 걸친 간접 및 상징들에 의해 전달할수 있다

모든것을 메타적으로 포괄하는 올바른 정보를 알려줘야만 거짓에 실체가 생긴다. 낭떠러지로 데려가는 상대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면 그 거짓은 밀폐되었기에 그 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만 하지만, 그 상대에게 어떻든간 정보를 알려주면 인위적이고 언발에 오줌누는식으로 자신의 허상을 유지시킬수 있다. 제안받는 피해자는 하나의 현상이나 사건이 서로 상반되는 두가지 맥락에 의해 해석되어, 마치 동전같이 느껴질수도 있겠지만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동전이 아니라 빛과 그림자이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에 실체가 생기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빛을 비추는 이유는 밀폐되지 않게 해서 잠시동안이라도 책임지지 않으려는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내용을 이해조차 못할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원리는 굉장히 단순하다

사람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속에서도 사는 존재이다. 시간속에서 산다함은,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공정 과정이 수억개나 되는 공장은 패턴 안에 있기 때문에 일의 선후가 있어도 공간속 존재다. 버튼을 누르면 정해진 음료가 나오는 자판기도 공간속 존재다. 동물들도 패턴 안에 있기에 공간속 존재다. 부피에 상관없이, 복잡함에 상관없이 패턴 안에 있다면 공간속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영혼이라는것이 있기에, 불확실성을 가지기 때문에 시간속에서도 살아간다. 과거의 행위는 절대적으로 바꿀수가 없지만 불확실성을 가진 존재는 시간 속에서 살기 때문에 과거의 절대적인 행위가 이후에 다르게 규정될수 있다. 시간속 존재의 행위는 공간속에서 판단되는게 아니라 시간에 의해 판단되기 때문이다


연예인이 지인에게 돈 꿀때 진심을 담아 빚 반드시 갚는다고 약속하고 돈을 꾸었으나 나중에 갚을때가 되자 생돈 나가는것 같아서 안갚는다면, 처음의 그 말은 그 공간속에서 아무리 진심으로 했어도 나중에 의해 거짓말이 된다.

남녀가 서로 굉장히 사랑하고 맹세까지 했어도 시간이 흘러 배우자가 퇴직할때 퇴직금 절반을 노리고 황혼이혼을 해서 편하게 따로 산다면, 아무리 처음 맹세할때는 진심이었어도 나중 행위에 의해 처음 행위가 다르게 규정된다. 절대적인 행위가 나중 행위에 의해 상대성을 가지게 되는것이다

자식이 엄마 지갑에 있는 돈 슬쩍 한다음 상대적으로 편한 아빠에게, 주변 친척들 시선이나 체면이나 분위기나 기분이나 여러 상대적인 요소들이 있는 대응하기 어려울때, 도둑질한 정보를 특정 텐션과 어투와 강도 속에서 적당히 알려주고, 엄마 또한 아빠에 의해 '문간에 발들이는식'으로 정보가 접해져 결국 상대적인것들에 의해 절대적인것을 승인하게되면, 처음의 도둑질은 껍데기적으로 양도로 바뀌게된다. 절도가 시간속 구조에 의해 양도로, 처음의 불법성까지 뒤집혀져 바뀐것이다

독일 괴한들이 17세 소녀를 납치한 뒤, 몸값 협상을 위해 일정 기간동안 데리고있다가 서로 정이 들어 소녀가 괴한들을 용서해주는것도 같은 원리이다. 인간적인 감정과 친근감 등 상대적인것들에 의해 처음의 납치 및 구속 등을 용서해주면 처음의 불법적 행위가 나중에 의해 다르게 규정된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처음이 나중되고 나중이 처음되는것'이라 표현한다

이명박이 수십년간 신실한 장로였어도 대통령 직위와 bbk 잘못인정 둘중 하나를 택하는 상황이 생기자, 눈에 보기에 작아보이고 언제든 가질수 있는 신에 대한 믿음보다 눈에 보기에 커보이고 한번뿐인 대통령 직위를 택한것도 같다. 회개땡하면 된다고 얄팍하게 생각한것 같은데, 이명박은 그 행위로 인해 자신의 신앙이 '절대적인 하나'가 아니라 '여러 상대적인것들중 하나'라는걸 스스로 증거했으며 조건부에 따라 자극이 셌기에 신앙이라는것을 택해왔다는걸 증거했다. 그의 인생 전체의 신앙생활이 이후 그의 행위에 의해 전부 다르게 규정된것이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자 형은 진심으로 불평하며 거절했고 아우는 진심으로 기꺼이 따르겠다고 했으나, 형은 뒤에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한 반면 아우는 중간에 생각이 바뀌어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지 않았다면 형이 아버지의 말을 따른것이고 아우는 거절한것이다. 처음이 나중되고 나중이 처음된다는 소리는 이 경우에 해당된다


시간과 공간속에서 사는 존재는 하나의 공간속 절대적 행위가 이후의 행위에 의해 다르게 규정된다. 공간속 행위는 불변성과 절대성을 가졌으나 시간에 의해 상대성 또한 가지게되는 것이다. 악마는 이 원리를 추출해 내 공학적으로 기술을 만든 뒤 저 마리 에머리와 같은 자신의 숭배자들에게 알려주고 사용하게 했다

타인을 인위적으로 '처음이 나중되고 나중이 처음되게' 만드는 그 기술은 태생 근본 자체적으로 사악한 방향이 담겨있다. 예를 들어 상대방에게 특정 행동을 요구하거나 상대방의 소유를 가져가고 싶으면 가서 말하면 될것이다. 그러한 제안을 했을때 상대가 거절하면 못하는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을 사용해, 처음부터 상대에게 불법적으로 상대적인것들을 설정시킨 뒤 그 관성속에 있을때 나중에 간접적이고 은유적인 제안을 통해 사실상 승인받아 처음의 불법성까지 정당화시키거나, 처음부터 자신들의 계획을 간접적이고 은유적이지만 다 알려준 뒤 상대적인것들이 설정되어 있는 상대에게 간접적이고 은유적으로 제안해 사실상의 승인을 얻어낸다면, 그것이 껍데기적으로 아무리 조건충족이 되었어도 그것은 거짓말이고 사악한 행위일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유효범위 내에서 조절해도, 상대의 나약함과 경로의존과 어리석음 등의 빈틈을 기반으로 하는 야생 질서의 추구이며 보이지않는 폭력적 질서의 추구이다. 그러한 방식은 그 방식 자체에 사악한 의지가 담겨있다. 그러한 방식을 사용하는자는 자신의 영리함이 대가의 근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야생 폭력질서의 다른 표현일뿐이다

이 방식은 식칼이나 다이너마이트같은것과 다른다. 식칼이나 다이너마이트는 음식을 만들거나 광산을 파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지만 사용자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데에도 사용된다. 그러나 상대의 연약함과 나약함의 틈을 기반으로 인위적으로 상대를 '처음이 나중되고 나중되게' 만드는 이 기술은 그 자체적으로 악마적인 속성을 가졌다. 자체적으로 사악함을 향한 움직임의 방향이 있다는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신 또한 이러한 방식을 사용한적이 있다. 바로 아합왕의 경우이다

아합왕은 고대 북이스라엘 왕국의 7대 왕이었는데 당시에는 반역이 빈번이 일어났었기에 왕권 안정을 위해 주변의 강한 국가인 페니키아 지역의 투로 왕국과 혼인동맹을 맺었었다.

이 아합왕은 굉장히 교활하고 쥐새끼같은데다 생존운이 무척이나 좋은 인간이었다. 자식은 70명이 넘었고, 모든 악한짓을 저지를때마다 책임 안돌아오게끔 형식을 통해, 주로 혼인동맹으로 온 이자벨이라는 아내를 통해 저질렀었다.

그 죄악들이 정도를 넘다가 어느날 나봇의 포도원을 이자벨이 손안대고 코 풀어주는 방식으로 빠앗아 갖다주자, 신에 의해 심판이 확정되었는데 그 확정을 듣고는 이 가증스러운 살인자는 생존본능에 의해 즉시 반성하는 퍼포먼스를 취했다

밭에 독보리가 있어도 형식 자체를 건드릴수 없는 원칙상 그 반성하는척 하는 퍼포먼스를 인정해줄수밖에 없기에 결국 그 일에 대한 심판이 취소되어 피해갈수 있었다. 아합왕은 이렇게 생존에 탁월한 매우 교활한 쥐새끼였었다

시간이 지나 시리아에게 빼앗긴 라못길르앗 지역을 되찾으려고 남유다왕국의 왕과 동맹을 맺었는데 유다왕이 선지자들을 통해 신의 뜻을 구하자고 권해서, 평소에 늘 재수없는 예언만 해서 미워하던 선지자 한명을 제외한 400명이나 되는 이스라엘의 모든 선지자들을 불러 예언을 시켰다

왕 앞에서 신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400명이나 되던 선지자들은 하나같이 반드시 승리할것이라 말해줬었다. 신의 이름으로 하는 예언들은 신이 책임지는것이고 단한번도 틀린적이 없었으니 100%의 확률을 가졌다

그러나 유다왕의 권유로 결국 평소에 미워하던 재수없는 선지자도 불러 예언을 시켰는데, 그 미카야라는 사람이 와서 신이 아합왕으로 하여금 라못길르앗으로 가게해 죽게 하려는 계획으로 선지자들에게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 이런 거짓 예언들이 나왔다고 예언해줬다

당연히 아합왕 입장에서는 평소 재수없는 예언을 해오던 인간이 못마땅했기도 했고 400명이나 되는 시각적 권위가 있기도 해서 미카야의 말을 무시하고 전쟁터에 갔으나 그 예언대로 라못길르앗에서 패배하고 죽게되었다

절대적인 사실만 전해왔으며 절대적인 사실만 전할수 있는 신의 선지자들이, 그것도 400명이나 되는 숫자가 예언했다면 무조건 믿을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거짓이면 책임이 있어야 하는데 신은 절대적이라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은 아합왕에게 400명이라는 선지자를 통해 확실하게 거짓말을 쳐서, 시각적 권위와 라못길르앗 지역에 대한 욕망 등의 상대적인것들을 설정시켰다. 아합왕에게 궤도와 관성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합왕이 미워하던 평소 재수없는 예언만 해오던 선지자를 통해 메타적으로 정보를 전달했다.

아합왕은 처음의 거짓말을 뿌리로 설정된 상대적인것들 속에서, 평소 재수없는 예언만 해오던 대상에 대한 감정과 이미지 등의 상대적인것까지 더해, 절대적인것보다 상대적인것을 택해 결국 '알고도' 스스로 죽으러 가게 되었다. 신은 진실만 말한다는 항구적인 원리에 의한 공간속 행위 또한 시간속에서는 상대성을 가지기 때문에 이것이 성립할수 있는것이다

만약 A라는 사람이 B 보는 앞에서 C에게 'B한테 이런 선택을 하면 살것이다'라는 말을 전하게 한뒤, 다시 B보는 앞에서 D에게 'C를 통해 시킨말은 B를 죽이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말해라'라고 했을때 B가 D의 말을 따르지 않고 C의 말을 따른다면 그 결과에 대해 B도 책임을 질것이다

그것이 도식을 통해 이루어진것이 바로 아합왕의 경우이다



그렇다면 신이 아합왕에게 한 거짓말은 무죄인데, 마리 에머리같은 악마숭배자들이 사람들에게 하는 거짓말은 유죄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신은 그 많은 심판 방식들중에서 그러한 방식을 사용했을까?

그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로 상대를 인위적으로 '처음이 나중되게하고 나중이 처음되게' 만드는 그러한 기술은 악마에 의해 만들어진 절대적으로 사악한 도구이지만, 만물을 주관하는 신은 그러한것에 구애되지 않는다는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둘째로는 아합왕이 이자벨을 통해 상대적인것들을 근거로, 간접적으로, 책임 안돌아오는 형식을 통해 수많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핍박한것에 대한 심판을 위해서이다. 선지자들을 책임 안지는 방식으로 죽인자가 선지자들에게 책임 안지는 방식으로 죽임당한것이다.

셋째로는 아무리 기술적으로 뛰어나도 섭리를 거스를수 없다는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의 생명을 가증스럽게 유지시켜준 그 교활한 기질이 역설적이게도 그의 눈에 가리움이 되어 그를 죽게했다. 아합왕은 자신의 기술적 뛰어남으로 그때그때마다 심판을 피하면서 악을 공짜로 저질러왔으나, 그의 그 기질이 더 큰 틀에서 그를 죽음으로 인도했다.


그 악마가 디자인한 근본적으로 사악한 의도가 담긴 공학적 방식이, 신에 의해서는 정당하고 의로운 심판의 방식이 된것이다. 이것은 뜻을 드러내는 예표이며 정당한 심판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리 에머리같은 악마숭배자들이나 다른 모든 존재들은 절대 신처럼 될수 없다. 이 방식의 구조 자체가 상대를 속이기 위한 방향성이 내포되었기 때문이다.

상대를 인위적으로 처음이 나중되게하고 나중이 처음되게 만든다면, 그 존재는 영혼에 화인을 맞게될 것이며 그 존재의 생명의 길은 남에게 만들어놓은 바늘귀만큼 작아질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