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글 :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history&no=1055147


위 글은 2013년 역갤 전성기때 무도무치씨가 쓴 글인데 댓글에서 보이는 허탈씨는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글쓴이가 댓글로 아무리 부연설명을 해줘도 끝까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당시 다른 글들에서 보여지는 국뽕들도 무도무치씨가 계속해서 앵무새처럼 말하는 '그 같은 원리에 의해'라는 그 말뜻도 이해하지 못했다. 내 생각이지만 예를들어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열매가 1단계부터 10단계까지의 과정을 거쳐서 나온다고 쳤을때 그중 눈에 보여지는 단계는 9~10단계뿐인데 움직임이 있는 사람들은 그 이전 단계를 본인 모르게 스스로 갖춰놓았기에 9단계만 잘 설명해도 10단계가 유도되지만 영혼이 없는 사람들은 그 중간 과정이 생략되있는게 아닌 아예 없는 존재들이라 일일이 노가다로 코딩하듯이 해줘야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한마디로 맥이 없고 그때그때 공간뿐이며 정보를 인지할때 껍데기 점 하나만 인지하는것이다. 그런데 정상적인 사람들은 눈앞을 보면서 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와 싱크로해서 도식을 유추한다음 알아내려는 욕구 자체가 안생기기 때문에 본인은 인지하지 못한 상당히 많은것이 전제된 어떤 지대 위에서의 주장을 당연한듯이 하는것이고, 표면 의식에 있는것만 존재하는 유사인간들은 그 껍데기 단면만 보고는 분열되고 조각난 그들의 정신으로 이쪽저쪽 360도 각도로 해석하니 정상인 입장에서는 알려줘야할게 너무 많은데다 벽보고 말하는것 같아서 제풀에 나가 떨어지는게 아닐까싶다.


그렇다면 무도무치씨는 왜 자유는 인정되는게(받는게) 아니라 먼저 있는것이라 했을까? 그것은 사물을 보는 기준점을 허탈씨같은 당시 국뽕들이랑 다르게 근본적인 지점에다 두었기 때문이다. 허탈씨같은 사고관은 실리성, 효율성, 경제성 등에 의해 관계에 초점을 맞춘 유교식 사고관인데 이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이지 개인은 관계라는것의 그림자처럼 되어버린다. 허탈씨가 가지고 있는, 근본 원리적으로 행하면 폐단이 일어나고 무질서가 생기기 때문에 실리성과 효율성 등에 의해 어떤 틀을 관계속에서 만들어 구성원에게 주입시킬수밖에 없다고 하는식의 철학은 거의 모든 한국인들과 현대인들 또한 가지고 있다. 보통은 사람들을 통해서 관계라는것이 그림자나 거울처럼 비춰지는것이 당연한것인데, 허탈씨나 국뽕들이나 현대인들같은 사고관에 의해 산다면 그것이 거꾸로 뒤집혀 관계에 의해서 사람이 그림자처럼 모양지어지고 한정되고 인정된다. 그러면 어째서 저런 사고관이 나왔을까?


그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다른 이유들을 들며 설명할수 있지만 종교적으로 접근해서 보자면, 그것은 원인이 아니라 원인에 의한 결과이다. 어린시절 일본의 악랄함에 대한 역사교육을 수년동안이나 받았을때, 처음에는 분노했으나 나중에 중학교쯤에 들어와서는 그 피로감에 의해 '어서 빨리 일본이 사과를 해서 끝냈으면' 하는 생각이 든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엄청나게 억울한 일을 당했으면 그것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신경을 써야할수밖에 없는데 그 기간이 길어지고 무언가에 의해 매여있는 정도가 심해지면, 나 자신으로서 눈 앞을 보며 살고싶은 욕구에 의해 매여있는것에 대해서 피로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분명 억울하고 심각한 일을 당했는데 현재만 보면서 그걸 잊고 룰루랄라 살수는 없을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 계속해서 안풀리고 남아있어서 그 지점에 계속 머물러있게 된다면 일종의 구속된듯한 느낌이 들수밖에 없다. 요즘은 모르겠으나 넷상에서 일본인들이 어떤 컨셉을 정하고 특정 미디어적인 이미지의 재미를 위해 또는 만화적인 핑퐁을 위해 거짓으로 스레를 세울때에도 꼭 끝날때 그것이 낚시였다고 밝혔었는데 아마 내 생각이지만 일본인들의 그런 심리 또한 자유스러워지고 싶은 본능적 욕구에 따른것이라고 본다.


어떤 대상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속인 상태에서는 자신의 의식이 거침없이 선형적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 걸림돌, 말하자면 양심에 의한 그 걸림돌을 없애려고 마지막에 낚시였다고 꼭 말하는것이다. 말하자면 그 모든 행동의 동인은 의식적으로 생각해내거나 메뉴얼적으로 학습해서 따르는것이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을 위해서'인것이다. 생각 이전에 본능에 의해 그런 욕구가 나오는것이다. 목적성이나 실리성이나 경제성같은 그런게 없이 그저 '나 자신을 위해서'이다. 일본을 용서해주고 친하게 지내는게 관계 도덕적으로 옳아서 그런것 이전에 나 자신을 위해서 그런 마음이 드는것이고, 남에게 거짓말을 치지 않는것도 남이 받는 피해에 대한 고려도 물론 있지만 그 이전에 나 자신을 위해서 하지 않는것이다. 영혼이 있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자유를 추구하기 때문에 양심을 지킬수밖에 없다는것이다.


내가 예를 들만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서 잘 모르겠지만 저번에 했던 예를 다시 들자면, 버튼을 눌러서 결과가 나오는 자판기같은 경우, 특정 결과가 나온것은 특정 버튼을 눌렀기 때문이기에 결과에 따른 책임은 지지 않을것이다. 계산기도, 컴퓨터도, 인공지능도, 기계도, 공장도, 에어컨도, 냉장고도 다 마찬가지이다. 그것의 인풋을 하는 존재에게 책임이 있는것이지 그 도구 자체들에게는 책임이 없을것이다. 책임이라는것이 생기려면 권리가 있어야만 한다. 권리가 생기면 책임 또한 생길수밖에 없다. 계산기에게 자아가 생기고, 결정에 대해서 강제되지 않고, 결정할 권리가 주어지는 등의 조건들이 구비되면 그 결과에 대해서는 계산기에게 책임이 있을것이다. 말하자면 그 근본 구조상 권리라는것은 책임이라는것이 마치 동전처럼, 한쪽은 위를 향해있고 다른쪽은 아래를 향해있지만 그 누구보다 딱 달라붙어있는 그런것이기 때문에 영혼이라는것이 생기고 자유와 양심이라는것이 생기면 그 같은 원리에 의해 모든 행위에 있어서 책임이 주어진다. 만약에 소스코드를 수조억줄 이상 짠 아주 정교한 알파고 AI 인공지능을 만들었더라도 메뉴얼 가짓수의 부피만 엄청 많을뿐 일어난 결과에 대해 그 존재에게 책임을 물을수 없을것이다. 영혼이라는것이 없고 불확실성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존재로부터 나온 모든 일은 그 존재를 만든자에게 책임이 생기기 때문이다. 패턴이 거대해도,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통로의 너비가 어마어마해도 결국은 인위적인 요소들에 의해 방향과 길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또 무생물이 아닌 설령 인간이라 할지라도, 질서나 물질이나 학위나 어떤 관계적 이득을 위해 여러것들이 제한된 통짜 속에다 인간을 넣는다면 적어도 그 층위에 대해서는 움직임이 사라지며 개념적으로 계산기와도 같아질것이다.


아주 작은 부피같아보여도 원리에 의해 중심이 판단되는것이지, 그 외의 자유스러운 부가옵션들이 아무리 많아봤자 그것의 부피로는 덮을수 없다. 사람이 사물을 보고 인지하고 반응을 하는 그 모든 과정속에서 위장이든, 상처 때문이든, 실리적 이득 때문이든 마음문을 닫은채 메뉴얼적으로만 반응하며 여러 경로들과 메뉴얼들과 체제같은것에 의존하면서 산다면 그 대상은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일종의 패턴 안에 있기 때문에 움직임이 없는 존재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내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말은 모든 양식을 내버리고 빤쓰바람으로 살며 돌발적인 임기응변만을 중요시하라고 하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움직임이라는것은 선택속에서 증거되고 보여지는것이라는 소리이다. 그리고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의 움직임은 각각이 다 다르다. 그러므로 움직임 속에서 개성이 보여지고, 그 사람의 실체가 드러나고, 그 사람의 초상화가 보여지는것이다. 법률에다 아무리 자유인이라고 보장해줘도, 정치인들을 자신이 뽑아줘도, 정서적으로 이완된채 아무일이나 해도 간섭이 없더라도, 느낌적으로 자유스러운 느낌이 들지라도, 자유라는것은 그런식으로 증거되는것이 아니다. 자유는 작용속에서 보여지는것이다. 이 관점으로 보자면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노예들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현대인들은 신이 왜 에덴 동산에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알수있는 선악과를 놓았느냐며 아직까지도 이해를 못하고있다.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낚으려고 그런게 아니냐, 인간을 시험하려고 일부러 그곳에 배치시켜놓은게 아니냐 하면서 자신들의 수준대로 신을 해석하고 판단하는것이다. 이 일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이 어떤 성질을 가진 존재였는지에 대해 알아야된다. 신은 모든 동물과 식물과 하늘들과 위아래의 바다들과 땅과 원리들과 현상들을 만든 뒤, 동물들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었는데 이 인간에게는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주지 않았다. 동물들을 그냥 만든뒤에 내버려두기만 한다면 관상용으로는 좋을지 몰라도 그 존재와 신은 서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의미가 없어진다. 신의 입장에서 대상에게 의미와 가치가 생기려면 소통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물이 신과 소통을 하려면 영적인 존재여야만 하는데 코끼리와 뱀과 사자와 개와 지렁이와 메뚜기와 고래와 망둥이 등의 모든 동물들은 각자의 지성과 수준으로는 그 영혼에 의한 책임을 감당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 사이에 중재자로서 '동물이면서 영적인 존재'인 사람을 만든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주지 않아 일종의 밀폐상태로 만들어놓아 책임이라는것이 생기지 않게했다. 말하자면 동물을 위해서, 사람을 위해서 가장 좋은 구조로 디자인한것이다. 동물이면서 영적인 존재여야만이 동물과 신 사이를 이어줄수 있다. 그런데 동물이면서 영혼을 가진 사람에게 선악에 대한 지식이 주어진다면 처음 디자인한 모양을 벗어나게 되어버린다. 또 인간의 수준으로는 그 권리와 의무라는것을 온전하게 감당할수 없기 때문에 선악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는 안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것을 디자인한 뒤, 선악에 대한 지식을 아는 나무를 동산 가운데에다 놓고 사람에게 경고한것이다. 왜냐하면 모든것을 만들어놓고 실리성, 효율성, 질서 등의 이유에 의해 한쪽 방향을 향하게끔 사물들을 통짜로 구성했다면 그 모든 사물에는 가치가 생기지 않으며 홀로그램 허상과도 같아지기 때문이다. 외면이 아닌 중심에 의해 보자면 아무리 동물과 식물과 인간과 바다들과 지구와 모든 구성요소들을 다 만들고 복잡다단하더라도 그것이 밀폐되었다면, 캔버스에다 캐릭터 그림 그려놓는것과 똑같고 계산기를 두드려 계산하는 그런종류의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은 그것에 실체와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 그 현상이 밀폐되지 않게끔 바늘귀만한 점 하나를 만들어놓았던것이다. 가치를 만들기 위해 밀폐되지 않게끔 해주는 그것의 부피가 작으면 작을수록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 크다는 반증이다. 어떤 도식 속에서 체제같은것에 내어맡기며 껍데기적인 실리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은 이 개념을 잘 모른다. 불확실성이 늘 있어야만이 그 선택에 의해, 선택 유지중에 의해 인간에게 가치가 생기고 실체가 유지되는것이다. 또 스스로 존립하는 근거를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만들었다는점에서도 이점은 중요하다. 만약에 외부에 의해 스스로의 모양이 주어졌다면 개체로서의 가치는 사라지고 그것을 준 존재의 계산기처럼 되었을것이다. 그러나 한번 움직임이 드러나는 시험을 겪었을때 그 그릇의 크기에 비례해서 신을 택했다면, 그의 위치는 그가 선택해서 지킨것이므로 실체와 가치가 생겨나게 된다. 그 스스로가 벌어들인것이 되는것이다. 또 인간이 신의 아들을 믿는것도 한번 버튼을 누르면 그대로 쭉 이어지는식이 아니라, 신의 아들을 스스로에 의해 믿고 그것을 유지하는식으로 되어있는데 이 또한 가치와 실체를 위해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신이 있다면 왜 사람들에게 안드러내고 안알려주냐? 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 원리적인 이치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라 생각한다. 신은 피조물을 뭉뚱그려진 군집체로, 모든곳에 편재되어있는 안개로 만들지 않았다. 효율성, 실리성 등의 관점으로만 보자면 인간은 정보를 전달하거나 정보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너무나 불편하게 만들어졌다. 눈과 코와 입과 팔다리와 귀 등을 가진 육체로 만들었고 개인과 외부를 분리시켜놓았다. 나 자신을 통해서 외부와 소통하는 구조로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그 '신의 형상'의 디자인이어야만 각 개체에게 자유가 생기고 실체와 가치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같은 철학에 의해 해석하자면 신이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오히려 존중해주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만약 대놓고 드러낸다면 밀폐되지 않는 세상의 구조상 그 반대편의 그림자도 어떤식으로든지 세상에 드러날텐데, 악한 기질이 잠재되어있는 나약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설령 지식으로 인지하고 의식주의적으로 방비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악을 택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밀폐되었는지 안되었는지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해석해야만 옳다


무도무치씨가 다른 글에서 댓글로 적은 '그 같은 원리'라는 말뜻은 동쪽으로 갈수 있는 자유가 있으면 서쪽으로도 갈수도 있다는 뜻일것이다. 그 결과가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통제하고 통짜로 넣는다면 그때에는 그 층위 부분에서만큼은 자유가 사라지고 사물은 홀로그램이 되어버린다. 영혼이 없어지고 움직임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자유라는것은 실리 아래에 놓일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란 주어지는것이 아닌 먼저 있는것이어야만 한다.


사람이 왕 아래에 놓여졌고, 동물이 사람 아래에 놓여졌고, 여자가 남자 아래에 위치하게 된것도 관계적으로 정한 도덕 정답이라서, 실리적으로 똑똑한 왕이나 남자가 운영하는게 결과가 더 좋아서 그런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위에다 쓴 말을 정면으로 부정하게 될것이다. 사람은 눈 앞을 바라보며 살아야된다. 사리분별은 입체속에서 하지만, 인생은 눈 앞을 보면서 자신으로부터 나오는것에 의해 살아야되는게 건강한 삶인데 대다수의 현대인, 한국인들은 사리분별은 터널형으로 눈앞을 보며 하고 인생은 관계속에서 살고있다. 한마디로 거꾸로 뒤집혀있는것이다. 현대인들로부터 나오는 정치적 올바름이니 무슨무슨 주의니 하는 모든 주의, 주장들을 보면 전부 원리적으로 설명한것들이 아니라 실리성, 효율성 등에 의해 설명한것들뿐이다. 저 위의 허탈씨와 당시 국뽕들처럼 같은 철학을 공유하고 있지만 다만 계산적인 머리만 더 좋을뿐인것이다. 여자가 남자 아래에 위치하게 된 이유는 여자의 허영심에 의해 뱀에게 속아넘어간 뒤 남자를 속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사람은 동산에서 쫓겨나 땅을 일굴수밖에 없게 되었다. 껍데기 관계적으로 이게 정답이라는 이유로 억지로 대상을 낮추고 대상은 그 '외부 도덕'을 학습하며 맞춘게 아니라, 환경이 바뀜으로 인해서 힘이 세고 부양과 보호를 해줄수 있는 남자에게 신세를 질수밖에 없게되어 자연스럽게 그런 질서가 형성된것이다. 인위적으로 껍데기 이미지를 정한다음 대상을 맞춘게 아니라 서로 자신을 위해 사는 자유인들에 의해 자연적으로 그런 모형의 질서가 만들어진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눈앞을 보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존재였으며, 타인 또한 자신과 같은 권리가 있다고 온전히 인지하였으며, 입체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다.(여기서 말하는 '상상력'은 망상력이 아니다) 또 스스로 사물에 대해 재판할수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관계 속에서는 아래에 위치해있는것 같아도 그만큼 의무 또한 없었고, 또 삶의 초점이 관계에 잡혀있지 않고 자신에게 잡혀있으며 자신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질서가 유지될수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초기의 인간들은 퀄리티가 아주 높았었고 여자들 또한 몹시 준수했었는데, 여자들의 아름다움을 본 타락한 마귀들이 여자들에게 가서 '나는 신의 아들이다' 라는 말을 하여 허영심을 이용해 동침하는 일들이 많아졌고 그 결과로 육체가 매우 비대한 반신반인 거인들이 여자들에게서 태어나게 되었다.(고구려 주몽의 설화가 이 구조와 비슷하다. 해모수가 유화에게 와서 자칭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자, 신과 같은 계급이 되고자하는 허영심에 의해 이끌린 유화가 만난지 하루만에 몸을 허락하였고, 그 이후 해모수는 곧 홀연히 사라졌는데 그 일로 인해 신의 아들인 주몽을 낳았다는 설화는 아마 홍수 이전의 일들이 구전되면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아비를 닮아 영혼도 없고 사악한 그 거인들은 관계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물리적, 폭력적 수단으로 타인을 구속하고 지배하게 되었고 이에 영향받은 다른 사람들 또한 관계적인 서열적 욕구에 의해 폭력으로 타인을 지배하려고 했다. 영혼이라는것은 신이 만들었고 고유의 긍정적인 방향의 움직임을 가지고 있기에 그러한 행동을 할때에는 거슬리는것이 반드시 있을수밖에 없는데 홍수 이전의 모든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그 영혼을 거부하고, 거슬러가며 관계 서열에 초점을 맞추고 살려고 했기에 신이 "이제는 내 영이 사람과 다투지 않겠다. 그러나 사람의 수명이 120년이 될것"라고 말하며 사람의 양심, 영혼의 분량을 아주 크게 거두어갔다.


하늘의 궁창이 사라지고 땅 속 샘들이 터져나와 물에 의해서 사람과 땅이 모두 멸망하였는데 이후 지구를 덮던 물의 막과 같은 궁창이 사라짐으로 인해 사람의 수명은 1000년에서 60~80년 정도로 크게 줄어들었다. 그 줄어들은만큼 인간은 생기를 잃고 움직임을 상실하고 지성을 잃고 자아가 희미해지고 영혼이 미약해져, 이제는 스스로 사물과 현상을 재판할수조차 없게되었고 형식에 의해 시스템적으로 간접적으로 다스림받으며 살게될수밖에 없게되었다. 시스템적으로 다스림받는다는 뜻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스스로 양심을 거스르자 결국 자아가 아주 미약해지거나 사라져서 신이 만든 사물들간의 본성, 틀, 형식 등에 의한 작용에 의해 지배받게 된 것이다. 겉으로는 왕과 왕국과 국가와 사회와 역사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는것 같아보이지만 그 근본 틀과 요소들은 신으로부터 만들어졌고 신과 이어져있기에 일종의 간접 지배를 당한것이다. 설령 그것이 안좋게 흘러가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지성이 낮아 책임에 대해서 밀폐되어있기 때문에 형식 그자체가 책임을 지는 구조로 생존할수 있었다. 국가가 멸망하고 집단이 멸망해도 인간 그 자체는 수천년을 이어 생존할수 있었던것이다. 그들 조상이 타인을 관계적으로 지배하려고 했으며 스스로의 양심을 계속해서 거절했으니, 그들의 후손은 지성이 크게 떨어진채 관계 속에서 지배받는것이 마땅한 재판이었다. 이 경우에도 환경이 크게 바뀌어 환경에 따라 질서가 다시 만들어졌는데 동물은 더 천하게 되어 이제는 잡아먹히는것이 허용되었고, 환경이 더 척박해짐으로 인해 여자는 더더욱더 남자에게 종속될수밖에 없었다. 동산 바깥으로 쫓겨날때에도 그렇고 홍수 이후에도 그렇고 그 시초를 만든 존재가 구조적으로 재판받게 된 것이다. 동물에 의해 사람이 그렇게 되었으니 사람이 더 아래로 떨어질때마다 그 같은 원리적으로 동물은 더 아래로 내려가게 되는것이고, 여자에 의해 남자가 그렇게 되었으니 남자가 더 아래로 떨어질때마다 그 같은 원리에 의해 여자가 더 아래로 내려가게 된것이다.


종교적으로 봤을때, 현대적인 철학과 민주주의라는것은 굉장히 터무니없고 허망한것이다. 그것은 감성도덕적으로는 만족감을 줄지는 몰라도 실제 역사에 비추어 본다면 신에 대한 또다른 반역이라 할수있다. 영혼을 크게 가진 인간이 죄를 지으면 그에 비례해 큰 매를 맞게되고 그 영혼의 분량이 떨어지고 권리들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 분량이 적은만큼 신의 틀 안에 종속되어 보호받을수 있다. 한마디로 동전의 크기가 줄어드는 대신 동전 아랫면 또한 크기가 줄어들기 때문에 데미지가 적어지는것이며, 종속되면 종속될수록 신의 질서에 종속된다는 뜻이다. 신의 재판은 공정하지만 그 재판의 방향성은 인간이 사는쪽으로 향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전의 크기가 적더라도, 부피가 작더라도 중심에 의해 보자면 크게 될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귀는 수명이 기껏해야 80년 정도로 줄어들은 유사인간들을 껍데기적으로, 인위적으로 올려놓았다. 수명이 적어진것도, 사람들이 고통받는것도, 여자의 위치가 낮은것도, 사람들이 왕의 지배를 받게된것도, 늘 어딘가에 종속되어야만 유지할수 있는것도, 겨울과 여름이 생긴것도, 질병들이 생긴것도 모두 근거가 있는것들인데 그 맥락을 아예 전제하지 않고 껍데기 단면 점으로만 딱 보고는 인위적으로 사물들의 위치를 설정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계속해서 악을 택한 종자들, 결국에는 뒤집혀 신에게 버림받은 종자들에게 동전 반대편의 지식의 은사들을 줘서 그들을 통해 스스로 승인한 사람들의 지성을 끌어 올려줬다. '스스로 승인한' 이라는 뜻이 무슨뜻이냐면, 올바른 지식에 대해 알면서도 마귀가 제시한것을 승인한 사람들을 뜻한다. 마귀는 동아시아나 중동이나 동남아나 아프리카 등에서 제시하지 않았다. 기독교 지식을 알고있는 유럽인들에게 제시했으며, 그 스스로 승인한 유럽인들이 세계 곳곳으로 퍼져 기독교 종교를 전파하면서 동시에 다른 민족들에게도 근대화라는 이름의 승인을 요구한것이다. 아주 교묘하고 교활한 비정형적인 방식으로 일을 진행시켰었다.


그러면 수없이 많은 죄를 저지르고 죄에 넘어져 유사인간이 된 존재들이 인위적으로 펌핑되어 다시 껍데기가 원래대로 돌아간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될까? 의도적일수록 용서받을 가능성은 낮아지며, 초점이 확실할수록 의도가 분명하기에 두번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스톨홀름 증후군과 같은 불법적인 방식을 당해 크게 떨어지거나, 어중간함과 유사함의 프랙탈 속에서 죄를 통해 서서히 갉혀나가서 결국 그릇상으로 매우 열약해졌으며 유사인종이 되었는데 껍데기 위치가 리셋되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면 그 사악함 그대로 악을 택하게 될 가능성이 무척 높을것이다. 그러면 그때에는 멸망밖에는 답이 없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방식이다. 사람을 억울하지만 껍데기 법적으로는 딱 걸쳐있게끔 떨어뜨리거나 무언가를 손해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또 이어가다가, 어중간함 속에서 속이고 또 유사하게 속이다가, 분량이 찼을때 아주 교활한 방식으로 딱 걸쳐있는 사이드에서 연결된 선들과 딱 걸쳐있는 추론능력을 근거해 어떤 반역하는것을 '개념적으로' 제시한다.(그것은 개념적인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껍데기적이다) 그러면 프랑스인들은 멋도 모르고 프랑스 왕을 단두대에다 사형시키는것이고, 다른 유럽인들도 왕을 쫓아내거나 공화정을 세우는것이다. 홍수 이후의 사람은 스스로를 재판할수 없는, 종속될수밖에 없게끔 모양지어진 존재들인데 그 존재들이 모든것에 대한 권리를 누리면서 모든것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스스로 나선것이다. 그러나 신에 의해 종속될수밖에 없게끔 정해졌기에 그들이 아무리 의식주의 메뉴얼을 많이 만들어도 계산기 부품만 더 복잡해질뿐 계산기는 계산기일뿐이다. 신에게 벗어난다면 마귀에게 지배당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소스코드 10줄이든, 200조줄이든 움직임이 없는건 없다. 움직임이 없는 존재는 외부 요인에 따라 모양지어질뿐이다. 그러니 고작 허상적인 이미지를 위해 실제 권리는 그림자 속 마귀들이 누리면서도 책임은 본인들이 지는 이상한 세태가 만들어질수밖에 없는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사회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의 모든 오류의 원인은 대다수 인간의 퀄리티가 정상이라고 가정하는데에서부터 출발한다. 퀄리티가 정상이 아닌 이유는 그들 조상이 스스로 양심을 거절했기 때문이며 지나간 사람들의 핏값에 대한 신의 재판에 의해서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애써봤자 그 사실에서 벗어날수 없다. 현대인들은 자유를 누리려고 할수록 더 관계를 추구하는데 이는 사리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함에 따른 모순적인 행동이다. 자유를 누리려고 할수록 메뉴얼을 늘리고, 자유를 누리려고 할수록 관계라는 비닐하우스 크기를 늘리고, 자유를 늘리려고 할수록 관계속에서의 작용을 통해 스스로를 설정시키거나 확인받으려고 하고, 관계 속에서 운신의 폭을 넓히려고 형식을 만들어내거나 고치려고 한다. 예를들어 분홍색이 여자의 색깔이 아니라는것을 관계속에다 설정시키면 자유가 생겨났다고 하는 그런 사고방식인것이다. 또 관계 속에서 도덕률을 정하고 올바른것을 정하려고 한다. 현대인들에게 생기가 사라지고, 자아가 사라지고, 영혼이 없어지고, 컬러나 향취가 별로 안느껴지는것은, 별 상관없어보이는 동떨어진 원인같아보이겠지만 그들이 사악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들 조상 대대로, 또 그들 인생 내내 영혼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현대적으로 잘 살려고 할수록 그 구조상 움직임이 없어야만 한다. 현대 사회에서 요구하는 도덕에 따르면 따를수록, 예를들어 모두가 평등해져야만 한다는 그런 모양을 맞추려고 하면 할수록 여러 층위에서 움직임을 포기해야만 하고 관계에게 자신이 맞춰야한다. 현대사회를 더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자연스럽게 영혼이 사라지는것은, 현대사회라는것 자체가 마귀가 만들었기 때문이며 이것에 대해 승인할수록 마귀에 대해 승인하는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잘 살수록 마귀에 대해서 승인하는것이고, 마귀에 대해서 승인할수록 사악한 행위이기에 영혼이 사라지는것은 당연하다. 기독교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과 정면으로 충돌되는 현대 사회를 승인한다는것은 신에 대해서 반역을 하겠다고 결정하는것과 다를바 없을것이다. 만약 몰랐다면 그것이 밀폐되었기에 결과에 대해 책임이 주어지지 않을것이고 거짓말을 제안한자에게 책임이 주어지게 된다. 그러나 만약 알게되었다면 밀폐되지 않았기에 행위에 따른 책임이 주어진다. 중심에 의해 봤을때는 신에 대한 반역이지만 외면적으로 봤을때는 하나의 유사한 서사에 따른 시대변화, 시대양상일뿐인 아주 교묘한 거짓말이 바로 현대사회이다. 그리고 마귀는 어떻게든 책임을 지우게 하려고 겉으로는 권위있고 공식적인 채널들을 통해 유사한 서사를 내세우면서도 사이드에서는 사물간 연결된 선과, 인터넷과, 커뮤니티와, 미디어와, 여러곳 등을 통해 제대로된 서사를 알려줘서 그 제대로된 서사에 의해 사람들에게 책임이 생기게 되게끔 하려고 할것이다


무언가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것의 위한것의 위한것들을 설명하느라 사족이 너무나도 길었고 지리멸렬하게 설명을 하였지만, 허탈씨와 당시 국뽕들이 무도무치씨의 그 글을 이해 못한것은 눈앞을 보면서 살지 않기 때문이고 양심과 영혼이 미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은 눈 앞을 보면서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대로 쭉 살다보면 저절로 신의 섭리하에 사물간 질서의 모양이 그려지겠지만, 그 홍수 이후의 모양속에서도 계속해서 죄를 짓고 또 지었기 때문에 결국 마귀의 계획이 세상에 더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에따라 많은 물질과 문명들이 세상에 세워지게 된것이다. 사람 퀄리티는 자신들의 이상에 따라갈수가 없고 정의, 도덕이라는 이유로 껍데기는 고정시켜놓아야 되니 결과에 맞추기 위한 수단들을 만들었는데 이것들이 인간의 삶을 계산기처럼 만들어놓았다. 어떤 정답인 방향을 설정하고 그 방향대로 가게 하기 위해 여러 요소들을 통제하고 컨트롤하다보니 사람이 패턴 안에 들어가버렸다. 한 방향만을 향하는 통짜 통로 속에 스스로 들어간것이다. 껍데기 도덕을 고정시켜놓느라 모든 사람이 거대한 관계속에 동일하게 들어가버렸다. 관계의 부피는 모든것을 덮어버렸고, 관계 자체가 초점으로 설정되었고, 관계 다음에 사람이 있을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러한 철학은 모든 사람들에게 스며들어서 허탈씨나 당시 국뽕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한 체제에 승인하면 할수록 움직임은 사라지게 된다. 도덕을 실현하는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마귀가 제안한것을 승인하는것이기 때문이다. 마귀가 제안한것을 승인하면 할수록 신에 대해 거스르는것이니 영혼이 사라지는것은 당연한 결과인것이다. 이 도식과 작용은 아주 교묘하게 숨겨져있기에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사족이 너무나도 길었지만 이 글을 처음 쓰게 된 동기인 원점으로 돌아가보자면, 허탈씨나 당시 국뽕들이 주장한 실리, 효율, 질서 등을 위해 관계가 구성원을 통제할수 있다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라 할수 있다. 대상을 통제하려면 대상을 소유해야만 한다. 대상에 대한 권리를 얻으려면 대상에 대해서 소유해야만 한다는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은 동등하다는 대전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대상을 소유하려면 대상에 대한 권리를 대신 져야만 한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권리를 지면서, 대상이 소유자의 계산기와도 같이 되면서 소유자는 대상으로부터 나오는 의무와 책임 또한 지게된다. 그것은 전근대 사회에서 왕이 백성을, 부모가 자식을 소유하는 그런 종류의 소유와 비슷하다. 부모가 자식을 부양해주고 지켜주는 대신 자식에 대한 권리를 얻으며 책임 또한 지게된다. 그리고 부모가 책임을 지기 위한 모든 행위는 자연스레 자식이 교육되고 사회화가 되는 길로 이어진다. 그것들은 단면적으로 봤을때 상하관계로 보일수도 있지만 권리와 의무의 합치에 의한 질서이며, 그러한 질서는 모든 사물은 가치가 동등하다는 대전제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간속에서는 불평등처럼 보여도 시간속에서는 평등한것이다. 또 질서 모형을 위해 구성원에게 의식을 강요할 필요도 없고 메뉴얼을 주입시킬 필요도 없다. 그냥 각자가 스스로 자신 중심적으로, 자신 시초적으로 살다보면 저절로 이루어지는것이다. 만약 어떤 지대 위에서 불법을 저지르고 죄를 저질렀다면 그 같은 지대에 있는 존재들이 그 죄지은 사람을 구속하거나 제재할것이다. 만약 본인은 싫지만 어떤 지대에 살고자 한다면 위장을 할수밖에 없을것이다. 그냥 나이브하게 뇌의 주름을 쫙 펴고는 아파트 CF같은 이미지대로 '착한 사람' 이미지를 생각해내고 그에 맞춰서 사는 경우는 있을수가 없다. 그런건 한국 여자들이나 망상하는것이다.


또 같은 예를 들지만, 불교 스님이나 기독교 목사님들이 삶을 살면서 만나는 이곳저곳의 모든 사람들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줘야만 한다면 삶은 노예생활이 될 것이다. 아무리 만나는 모든 사람들, 버스기사나 종업원이나 직원이나 학교 동창이나 길가는 사람이나 텔레비전에서 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무지 속에서 지옥에 간다는 관계 도덕적인 이유만으로 무조건 기도를 해준다면 그 행위의 출발 지점이 자신으로부터 나온것이 아니라 껍데기 도덕적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그 행위들은 공허하며 의미가 없을것이다. 행위가 자신으로부터 나오려면 자신에게 진실되어야만 한다. 자신에게 진실되려면 타인과 맺어지고 타인을 어떤식으로든 소유해야만 한다. 여기서 말하는 소유의 개념은 한국식 서열질서 따위가 아니다. 말하자면 자신이 '가지고있는' 그런 개념이다. 그러므로 세월호 사건때 아이들을 위해서 슬퍼하지 않는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은 익명의 형식 속에 있는 존재들이고 자신과 연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름이 붙여진 장미를 위해서는 눈물을 흘려줄수 있지만 지구에 와서 만난 장미들을 위해서는 눈물을 흘릴수 없는것과 같다. 옳은게 옳은것이라는 껍데기적이고 절대적인 관계 도덕을 근거로 슬퍼하지 않았다고 비인간적이라고 할수는 없는것이다.


남을 사랑하려면 일단 남을 소유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모든 작용에 실체와 가치가 생기기 때문이다. 정답이 정답이라는 이유로 관계속 교리에 자신을 맞춘다면 실리성이나 경제성은 있을지언정 그 모든것들은 착취가 되어버리고 가치와 실체를 잃어버린다.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타자를 소유하지 않은채 도덕을 추구한다면 결국 자신이 소비되는 모양이 된다. 다른 나라에서 화산폭발이 일어나 50조원어치 경제지원과 기술적 지원과 이것저것들을 해달라고 한다면, 비록 그것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이라 할지라도 가장 먼저 착취라고 느끼는 자신에 의해 걸릴것이다. 영혼이 있는 사람은 자유를 추구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절대적으로 옳은 관계 도덕을 하려고 해도 걸리는게 있을수밖에 없다. 옳은게 옳은게 아니며 도덕이 도덕이 아니라는것이다. 허탈씨와 당시 국뽕들은 중간단계에 있는 인간 영혼의 존재에 대해 느끼거나 알지 못하니 껍데기적으로 옳으면 그것에 맞추는게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한것이라고 본다. 안이 텅 비어있다는 소리인데 그 원인은 조상 대대로, 그들 인생 내내 양심을 거슬렀기에 그렇게 된것이다.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진실성을 가지고 자신을 시초로 살아야되는데, 만약 관계 이미지를 고정적으로 정해놓고 사람이 그에 맞추게 한다면 소유는 사라지고 소비만 남게될것이다. 소유가 있어야만이 그것이 뿌리로 이어지고 축적이 되고 순환이 되는것인데 이 인간 본연의 당연한 욕구를 단면 껍데기 도덕을 근거로 못난 행위로 단정짓고 못하게 막아버렸으니, 외부 이미지에 대한 고려에 의해 틀이 정해진 그 환경 속에서는 인간에 대해서 오로지 소비만 있게되는것이다. 인간 본연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관계로부터 출발하여 껍데기적으로 동등하게 모든것을 고정시켜놓으면 국가도, 사람도, 모든것들이 소비품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사물의 고유성과 절대성은 사라지고 여러 상대적인것들중 하나인 상품처럼 되어버린다. 또 자신에 대해 진실된 고유의 움직임이 나와야지 사물간의 질서가 제대로 잡히는것인데, 그것을 관계적인 규율로 제한하고 통제하면 온갖 모순들이 일어날수밖에 없다. 아주 대표적인 예로는 국제 사회에서의 일한관계가 있다. 그 모든 모순의 원인은 노예가 되어야만 하는 존재를 껍데기적으로 통일시켰기 떄문이다.


어떤 개념을 표현하려고 중구난방으로 산만하게 말들을 많이 했지만 아무튼 내 생각은 그렇다. 만약에 사물의 껍데기를 먼저 정해놓고 움직임의 방향을 제한한다면, 저 링크의 글에 달린 허탈씨의 댓글처럼 정답이 정답이라는 이유만으로 껍데기를 먼저 정하고 사물들을 그에 맞춘다면, 그 모든 삶은 선악과가 없는 에덴동산과도 같게될것이다. 홀로그램처럼 되는것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먼저 주어져야만 하는데, 근본적인 자유가 주어지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현대시대나 현대시대에서 유지되는 모형들(예를들어 인종, 성별, 계층, 국가간의 평등)의 그림자는 흐트러지고 사그라들 것이다. 그림자라는것은 사물에 따라 모양지어지는것이다. 외부의 어떤 요소에 따라 피동적으로 만들어지는것이며, 인위적으로 계속해서 그 공간속에서 끊임없이 유지시켜줘야되는것이다. 물질 문명으로 여러 요소들을 통제해서 하나의 거대한 패턴을 만들어낸 이 시대는 영혼으로부터 나온 '표현'이 아니라 어떤 이미지를 '흉내'내는 그림자같은 시대이다. 자신이 먼저 있고 작용으로 나타나는게 아니라 온갖 실리 도덕적 이유로 결과를 정한다음 그 먼저 정한 결과에 의해 자신이 허락받는 그런 시대인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시대에서는 모든 구성원이 다같이 받은 권리에 의해 다같이 책임을 진다. 한마디로 자유는 없는데 의무만 있는것이다. 이는 한국의 태극기처럼 거꾸로 돌아가며 정반대로 뒤집혀있는것에 비유할수 있다. 무도무치씨가 '자유는 주어지는게 아니라 그냥 있는것'이라고 했는데, 만약 그 전제가 이루어진다면 현대시대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게될것이다. 여담이지만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하는것도 인간에 대한 진짜 이해가 없기 때문에 나온 이론들이라 생각한다. 구조상 밀폐되지 않았다면 책임이 주어지게 되는식으로 접근해야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점으로서의 존재이기도 하지만 선으로서의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악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것은 조상 대대로 선택한 그 결과에 따른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점으로서의 대상이 설령 악한 성향을 가졌어도, 그에게는 분명 책임을 생기게끔 해주는 양심이라는게 바늘귀만큼이라도 있긴 있기에 책임이 생길수밖에 없다. 만약 완전한 통짜 구조로 되어있다면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을것이다. 계산기나 다름없기 떄문이다. 한마디로 관점을 다르게 봐야된다는 소리이다


온갖 주변 이민족들의 강도질로 인해 욥의 모든것이 약탈당하고 종들이 살해당해 큰 고통을 받았을때 욥과 그의 친구들은 그 일이 벌어진 원인이 어떠한지에 대해 논했었다. 만약 현대인들이었다면 징병제 시스템과 국경 방어 시스템과 여러 제도적 장치 등의 측면으로 접근했을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라는것은 여러 보이지 않는 크고작은 원인들에 의해 임계점이 쌓이다가 어떤 예상치 못한 결과로 나오기 때문에 호스를 아무리 손으로 틀어막으려고 해도 근원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자연과학에서도 작은 원인과 현상들이 쌓여 큰 필연적인 결과로 이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껍데기 시스템적인 고찰보다는 더 근본적인 고찰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신은 뭐라고 했을까? 신은 자신의 전능함과 세상의 오묘한 이치에 대해서 말했을뿐이다. 한마디로 욥의 그 책은 어떤 지식에 대한 습득보다는 사람의 근본된 자세에 대한 교훈을 위해 만들어진것이다. 어떤 메뉴얼이나 시스템을 학습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게 아니라 눈 앞을 보게끔 만들어진 사람의 근본 태도, 신에 대한 자세에 대해 알려주기 위함이었다는것이다. 만약 현대인들의 철학대로 신이 사람을 만들었을때 수만가지 법률과 메뉴얼이 적힌 대명률, 사서삼경, 10주완성 메뉴얼같은 책을 같이 주었다면 사람의 삶 자체가 의미없고 덧없어졌을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설령 정답이라 할지라도 그로인해 방향이 고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럴바에는 아예 애초에 태어날때부터 세상 만물의 지식을 가지게 했을것이다. 또 그럴바에는 모든 사람들을 아름답고 잘생긴 사람으로만 최적화 시켜 만들었을것이고, 그럴바에는 모든 존재들의 불필요한 상호작용 수단을 고쳤을것이다. 그렇게 계속 나가다 나가다보면 모든 존재는 안개처럼 모든곳에 편재되어있는 클라우드 군집체같은 존재가 되는것이고 공허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경제성, 효율성, 실리성 등의 철학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면 애초에 피조물을 만들 이유 자체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므로 사물의 실체와 가치는 껍데기에 의해 생기는것이 아니라 작용속에서 생긴다고 할 수 있다. 각각이 독립되어야만 하고 개인-세상의 이중 구조로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양심을 기반으로 하는 그 작용에 의해 그 사물의 실체와 가치가 증거된다. 만약 그 움직임, 즉 영혼을 거절한다면 그 존재는 계산기처럼 될 뿐이다.


허탈씨가 "국가가 질서를 위해 구성원들을 통제할수 있다"라고 한 주장은 아주 공허한 주장이다. 그렇게 메뉴얼, 시스템, 요소들을 통제해가며 사물을 특정 방향으로만 가게하는 밀폐된 통짜로 모양짓는다면 관계적으로는 이득을 얻을수 있을지 몰라도 거기에는 어떤 자유도 없을것이다. 자유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결과는 허상이 되고 실체가 없어진다. 영국의 철학자 밀이 '자신이 직접 습득하지 않는 지식은 쓸모없는 지식'이라는 말을 했다던데 아마 그 사람의 관점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싶다.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것은 설령 껍데기가 완성되었어도 그것에는 가치가 없다.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세상이 아무리 좋게 흘러가고, 설령 그 세상에 살아있는 존재들로 가득차있더라도, 나 자신의 입장에서 그 세상은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자신으로부터 삶이 구성되려면 자신에 대해서 진실되어야만 하는데, 자신에 대해서 진실된 인간은 양심과 영혼이 표현될수밖에 없다. 가치와 실체가 만들어지면 만들어질수록 더 양심적이게 되고 질서가 유지되며 각각의 고유의 개성이 드러난다. 관계를 시초로 사람이 구성되면 사람은 공산품처럼 '여러 상대적인것들중 하나'가 되지만, 자신을 시초로 삶이 구성되면 각각의 사람은 고유한 존재가 되며 '절대적인 하나'가 된다. 또 자신에 대해서 진실될수록 사물의 중심을 보게되기 때문에 타인을 관계속에서 판단하지 않게 된다. 한마디로 모든 좋은것은 하나의 같은 구조에 의해 다같이 딸려온다는것이다. 사람은 나 자신으로부터 사는 존재라서 자신에 대해 진실되지 않는데 취사선택해가며 타인을 신뢰할수 없다. 또, 같은 원리로 타인을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에 대해서 진실될수 없다. 자신에 대해서 진실될수록 남에 대해서도 진실되게 대하는것이다. 사람이 선한것과 움직임을 갖는것은 같이 딸려오기 때문에, 자유인일수록 사물에 대해 재판하는 능력이 생기며 그로인해 질서는 알아서 따라온다. 질서가 유지되지 않을 정도로 구성원들의 퀄리티가 낮다면, 그것은 원인이 아니라 원인에 의한 결과이며 그 진짜 원인은 이전의 양심을 저버린 행위들 때문이다. 관계적인 이득을 위해 자신을 내버렸기 때문이다. 그 경우, 관계에 종속되어 관계 아래에 위치하게 되는것은 당연한 순리인것이다. 그걸 억지로 껍데기적으로 맞추다보니까 세상에 온갖 모순들이 벌어지는것이고, 허탈씨같은 철학이 세상에 공유되는것이다. 내가 어떤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온갖 중구난방의 이야기들을 얘기했지만 어찌되었든 내 생각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