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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길. 용준의 양 손에는 '톰 브라운', '발렌시아가' 등 명품 종이백으로 가득했다. 

그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선물로 받은 옷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휑하고 낡은 옷장이 한결 풍성해지긴 했지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용준은 유독 눈에 띄는 맨투맨 하나를 꺼내 가격을 슬쩍 살펴본다.

가격표에는 '발렌시아가' 상표와 '721,000₩'이라는 숫자가 함께 쓰여있었다.

용준은 맨투맨을 도로 옷장에 걸어놓으며 중얼거렸다.


"옷 하나가 세탁기 한 대네. 못 입겠다."


승연은 옷장에 옷을 하나씩 걸어놓는다. 그 와중에 마음에 드는 옷음 하나씩 걸쳐보며 미리 스타일을 짜둔다.

전신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은 옷 때문인 것인지 아니면 스타일 때문인지 중학생보단 앳된 대학생에 더 가까워보인다.

그는 새로 맞춘 하금테 안경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혼잣말을 한다.


"확실히 안경을 쓰니까 조금 나이들어보이긴 하는구나."


승연은 침대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침대 위에 피곤한 몸을 눕힌다. 

그는 주머니에서 폴더폰을 꺼내 주소록을 킨다. 서른명도 안되는 주소록에서 용준의 전화번호를 찾는 것은 금방이었다.

승연은 전화버튼에 엄지손가락을 가져다놓지만, 무슨 생각인지 누르는 것을 그만두고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낸다.

그리고 똑같이 주소록에 들어가 두 핸드폰에 저장된 전화번호 갯수를 비교한다.

폴더폰은 금방 끝나지만, 스마트폰의 주소록은 한참 남아 내려도 끝이 나오질 않는다. 

이 때, 그의 눈에 '망할새끼'라 저장된 전화번호가 들어온다.


승연은 '망할새끼'의 전화번호를 확인하더니 조심스럽게 전화버튼을 누른다.

곧 스마트폰의 화면이 바뀌면서 상대방 핸드폰의 벨소리가 방 가득히 울려퍼진다.

이윽고 익숙하지만 조금은 앳된 목소리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승연은 상대가 전화를 받자 깜짝 놀라며, 스마트폰을 얼굴에 떨어트린다.

스마트폰 너머 목소리의 주인공은 승연의 전화번호가 낯선지 "누구세요?"를 되반복한다.

승연은 스마트폰에 맞은 부분을 한 손으로 감싸며, 전화를 받는다.

상대방의 질문에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린다.


"혹시 김원철씨 핸드폰 맞나요?"

"네, 제가 김원철인데요."


상대방이 확인되자, 승연은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버린다.

곧바로 전화가 다시 오지만 승연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저 떨떠름한 표정으로 진동이 울리는 스마트폰만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



추운 겨울이었다. 승연이 교실로 들어오자, 먼저 들어와있던 아이들이 승연을 보고 수군거린다.

무슨 일이지. 승연은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티내지 않지만, 먼저 긴장한다. 아이들이 옆을 살짝 지나가기만해도 움츠러든다.

그리고 그가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띈 것은 메마른 흰 국화 한 송이였다.


승연은 눈을 떴다. 악몽이라면 악몽이었다.

그는 부엌으로 나와 냉수를 벌컥벌컥 마신다. 그리고 담배를 꺼내 한 대 깨문다.

라이터 지피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허공으로 퍼진다. 

그는 복층 발코니로 나와 멀리 보이는 북한산을 등지고 펼쳐지는 아침 석양을 가만히 바라본다.


용준은 현관문을 닫고 밖으로 나온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동안, 그의 핸드폰이 바지주머니에서 울린다.

용준은 핸드폰 폴더를 열어 발신자를 확인한다. 승연이었다.


"여보세요."

"어디야."

"나 지금 엘리베이터 타려고."

"빨리 나와. 추워."


곧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용준은 살짝 놀라며 승연에게 되묻는다.


"어딘데. 우리 집 앞이라고?"


용준이 놀란 목소리로 대답하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자, 곧 문이 닫힌다.

승연은 용준이 나올 때까지 스마트폰으로 '애니팡'을 하며 지루한 시간을 때운다.

곧 시간초과로 게임이 끝나지만 점수기록이 따로 되지 않는다. 승연은 어이없다며 중얼거린다.


"게임은 되는데, 스코어 등록이 안되는 건 뭐야. 이것도 시대가 달라서 그런가."


그는 '애니팡'을 종료하고 스마트폰을 패딩조끼 주머니 속에 넣는다. 

곧 찬바람이 불자 몸이 으슬으슬한 것인지 양팔을 꽉 끼고 괜히 허공을 바라본다.


"많이 기다렸지."


승연은 용준의 목소리에 옆을 돌아본다. 다시보니 적당히 줄인 바지와 와이셔츠 위에 걸쳐입은 후드티가 나쁘지않은 패션센스다.

한편, 용준은 승연을 보더니 하루아침만에 달라진 모습에 신기하면서도 걱정된다는 표정이다.


"너 학생부한테 걸릴 것 같은데."

"괜찮아. 까짓거 벌점 좀 받으면 되지."

"벌점 받기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용준이 승연의 옆에 달라붙어 묻는다.

승연이 어색하게 웃으며 되묻는다.


"내가 그랬나."


용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과거에 승연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다.


"응. 벌점 받는 건 일진이나 정말 자기가 잘못···."

"아냐. 옷 때문에 벌점 받는 게 이상한거지. 그리고 살면서 한, 두번 받을수도 있는거고."


승연은 용준의 말을 재빨리 자른다. 용준은 승연의 변한 태도에 살짝 놀라더니 이내 씨익 웃으며 먼저가는 그의 뒤를 바짝 쫒아간다.

그리고 와이셔츠에 검정색 패딩조끼만 걸친 승연에게 춥지않냐 물어본다.


"근데 그렇게 입으면 안 추워?"

"춥지. 근데 그게 패션이야."



···



교실 문이 드르륵 열리고 승연과 용준이 들어온다. 먼저 들어온 아이들이 승연을 복장을 보고 신기하게 쳐다본다.

그러나 승연은 아이들이 어떻게보든 아랑곳하지않고 가방을 책상에 걸어놓으며 수업준비를 한다.

이 때, 한 아이가 다가와 승연에게 묻는다.


"홍승연. 너 학생부한테 안 걸렸냐?"

"다 안걸리는 방법이 있지."


승연은 피식 웃는다. 그리고 창밖 나무에 가려진 담장을 슬쩍 내려다본다.

다시 하루가 시작됐다. 반장은 시간이되자 아이들의 출석을 부른다. 담임교사가 들어오자 대표로 아침인사를 한다.

담임교사는 아이들과 만담을 나누며 아침조회를 나눈다. 걔중에는 짖굳은 장난을 치는 아이도 있지만, 담임교사는 유연하게 넘어간다.

담임교사가 앞줄에 앉아있는 아이들을 보던 중 승연과 눈이 마주친다.

어제만해도 머리가 덥수룩하고 안경을 안끼고 있던 승연은 가르마펌을 하고 하부가 금테인 하금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승연이 안경꼈네? 눈이 나빠졌나보구나."

"아, 네. 좀 안좋아져서요."

"머리스타일도 좀 달라졌네. 인물이 확 산다."

"감사합니다."


담임교사는 "그래." 말하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띈다.

그녀는 나가기 전 공지사항 몇 개를 전달한다. 아이들은 일제히 "네." 대답하지만 몇 명은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도 한다.

곧 아침조회시간을 마치는 동시에 쉬는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담임교사는 "오늘하루도 열심히 하자." 말을 남기고 교실을 떠난다.

그녀가 떠나자 교실은 순식간에 왁자지껄 시끄러워진다.


10분 남짓한 시간, 한 무리의 남자아이들이 승연과 용준의 책상으로 모여든다.

명찰에 '오종우'라 쓰여있는 아이는 매마르고 순한 인상에 플라스틱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또 다른 한 명, '김종석'은 곱슬머리였으며 얼핏 배우 이민기를 닮은 얼굴이었지만, 잠깐이었다.

마지막으로 '임재현'은 소심해보이는 평범한 아이였다.


사실, 승연의 기억 속에 이 세 명은 제대로 남아있지도 않았다.

용준처럼 그나마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떻게 친해졌는지 또 어떻게 서먹해졌는지 잊어먹은지 오래였다.

곁에 남아있든, 남아있지않든 아쉬울 것 없는 사람들이었다.

종우가 승연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처음보는 안경인데. 이런 건 얼마나 해."

"어, 이거···."


승연이 과거 회상에 휩쓸려 넋 나간 채 대답하려하자, 용준이 옆에서 거든다.


"안경이 다 거기서 거기지. 얼마나 하겠냐."

"그렇긴 하지. 그냥 처음보는 안경이라 궁금해서."


종우가 용준의 말에 무안해하며 납득한다. 

승연은 용준의 태도에 흠칫 놀라면서도 티나지않게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책상 아래로 손을 넣어 다른 아이들 눈에 보이지않게 용준을 향해 엄지를 치켜든다.

용준도 승연이 보내주는 메시지를 보곤 베시시 웃는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승연은 기지재를 쫙 피며 하품한다.

그리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용준을 손가락으로 톡 치며 밥 먹으러 가자 말한다.

승연이 용준에게 밥 먹으러 가자는 것이 처음인 것이었는지, 용준은 당황스러워하며 승연에게 되묻는다.


"어? 뭐라고?"

"밥 먹으러 가자니깐."

"근데 너 애니메이션부 얘들이랑 먹잖아."


용준의 대답에 승연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딱 잘라 말한다.


"예전엔 그랬지. 근데 오늘부턴 걔네랑 안 먹어."


승연은 복도로 나오며 자신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용준에게 크게 소리친다.


"빨리나와. 나 배고파."


그제야 용준은 "알았어." 대답하고 떨떠름하게 일어나 승연의 뒤를 따라나선다.



···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