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1월 18일 충남 아산시 모종동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그 남자아이의 이름은 최희승, 그는 어렸을 때부터 조용한 아이였다. 그의 가족은 충남에서 상경했는데, 최희승은 서울에서도 여전히 말 없는 조용한 아이였다. 그의 가족은 그런 희승의 모습을 보며, 여러 걱정을 하며 하루하루 보내고 있었다. 그는 길게 말하지 않았고, 부모가 불러도 대답은 "네, 응"이 전부였다. 그러다, 희승이 9살이 되던 해, 부모는 희승과 그의 누나를 위해 논의했다. "아무래도, 여기서 기르는 건 보다는 좋은 환경에서 기르는 게 좋지." 희승의 아버지가 먼저 운을 띄웠다. 그러자, 희승의 어머니는 "아무리 그래도, 내 나라에서 기르는 게 낫지 어떻게 외국에서 기르는 게 나아요. 같은 한국인끼리 통하고 하는 거지."라고 답했다. 그러자 희승의 외삼촌이 갑자기 끼어들며, "누나. 이번 일은 매형 말씀이 무조건 옳아! 희승이 좀 봐, 걔가 "네, 응" 말고 말하는 거 봤어? 희승이도 더 넓은 세상으로 가서, 많은 사람을 만나야 더 활발해질 거 아니야! 매형, 더 얘기할 거 없어요. 무조건 가야 합니다."라며 역정을 내었다. 그러자, 희승의 아버지는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그래, 우리 희승이도 생각해야지. 희승이, 지금 이대로 두면 안 돼. 더 많은 사람들이랑 만나며 제대로 된 인간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그의 외삼촌은 쉬지 않고 또 거들었다. "누나. 엄마도 희승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맨날 희승이 저래 조용해서 어쩌냐, 남자애가 당당하게 말을 해야지 어떡하냐. 계속 그러셔, 진짜 희승이 저대로 내버려 둘거야?" 희승의 어머니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야! 다들 말하는 거 들어보니깐 나를 무슨 나쁜 년으로 보는데, 내가 괜히 반대했어? 타향살이가 편해? 난 그저 내 자식이 외국에서 힘들어하지 않고, 내 나라에서 편히 사는 걸 원했는데, 그게 문제냐고!" 희승의 아버지가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내가 당신 심정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처남 말도 옳아. 솔직히 말해서, 지금 희승이, 문제야. 우리가 해결해야 해. 우리는 할 수 있어. 게다가 희승이도 가서 많은 친구들 만나면 나아질 거야. 우리 미국 가자. 가서, 우리 자식들 잘 키우자." 희승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들은 미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희승의 누이인 희경은 미국으로 떠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신이 났다. 한편, 희승은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아, 그래요? 알겠어요."라는 한마디가 다였다, 이를 본 희승의 부모는 꼭 미국에서는 아이를 잘 키우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1992년, 그렇게 희승의 가족은 미국으로 떠났다.

*이 글은 2007년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 조승희의 이야기를 일부 각색한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