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예전에 어떤 학교 선배가 술자리에서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살면서 가장 처음 겪게 되는, 가족들과 같이 사는 삶은 암묵적인 동조로 이루어 진다. 자신의 생활 양식은 이 때 정해지게 되고, 형제 자매간의 사소한 다툼과 부모님과의 조율로 사는 방식이 굳어져 나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둥지를 떠나 자신만의 날갯짓을 시작해야 될 시기가 오게 된다. 필요에 따라 혼자서, 혹은 다른 누군가와 살게 되는 그 시점에서, 자기도 몰랐던 부분을 자기 스스로가 깨닫게 된다. 집안의 먼지가 어느 정도까지 허용범위인지, 그리고 옷을 정리하는 방식이라든가, 아니면 냉장고를 이용하는 방식 등등.

 

 이렇게 굳어진 사람들이 만나 같은 생활 공간을 이용하게 되는 것이 동거라는 것이다. 당연히 처음에야 좋은 취지로 서로 나는 이런게 좋다느니, 어떤 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말로 입장을 맞춰 보지만, 적어도 20년이 넘게 살아온 방식을 한 두마디로 모두 표현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분명히 맞지 않는 부분은 존재하게 되고, 그것을 맞춰가는 방법으로서 자신이 얼마까지 굽힐 수 있는지, 혹은 자신이 어느 정도 선까지만 용인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이성과의 동거라면 더욱 문제가 심각해진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성과의 동거를 시작했다는 것은 이 둘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전제가 깔린다. 같이 있으면 좋고, 같은 침대에 누웠다가 서로 졸음 섞인 행복한 아침인사로 하루를 시작하는 행복한 상상을 꿈꾸며 둘만의 보금자리를 꾸미게 된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엄연히 다른 생물체라는 말도 있듯이, 이 둘의 공통분모를 구하는 과정은 동성끼리의 절차보다 훨씬 복잡하다. 여기에 '사랑' 이라는 변수도 끼어든다. 내가 지금 어디까지 양보하는 것이 맞는지 말을 하는 과정에서, 사랑이라는 중화제는 쓴 소리를 조금 더 순하게 만들어 준다. 이러면서 생기는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자신의 몫으로 돌아간다. 아니면 완전히 반대의 경우도 있다. 사랑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이 할 말만을 내뱉다가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런 경우는 서로간의 차이를 확인하며 화해하고 더욱 사이가 좋아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에게 인생의 무엇인가를 그렇게 설파하던 학교 선배는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더 이상 술을 마시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아마도, 동거를 통해 방금 이야기했던 것마냥 더욱 사이가 좋아진 것이 아니라 그냥 거기까지인 사이가 되어 버렸던 듯 하다.

 

 내가 지금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냐고?

 

 동성간의 동거, 애인과의 동거 이런 것들은 모두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평범한 일일 뿐. 이 모든 것을 씹어 먹어버릴 아무도 하지 못할 경험, 외계인과의 동거가 지금 내 앞길에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 하나로,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들 중 하나였을 나, 성민재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아니, 도대체 외계인과의 생활 양식의 교감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아는 사람이 있나?

 

 윌 스X스 아저씨한테 물어봐야 되나?

 

 그것도 말이라도 통하면 어떻게든 맞춰보겠는데, 이 아이가 갖고 있는 번역기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학습 기능이 있다고 말은 했지만, 말 알아듣는 수준이 한국어학당 딱 1달 다닌 외국인의 느낌이다. 이런 아이하고 무엇인가를 맞춰 간다는 것은, 마치 영유아교육을 하는 것과 딱히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지금, 내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만 해도 그렇다.

 

 

 

 대한민국의 하늘에는 언제부턴가 구멍이 난 듯 하다. 하루 걸러 하루씩,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끕끕한 날씨가 계속 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나와 리돌의 사이에도 끕끕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딱히 기후 때문은 아니다. 집 안에는 에어컨이 쌩쌩 돌아가고 있으니까. 이 녀석과 나의 사이에는 침묵과, 밥과 반찬이 놓여 있는 책상이 가로막고 있다. 그 한쪽 끝에서, 나는 기분이 심히 좋지 않다는 표정으로 리돌을 노려 보고 있다. 그리고 이 녀석은 뭐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표정으로 그대로 응수하고 있는 중이다.

 

 뭐, 인정할 건 인정한다. 근 며칠, 이 녀석에게 집에 있는 인스턴트 음식과 차려 놓았던 국과 반찬을 먹이다가, 오늘은 이 녀석의 앞에 전형적인 대한민국 자취인의 반찬 1,2,3 만 갖다 내어준 것이다. 김치, 김, 참치. 지금 집에 따로 차린 반찬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일단 저녁상은 집에 있는 것만으로 차린 것이다. 리돌은 아무 말 없이 반찬을 보다, 포크를 들어 밥과 참치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민재, 오늘의 음식은 맛이 없습니다."

 

 하얀 머리의 달소녀는 자신이 생각한 것을 여과없이 내뱉은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밖에서 파는 음식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너를 위해서 음식을 해 준 경우라면 이의를 달지 말고 그냥 맛있게 먹으라고. 백 번 맞는 말이다. 자기가 차린것도 아닌 밥상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불청객 아가씨는 내가 차려준 음식에 직설적인 비평을 가하고 있다. 물론, 친구네 집에 와서 술마시면서 놀다 다음날 아침에 이런 밥상이 나오면, 나라도 저런 썩은 표정이 나올 수도 있겠다. 그런데 여기에는 오류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지금 이것은 해장을 위한 아침밥이 아니다.

 

 둘째, 내 눈 앞에 이 하얀 것은 내 친구가 아니다.

 

 결정적으로 셋째, 지금 저 대사는 밥을 두 공기째 먹는 사람이 할 것이 아니다.

 

 아니, 뭐 먹을 때 마다 걸신들린 듯이 처먹으면서, 무슨 자기가 음식평론가라도 되는 마냥, 맛에 대해서 비평은 왜 붙이는데? 응? 아예 이래 보시지? 밥을 딱 한 숟가락 들고서는 쌀은 추청이어야 되고 속리산에서 가져온 약수로 크기가 다른 밥알을 한 톨 한 톨 골라서 지어낸 최고의 쌀밥을 대령하라고?

 

 자, 일단은 참자. 참아. 지금 이 아이는 외국인도 아니고 외계인이다. 얘네는 음식이 맛이 없으면 직접적으로 집주인한테 이야기하는 게 예의일 수도 있잖아? 물론 내 상식선에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한데, 일단은 대한민국의 예의라는 것은 알려주고 화를 내야 맞는 거겠지?

 

 나는 내 눈 앞의 소녀에게 대화를 시도하였다. '버르장머리'를 뜯어 고치기 위해.

 

 "저기, 리돌아."

 

 "네, 민재."

 

 "내가 밥상을 부실하게 차린 건 맞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말야, 차려준 사람한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무례한 일이야. 알겠어? 다음 번에는 너가 차린 게 아니면 그냥 입 닫고 맛있게 먹으면 돼. 응?"

 

 리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맛도 없는 맛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까?"

 

 "그러니까, 반찬 투정은 너가 뭐라도 벌어 오고 나서 하는 거야. 응? 내가 지금 니 식모도 아니고 밥 차려주면서 맛 없다는 땡깡을 들어야 겠냐?"

 

 리돌은 다시 번역기를 톡톡 조정하고서는, 고개를 끄덕여 대충 나의 요구에 대답하고서는 다시 밥을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나도 한숨을 쉬며 다시 밥숟가락을 들었다.

 

 근 며칠 간,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냥 내가 무언가 조정할 상황이 있으면, 이야기를 꺼내고, 대충 대답이 나오는. 아까 말한 생활 양식을 맞추고 어쩌고 할 필요는, 우리 둘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었다. 이 녀석이 나한테 무언가를 주장할 수가 없으니까. 나는 일을 나가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 하루 종일 독서실이나 스터디를 나가 있는다. 한 마디로, 낮에는 내가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이럴 때, 일반적으로 다른 동거인이라면 집 안에 무언가 이용이라도 하게 되고, 그에 대해서 이미 입주해 있는 나의 허락을 받고 하는 과정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런데 이미 리돌은 천장을 개조해서 자기가 사는 공간을 분리해 버렸다. 그리고 그 콘크리트 바닥에서 자는 것도 개의치 않는지, 잠잘 때도 별 말이 없다. 이미 불법개조된 천장을 제외한다면, 내 방에서 이용하는 것이라고는, 식량 뿐이었다.

 

 아, 이 녀석도 단 하나, 이거 써도 되냐고 물어본 것이 있기는 하다. 바로 텔레비전. 나는 다른 것을 건드리느니 이것만 보고 있는게 낫겠다 싶어 그러라고 대답하였고, 그 결과로 나는 집에 돌아올 때 마다 내 침대 위에 앉아 멍하니 TV만을 바라보고 있는 리돌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덕분에 셋톱박스는 몇 년만에 자기 일에 최선을 다 하고 있다. 나는 그냥 밥 먹을 때 심심해서 틀어 놓은 게 전부인데. 물어보니, 내가 나가고, 돌아오는 때 까지 밥도 먹지 않고 TV만 쳐다보고 있다고 한다. 하긴, 혼자서 돌아 다니다가는 저번과 같은 꼬라지를 겪게 되겠지.

 

 지금도 그렇다. 밥을 다 먹자, 다시 리돌의 눈은 자연스럽게 TV로 고정되었다. 내가 밥그릇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도중에도 전혀 미동도 없이 TV에 고정된 시선. 그야말로 잉여인간이여, 잉여인간.


 나는 설거지를 하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TV 재미있냐? 아주 눈을 못 떼는구만?"

 

 "재미 없어. 이것은 지구의 문화를 연구하는 필연적인 선택입니다."

 

 설득력 없는 설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아, 지구의 문화를 연구한다고? 정말 좋은 문화 연구교재로구나."

 

 지금 리돌이 틀어 놓은 채널에서는 하늘을 날아다니고 레이저를 쏘고 방패를 던지는 슈퍼 히어로물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무슨 문화 연구에 필요한 거지? 정의는 승리한다?


 리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처음에는 지구의 과학 기술이 이런 식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여지는 것은 달에 있는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래, 너 날아 다니는 것만 봐도 비슷해 보이기는 한다."

 

 "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떠 다니는 장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살 곳이 몇 군데밖에 없기 때문에 부양 장치가 필요합니다."

 

 "아, 맞다. 달. 너 달에 돌아가야 된다고 그러지 않았냐? 지금 이렇게 TV만 보고 있어도 돼?"

 

 솔직히, 최대한 빨리 좀 나갔으면 하는 심정이긴 하다. 리돌은 TV에서 눈도 떼지 않고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캐롤라인은 말했습니다. 기다리면, 그녀는 당신을 위해 그것을 할 것입니다 라고."

 

 "내가 볼 때는 그 아줌마 믿으면 안 될것 같은데. 지금 너 여기 던져두고 한 번도 안 왔잖아?"

 

 그렇다. 처음에 이 소녀를 우리집에 던지고 간 장본인인 그 외국인 영어강사는 지금까지 한 번도 우리집에 들른 적이 없었다. 무슨 돈까지 줘 가면서 부양을 하겠네 어쩌네 하더니, 그렇게 도망가 놓더니 전혀 인기척도 없다. 그 때 책상 앞에 놓아 두었던 돈도, 언제 갖고 갔는지 싹 사라져 있었다.

 

 "어쩌면 곧 돌아올 것입니다. 내가 그녀를 방문하지 않았다면, 나는 여기로 오기로 결심했다."

 

 "뭐래."

 

 이제는 저런 어법에 맞지 않는 대사에 일일이 말대꾸하기도 귀찮다. 못 알아 듣는 말은 못 알아 듣는 채로 내비둬도,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해도 사실 대화에 크게 지장은 없다. 어차피 생각해 보면 내가 하는 말도 쟤가 백퍼센트 알아듣지 못할 텐데, 뭐.

 설거지를 끝내고,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시원한 찬바람만이 박스 안에서 흘러 나왔고, 김치 이외에 다른 음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먹는 입이 두 배가 되다 보니 원래 생각했던 양 보다 훨씬 더 빨리 소모가 된 것 같다. 나는 한숨을 쉬며, TV에서 눈을 뗄 생각이 없는 그녀에게 말했다.

 

 "리돌, 나 나갔다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