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씨는 어제도 좀 약주를 과하게 하신 듯 하다.  렌트카 CS 사무실에 일렬로 앉아 전화를 받고 있는 사람들. 그 중 홀로, 그 혼자 고개를 책상 위에 처박은 채 끓어오르는 속을 부여잡고 고고히 썩어가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겠다. 오늘은 할인율이 얼마나 되냐, 쿠폰이 시간이 지났는데 이거 지금 적용할 수 있는거냐, 거기 할인마트가 맞느냐 등등의 다종다양한 요구사항들을 줄줄이 풀어내시는 지고의 존재이신 고객님들의 응대를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신속, 정확하게 웃음띤 말투로 응대해야 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건만, 위대하신 고객님들이 지금 K씨의 표정을 직접 대면한다면 아무래도 오늘의 컴플레인율은 두 배로 치솟을 것 같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가 지금 식은땀을 흘리며 쥐고 있는 수화기 너머로는 그의 생동감 넘치는 고통의 순간이 전해지지 않는다. 전화기 너머로 상대방의 표정을 예측하는 것은 아무리 관심법에 통달한 재야고수라 하더라도 쉽게 넘볼 수 없는 영역이다.

 

 저런, 술기운이 다시 한 차례 K씨의 위장을 쥐어짠다. 흙빛이던 표정이 잿빛이 되어 간다. 그리고, 그와 동시의 K씨의 안에서 무언가 치밀어오르기 시작하였다. 문학적인 표현으로서의 치밀어오른다는 대부분 상실감, 분노, 희열과 같은 감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표현한다. 하지만 현재 그의 상태는 좀 더 물리적인, 말하자면 뱃속에서 자신의 것이 아닌 무언가가 정신 한 번 까딱 하면 곧바로 뛰쳐나올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 시간을 할애할 여유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목과 쇄골 중간쯤에 자꾸 그의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무언가를 저지하기 위해서, K씨는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계속해서 노려보며 침을 삼켜야 했다. 갑자기 에이리언이 생각났다. 나오지 못하게 계속 입을 다물고 있어도 결국 뚫고 나올, 그런 느낌.

 

 좋은 생각, '위장에' 좋은 생각만 하자. 다행히 지금 그는 사무실에 있고, 상상을 방해할만한 오감을 자극할 요소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일전에 K씨는 길거리에서 급작스레 이와 비슷한 상태의 숙취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근근히 참으며 가던 길을 가던 와중 지나가던 보행흡연가의 무심한 한 줄기 담배연기에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안에 있던 것을 게워내었던 것을 생각해 내었다. 우웁. 또 올라온다. 좋은 생각. 좋은 생각. 몸을 최대한 편하게 하고, 아무것도 움직이지 말자. 지금 팀장이 떨어지는 콜 응대율과 K씨를 번갈아 쳐다보며 미친놈 보듯이 하는 그 상황도, 그에게는 아무런 동요를 주지 못했다. 아니, 사실 속이 더 메스꺼워지긴 했다. 하지만 일단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무언가 수습이라도 할 거 아닌가. 이런 걸 보고 바둑에서는 '아생연후에 살타'라고 하였던가.

 

 이런 저런 생각이 바늘 찌르듯 그의 머릿속을 계속 헤집는다. 괜히 머릿속을 비웠다가는 갑자기 한 번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K씨는 생각의 끈을 놓지 않았다. 업무주의사항도 다시 외워보고, 원래는 쓰지 못하게 되어 있는 핸드폰도 한 번 만지작거려 보았다.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K씨는 계속해서 자신을 다독이며, 이 말도 안 되는 투병생활이 종료하게 되면 자신에게 꼭 응분의 포상을 내려야 겠다는 작은 소망을 품었다. 포상이라는 것이 다른 것은 아니고, 그저 점심시간에 요 회사 앞에 있는 중국집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탱글탱글한 짬뽕면발을 크게 한 젓가락 올려, 후루룩 들이키는 것이 지금까지 버텨낸 자신에 대한 치하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짬뽕을 생각하자 K씨는 속이 약간 편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에라, 내친 김에 그는 짬뽕을 먹는 생각에 집중해 보기로 하였다. 자, K씨의 상상 속에 바로 주문이 들어갔다. 주문하기가 무섭게 종업원이 짬뽕을 그의 앞에 대령하였다. 이미 몇십번은 먹어본 짬뽕이다. 이미 어떤 꾸미가 어떻게 올라가 있는지, 그는 머리 속으로 '짬뽕 한 그릇'의 형체를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었다. 이 집의 특징이라 하면 신선하고 양 많은 해산물을 들 수 있었다. 다른 배달짬뽕들은 모두 어디서 냉동 해산물 칵테일 같은 싸구려를 쓴데다 양도 적어 그 한 두개 들어있는 오징어를 씹을 때 질기고 턱이 아플 때도 있는데, 이곳에서는 삼선짬뽕에서나 볼 수 있는 소라조각이나 조기살도 아낌없이 들어가 있고 오징어도 전혀 걸리는 것 없이 부드럽게 씹히는 것이 특징이었다. K씨는 입맛을 다시면서 그 질감을 다시 한 번 음미했다. 해산물 뿐만 아니라 국물과 야채 역시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다. 야채를 불로 그슬려 국물에서 강한 불향이 나게 하는 것 역시 이 집의 풍미를 배가시키는 요인이었다. 면과 건데기를 다 먹은 다음, 그릇째로 국물을 쭈욱 들이키고, 약간 남은 야채를 젓가락으로 집어 먹는다. K씨의 머리 속에서는 이미 해장은 완전히 끝났다. 그는 억지로 삼키는 마른침이 아니라, 입에서 감도는 군침을 삼켜 목구멍으로 넘겼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그는 머리 속으로만 짬뽕을 먹었을 뿐인데, 마치 진짜로 해장을 한 것처럼 편안한 기운이 몸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위장에서 일어났던 소동이 무색하게도, 약간의 두통만이 남아 있을 뿐 뱃속은 완전히 깔끔해졌다. 계속해서 어두워지던 그의 낯빛도 굉장히 편하게 바뀌었다. 크게 한 건 이루어낸 표정과 함께, K씨는 온 몸에 힘을 빼고 의자에 파묻혔다.

 

 갑자기 그의 모니터 한 구석이 깜빡인다. 그 곳에는 10분이 넘게 전화를 받지 않은 이유를 들어야 겠다며 잠깐 자기의 자리로 와보라는 팀장의 메시지가 있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팀장의 자리에는 편해지고 있는 K씨의 표정과는 정 반대로 아수라의 표정이 되기 일보 직전의 팀장의 얼굴만이 파티션 너머로 그를 노려보고 있다. 뭐, 괜찮다. 이제는 일어나는 것도 무리가 없고, 한 소리 듣는 거야 어쩔 수 없다 라고 K씨는 생각한다. 그는 점심때 먹을 짬뽕을 다시 한 번 머리속으로 생각하며, 팀장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PS. 중국집 사장님은 개인사정으로 가게를 쉬었고, 다른 곳을 찾을 여유가 없었던 K씨는 김밥X국에서 라면을 먹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