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절은 동리 뒤편에ㅡ너무 멀리 떨어져 푸르게 보이는 산 중턱 자락에 있었다. 중턱이라고는 해도 산이 꽤 높고 가팔라 다른 산의 정상이나 다름 없는 곳이었다. 절의 이름은 청심사라 했다. 맑은 마음을 닦은 곳이라는 뜻이었으나, 마을 사람들은 그 절이 푸른 산의 깊숙한 곳에 있어 청심사라고 알고 있었다.


한 번 오르려면 마음먹고 올라야 하는 그 절의 초입인 산문 앞에 어느 소녀가 쓰러져있었다. 소녀의 옷은 낡아있었고 신은 거의 떨어져 제 기능을 못했다. 얼핏 보아도 꽤 오랫동안 떠돈 아이였다. 마침 시주를 받고 절로 향하던 젊은 별좌가 아이가 길에 누운 걸 보고 절로 데려왔다. 


소녀는 자신의 나이도 제대로 몰랐다. 다만 외모를 보아하니 대략 예닐곱살 쯤 됐겠거니ㅡ했을 뿐이었다. 아이는 어미도, 아비도 몰랐다.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지고 있는 기억은 길을 떠돌며 빌어먹었던 기억들 뿐이었다. 


아이는 머리를 밀고 절에서 지내게 되었다. 아이가 불가에 들어오던 날, 주지는 그에게 세윤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여지껏 풍진세상을 떠돌았으니 이제부터라도 부처의 세계 아래서 그의 가르침-진리를 따르는 수레바퀴가 되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아이는 마을의 남자들이 한 번씩은 마음에 품었을 직한 아름다운 소녀가 되었다. 허나 소녀는 가끔 시주받으러 마을에 내려갈 때마다 남자들이 보내는 눈빛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저 왜 저렇게 쳐다보지-하는 의문만 가질 뿐이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시주를 받고 산길을 가는 도중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사냥꾼을 보기 전까지는. 그 길로 그녀는 산길을 뛰어올라 

주지에게 갔다. 주지는 살생의 업을 진 사냥꾼을 절에 들이고 싶지 않아 했으나, 산 사람은 살려야하지 않겠느냐는 항변에 마지못해 그를 암자로 들였다.


서울 안 대갓댁에서 많은 시주가 들어와 그를 옮기러 여러 별좌들이 내려가 사람이 없었기에 그를 간호하는 건 소녀의 몫이었다. 젊은 남녀가 오랫동안 함께있으며 대화를 주고 받으니, 생기는 게 정분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소녀는 완전히 치료하고 절을 내려간 사냥꾼이 계속해서 생각이 났다. 보고싶었고 또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루종일, 동리 앞 강변에서 이리저리 내닫는 일엽편주와 같이 속절없이 흔들리고만 있었다. 가슴이 붕ㅡ 떠올라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런 건 주지가 알려준 적도 없었고 어느 경전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걸 사랑이라고 한다는 걸 소녀는 그때까지 알지 못했다.


시주를 핑계로 동리에 나아갔던 것도 그때부터였다. 우연은 필연이 되고 필연은 인연이 되었으니. 그렇게 시간은 흘러 고요한 어느 날, 부엉이만이 밤을 지키는 그 날 암자 깊은 곳에서 소녀는 여인이 되었다.


첫 몇 개월은 어떻게 숨길 수 있었으나 4개월, 5개월이 지나자 더 이상 불러오는 배를 감추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주지는 고심했다. 길고 긴 고심 끝에 그는 여인에게 머무르라고 했다. 10개월이 지나고 나온 아이는 말간 얼굴과 눈을 가진 사내아이였다. 


주지는 말했다.


"이 아이는 가진 죄가 너무나 크다. 여기 두고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일 생각 말거라."


어미 없는 설움을 알고있는 세윤은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이를 부여잡고 흐느꼈다. 그렇게 젖도 물려보지 못한 채,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떠나보내야 했다.


그녀의 죄. 그의 연인의 죄. 그 모든 죄를 그의 아이가 가져갔기에. 속세에서 살기에 아이의 죄는 너무나도 컸으므로. 세윤은 아이가 무거운 죄를 평생 이고 살아가는 것 보다 어미를 몰라도 그 죄를 없애는게 아이를 위하는 일이라 여겼다. 


떠나가기 전 세윤은 아이를 보며 말했다.


"아가. 사랑하는 내 아가 도념아. 죄 많은 어미는 또 내게 죄를 짓는구나. 죄를 씻는 날이 되거든 꼭, 꼭 어미를 찾아오렴. 내가 죽는 날까지 기도하며 널 기다리마."


수레바퀴는 부처를 벗어나 다시 속세로 들어갔다.


그렇게 14년이 흘렀다.


* * *


도념이 산문 밖으로 향하던 그때도 청심사에서는 주지의 염불과 목탁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정심이 그 소리를 가르며 말했다.


"주지스님."


주지가 외던 염불을 그치며 대답했다.


"정심이냐? 도념이에게는 길 알려주었구?"


정심이 대답했다.


"예, 스님. 헌데 도념이 더 안 잡으셔도 괜찮으십니까?"


주지가 말했다.


"잡어? 그간 그 정도로 잡았으면 되었다. 자식이 어미 찾아가는 걸 막는 것두 인륜으로 차마 못하는 일이고. 다만 빌어야겠지. 자비로우신 관세음보살이시어, 저 아이들을 굽어 살펴 주소서. 크나큰 자비로 저들의 죄를 씻어주소서."


그리 말하며 주지는 다시 목탁을 치기 시작했다.


'너희의 여남은 죄는 다 내가 짊어질테니 부디 행복하여라.'


그렇게 파계승과 그녀의 아들, 동승의 복을 빌며 주지는 염불을 외었다. 


이내 다시금 고요해진 심산 고찰에는 은은하고 깊은 종소리만이 울려 홀로 먼 길을 떠나는 어린 아이를 쓰다듬었다. 


퍽퍽하게 나리는 눈은 부처의 자비처럼 세상을 덮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