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붉은 죽음


잠시간의 상념을 끝낸 후 앞을 바라보았다. 스스로의 몸을 갈기며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그들의 주장이었고-미친 새끼들의 무리-내 생각이었다-가 두 배로 불어있었다. 그 앞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관을 몇 명이 이고 나가고 있었다. 무리의 뒤꽁무니를 서둘러 쫓아가는 노인이 힐데가르트의 유해가 이곳에 강림했다 소리쳤다. 


개소리였다. 200년 전에 죽은 빙엔의 성녀 힐데가르트가 이곳 베네치아에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교황도 주교도 공평히 죽어가는 마당에 썩어들어가는 시체 따위가 무슨 도움이 될른지. 혹여 저 관 안에 잠들어 있는 것이 진짜 빙엔의 성녀라면 무언가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겠으나, 그 안에 있는 건 두 달전에 죽은 귀족 여인에 불과했다. 교회 뒤쪽에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착각한 건지, 혹은 그냥 성녀의 시신이라고 믿고 싶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백 명에 달하는 무리의 목적지는 광장 중앙에 위치한 성당이었다. 이 저주가 끝날때 까지 신께 기도를 올린다며 성당의 문을 걸어잠갔다. 나는 곁에 있던 병사에게 지금 당장 모든 문과 창에 못질을 하고 포위하라고 명했다. 3일 뒤에 성당을 불로 태워버리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 명에 병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병사의 의문은 두 가지였다. 왜 그런 명을 했느냐, 혹은 왜 저들을 바로 처형하지 않았는가.


내가 도제와 시뇨리아에게 질병의 방지에 관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자마자 내린 명령은 다섯가지였다.


1. 발병 후 사망자는 시체는 물론 그가 머물던 집까지 소각한다.


2. 사망자의 가족 중 감염자는 마찬가지로 함께 태순다.


3. 감염되지 않은 가족이나 의심자는 공화국 외각의 포베글리아 섬에 격리시킨다. 베네치아 함대는 섬을 완전히 봉쇄한다.


4. 한 장소에 50명 이상 몰려있는 것을 금한다.


5. 외부 상선은 5일간의 격리 후에 교역할 수 있다.


이를 위반하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사형시켰다. 물론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반발하는 자들은-그들의 중심에는 베니스 총대주교가 있었다-일부러 저 수칙들을 어겼고 곧 온 몸이 썩어들어가 죽었다. 반발은 이내 수그라들었다. 그러므로 저 병사의 의문은 이것이었다. 왜 조치를 위반한 자들을 그냥 두냐는 것이었다. 간단했다. 굳이 피를 보지 않아도 죽을 이들이었으니까. 


그로부터 3일 후, 검은 연기가 성당을 뒤덮었다. 성당이 전소했음을 확인한 후 문을 열자 그 앞에 한 무더기의 시체가 쌓여있었다. 손톱이 모조리 부서진 이들이었다. 병사들의 대부분은 나를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일부는 적대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내가 죄책감을 느끼느냐ㅡ전혀.


희생자의 가족들이 원망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교황청의 성직자들이 파문으로 날 협박하는 것은 무시했다.


산 채로 구워지던 사람이 날 저주하며 뱉은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포베글리아에 버려진 시체가 그득히 쌓여 그를 태운 재가 그 작은 섬 전체를 뒤덮었을 때도 나는 담담했다.


15만에 달하던 도시 인구의 3분의 1이 단 2개월 만에 죽어나갔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사랑하는 아드리아 해의 여왕ㅡ가장 위대한 베네치아 공화국은 껍데기만 남으리라.


그런 시대였다. 살기 위하여 산 사람을 거리낌없이 불구덩이 안으로 밀어넣어야 하는 시대.


이 병이 하느님의 저주라면 그것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서로가 짐승새끼가 되어 물어 뜯어야만 비로소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라고, 나는 어떤 집에 못을 박으며 생각했다. 망치 두드리는 소리 뒤로 살려달라 애원하는 어린 소녀의 울음이 맺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