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으로 나왔을 때, 처음 맞닥뜨린 것은 마찬가지로 높은 하늘의 태양이었다. 누구나 당연히 그러하듯이, 옆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따뜻한 악수로 보답해줬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내가 본 것은 나를 둘러싼 유리벽이었다. 가시가 돋쳐 있는 유리에 얼핏 내가 비쳐 보였다. 미소를 지으려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부조리함과 고갈된 정의에 분노하려 했던 행동은 오히려 우스꽝스러웠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된 후에, 나는 의도치 않게 내게 다가오던 사람을 향해 벽을 세우고 말았다. 또 언젠가는 내게는 너무 당연했기 때문에 내 믿음대로 행동한 것을 상대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로 영원히 날 떠났다. 마찬가지로 나도 그를 이해하기 어려웠고, 무엇 때문에 꼬였는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한참 늦어 있었다. 실전적인 경험이 부족한 나는 그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불완전하고 미숙했고, 마찬가지로 사회는 책으로 배운 내 이상만큼 아름답지 못했다. 내 의식이 제대로 형성되었다고 인식했을 즈음에는 이미 기억의 기반은 실패와 절망이었다.


사람들이 모여 햇빛 아래 노래하고 춤추는 동안 혼자서 별을 바라보던 나였다. 내게 더 익숙하고 친근한 것은 경쾌한 나팔의 선율보다는 사각대며 글씨를 써내려가는 소리였고, 열정적인 땀내보다는 책 특유의 차분한 종이 냄새였다.

그 탓에 눈엣가시로 낙인찍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슬프게도 필연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리에 소속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 사회에 발을 디뎌야, 홀로 바람을 맞는 것보다는 이득이 크다. 그래서 나는 사회를 떠나지 않는다. 인정인지 체념인지, 온갖 부정적인 결과와 감정은 너무나 당연했지만, 다수에 동화되는 것은 진작에 포기했지만, 그럼에도 명목상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한 이상 견디기 어려울 만큼 아픈 것은 사실이었다.


이런 모든 일은 명시되어있지 않지만 공공연하게 통용되는 것들을 내가 몰랐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 이유로 무지는 내게 큰 공포로 다가온다. 처음에는 앎 그 자체의 기쁨을 향유하기 위해서 공부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사람들보다 모른다는 것이 수치스럽고 무섭기 때문에 더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싶었다.


오래 전에 가면을 만들었다. 숨겨도 본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을 뼈저리게 알지만, 그래도 그 누구도 나에게 상처입힐 수 없길 바랐다. 더욱이, 나 또한 더 이상 내가 소중히 하는 사람들에게 실수로 칼을 겨누고 싶지 않았다. 나의 칼은 방어하기 위해, 먼저 내 살을 찢어 피를 본 사람을 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결코 내가 먼저 인연의 실을 끊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껏 겪어봤기 때문에 서슬퍼런 칼날로부터 오는 고통이 얼마나 쓰린지 안다. 적어도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나를 잡아줌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선량하고 부드럽게 대했다.


감히 생각하건대 모든 것에는 모순과 이중성이 내재되어 있다. 개성을 버리지 말라면서도 무리와의 잡음 없는 조화를 요구, 강제하는 것이 이 사회다. 나는 그것이 소름끼치게 싫었다. 어째서 내가 명료하고 논리적이지 않은 것에 따라야 하는지 설명하는 타당한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나름 거부한 결과는, 교묘한 배척이었다. 하지만 더욱 끔찍한 것은 나도 내가 싫어하는 사회와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었다. 나는 사람을 차별대우한다. 내가 관찰한 그 상대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따라서 나는 포근한 온기가 될 수도 있고, 냉혹한 저주가 될 수도 있다. 상당히 추악해 보이지만, 아직 더 나은 방법을 찾지 못했다.


믿기 어렵지만 아직도 이런 내게 온기를 전해주는 사람이 남아있다. 나는 그것에 항상 놀라워하면서도 그만큼 두려워한다. 언제 깨져 산산조각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신중을 기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만큼 더 어색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것에 싫증이 난다면 떠나가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는다.

이미 포기해버렸다. 예전처럼 어울리기 위해 발악할 힘 따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그럴 만한 여유가 있다면 그 끈기와 열정을 내 가치를 높이는 데 쓰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생각보다 꽤나 깊다고 생각될 때, 그때서야 나는 진실되게 대한다. 내가 아무리 온화한 표정의 가면을 쓰고 있다고 하지만, 그 속에 아무리 어둠으로 얼룩진 몸뚱아리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본질적으로 악한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관계가 더 깊은 사람에게 내가 더 친절하고 정성들이는 이유는, 이 가면을 넘어서 본질적인 내가 그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1년 반 조금 덜 되게 알고 지내는 사이가 있다. 처음 만났을 때 약간 성가셔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아직 그에 대해 자세히 모름에도 불구하고 오래 보아올수록 내가 느낀 것은, 착각일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악한 것 같지는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장난스러운 행동에서 악의적인 의도를 보지 못했다. 나는 그를 믿어서, 다른 사람에게보다 더욱 선량하게 대했다. 약간 가까운 흔한 다른 사람에게 하듯이 2차적인 가면을 쓰고 거칠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 같은 사람은 극히 소수였기 때문에 나는 더 소중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내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한 결과,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들어온 만큼 내 가면은 나름 정교해졌다고 판단한다. 그럼에도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일찌감치 알아챘을 것은 당연하다. 이미 내 가면의 존재를 알아서 믿지 못한다면, 슬프지만 나로서도 별다른 수는 없다. 그냥 떠나갈 거라면 흔쾌히 보내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