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보수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돌아오셨다?”


“...네.”


 짧은 기다림. 그리고, 쯧. 제리의 눈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여자는 혀를 짧게 한번 찰 뿐, 더 길게 말을 잇지 않았다. ‘뭐지?’ 제리의 불안감은 증폭하기 시작했다. 이 일 자체가 길드를 통해서 얻은 일이 아니라 아비엔이 직접 발로 뛰어서 물어다 준 일이기는 하지만, 결국 손해보는 사람은 제리다. 지금 무엇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비엔이 약간 먼 곳을 바라보며 발을 까딱까딱하는 저 품새는 대부분 맘속에서 화를 고조시킬 때 내는 동작이다. 그리고 원래 홀마스터 아비엔은 화를 담아두는 성격이다. 지금이야 어떻게 넘어갈 수 있다손 치더라도, 당장 뭐라도 해서 화를 풀어두지 않으면 적어도 일주일간은 두고두고 이 일로 까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제리는 자신이 가진 가장 탁월하고 유일한 재능 -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제리는 앉아있던 의자를 분연히 박차고 일어나 자신이 어째서 빈 손으로 와야 했는지, 지금 왜 내 팔에 부목이 대여 있는지, 동료를 팔아먹는 모험가가 어떤 저주를 받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일장 연설을 쏟아내었다. 하지만 눈도 돌리지 않고 시큰둥하게 듣던 아비엔이 단 한번 눈짓으로 흥미를 보인 부분은 저주가 어쩌고 하는 부분이었다. 누가 들어도 그건 제리가 지어낸 부분이었으니까. 원래 음유시인의 말장난은 들어줘야 하는 법이다. 


 “...아시겠습니까? 제가 괜히 지금은 죽고 없는 키프리스를 들먹이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가 명성을 얻기 전에 전혀 유명하지 않았을 때는 그도 수많은 배신과 모략에 휩싸였다는 것을 그의 일대기에서 보았다구요. 하지만 ‘최초의, 최후의 모험가’라는 별칭과도 걸맞게,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며, 그간 보아왔던 배신을 일삼는 무리들의 말로를 모두 그의 수기에 기록해 놓았단 말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그의 저서인 ‘영혼산맥 신나룸 보고서’나, 방금 말씀드린 ‘대륙횡단기’에는 그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분명히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그의 마지막 수기 ‘바람의 만가’에는 모험에서 동료를 배반하는 일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는 일인지 적혀 있을 것입니다. 일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음유시인들의 잠언과도 같은 말로서는, ‘영원히 움직이는 바람과 여행의 신인 에라드의 저주’라고 전해지는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고들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놈은 여행 중 살짝 풀에 긁힌 상처가 치료할 수 없는 중독상태가 되어 한쪽 발을 잘라 병신이 되어버렸고, 또 어떤 놈은 갑자기 알지도 못하는 범죄에 연루되어 느닷없이 쳐들어온 제국군에 평생 감옥신세를 지게 된 경우도 있다고 하더군요 - 물론 동료를 배반하는 놈이 어떤 일인들 못하겠습니까마는 - 하여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갑자기 눈 앞으로 쇄도하는 주먹. 끝간 데 없을 것 같던 장광설은 여기까지였다. 제리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며 입을 다물었다. 눈 앞 한 뼘정도 거리에서 멈춘 주먹에서는, 집게손가락이 펼쳐져 나와 그를 가리켰다.


“제리,제리.”


고개를 저으며 부른 단 두 번의 호명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개탄, 측은함, 분노, 그리고 그 모두를 아우르는 - 

한심함.


“지금 이제 방값이 밀린지가 얼마나 됐지?”


 제리의 눈빛에는 잠시 ‘아 그거였나’ 하는 표정이 지나갔다. 홀마스터 아비엔은 그녀의 전매특허인 사람 좋아보이는 눈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 웃음의 의미가 진실한 즐거움은 아닐지라도. 평상시에 그렇게 매력적이던 큰 입으로 띄우는 그 미소의 끝에는 날이 서 있었다. 제리는 자신의 눈을 겨누는 그녀의 손가락 역시 칼날이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면서,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하... 한 달정도 됐나, 그럴걸요...?”


그를 가리키던 손가락이 두 개로 바뀌었다.


“두 달하고도 반이야.”


“헤헤, 뭐 사정 다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음유시인이라는 게 원래 고정적인 수입하고는 거리가 먼 직업 아니겠습니까? 의뢰를 구해주신 건 감사한 일이지만 이번 모험도 실패해서 저도 밥도 굶고 다녀야 할 판인데, 이번 한 번만 다시 봐 주신다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와 같이 그의 몸도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엎드려 사죄하며 아비엔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방세를 구걸하는 제리의 눈에는 비굴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다시금 그녀의 입가엔 한숨이 감돌았다. 에살론 공국의 수도 파페르 중심에 위치한 여관 ‘넘치는 술잔’에 그가 적을 둔지도 근 1년 반. 사실 방금 말한 두 달 반의 숙박비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납부가 된 상황이다. 다만 매번 연체가 될 때마다 같은 신파극을 다른 대본으로 계속하는 게 문제였다. 아비엔은 이젠 제일 처음에 제리가 방값을 밀렸을 때 말했던 어머님의 병환이 진실인지 아닌지조차 의심이 갔다. 짐짓 매정하게 발에 매달려 있는 제리를 밀듯이 걷어차며, 그녀는 구구절절한 그의 긍휼한 방랑기를 끊었다. 


“나도 알아. 안다고. 지금 그런데, 얘기하려는 건 방값을 현찰로 지불하라는 얘기가 아냐.”


 잠시 나동그라졌던 제리는, 다시 말하면 ‘방값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그녀에 말에 눈을 번뜩이며 다시 그녀의 앞으로 기어왔다.


 “그 말씀은?”


다시금 되삭이는 깊은 한숨. 


“몸으로 갚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던 아비엔의 눈가에는 다시 분노가 서리기 시작했다. 제리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길래 내려다 본 그 아래에는, 마치 곧 겁탈당할 소녀가 지을 듯한 표정과 자세로 그녀를 불안하게 쳐다보는 스물아홉먹은 남정네의 눈동자가 있었다. 아비엔은 참지 못하고 다시 발을 내질렀다 - 꾸윀.


“그런 뜻이 아니야 이 멍청아!”


“그, 그럼 뭡니까?” 제리는 약간 나간듯한 턱을 주무르며 대꾸했다.


“여관일 도우라고. 마침 내일부터 신성제국 문화사절단 단체가 우리 여관에 묵는다고 예약이 들어왔어. 아마 객실이 거의 다 차게 될 것 같아. 그렇게 되면 아마 내가 거의 식당에 묶여 있어야 될건데, 객실쪽은 좀 사람이 부족할 것 같아. 그쪽에서 일하면 될거야.”


“아, 뭐 사람 받는 거야 어렵지 않죠. 제가 또 말로는 누구든지 다 구워삶지 않습니까. 하하하. 덕분에 먹고 살고 있는 거구요.”


 방금 전까지의 태도가 무색하게도, 제리는 금세 당당한 태도로 일어나 잘난 체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제리는 예전에 방값이 며칠정도 밀렸을 때도 여기서 일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그 때의 기억이 맞으면, 평상시에는 굉장히 한가하게 일할 수 있는 것이 여관의 홀이었다. 워낙에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잦은 제리로서는 그 일이 전혀 어렵다고 느껴지지가 않았던 것이었다. 아비엔은 다시 한숨을 내쉬고서는 말을 이어갔다.


“홀만 맡기는 거면 내가 이렇게 얘기를 안 하지.”


“네?”


아비엔은 식당 구석에 있는 빗자루를 가리켰다.


“객실 청소까지 맡아서 해줘야 겠어. 청소 담당이었던 마비두가 어제부터 보이지가 않아. 방에서도 나간 흔적이 없는데, 어떻게 된건지는 잘 모르겠어. 하여튼, 홀도 맡고, 그 자리도 맡아서 좀 부탁해. 알았지?”


“아, 저기, 지금 길드에 까먹고 온 게 있는데,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혹시 압니까? 지금 가보면 새로 일이 들어와 있을지. 여관비는 제가 꼭 갚아드릴테니...”

 제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과장된 걸음걸이로 여관문을 향해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지금 같이 더운 계절에 계단을 오르내리며 객실 청소까지 맡아서 하게 된다는 것은, 거의 불지옥에 드나드는 것과도 같은 일이었다.


“지금 그 문 나가려면 지금 2층에 있는 네 짐도 다 갖고 나가라.”


 여관 문고리까지 다가간 그의 손을 붙잡는 한 마디. 그는 금세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표정으로 아비엔을 바라보았다. 


“대신에 두 일 일당 다 쳐서, 한 달만 일하면 이번달 방세까지 모두 없애줄게. 됐냐?”


“명령만 내리십쇼.”


아비엔은 또 한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