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옷들을 겹겹이 쌓아 입어도 

몸속으로 스며드는 냉기를 막아내기가 힘들었던


17년도 1월의 차디찬 겨울날의 기억인 듯 했다. 


약속시간은 9시 30분이였지만 

약속시간이 20분이나 지나가고 있음에도 버스정류장에 

지예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옷 속으로 파고드는 

날카로운 찬바람에 벌벌 떨고 있던 나에게 

그녀는 문자 한통을 남겨주지 않았다, 


어제 늦게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한 후 편의점에서 

친구 지원과 매운 닭고기 맛 볶음라면을 

5분 만에 해치웠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마도 그 후폭풍이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터져 나온 듯 했다.


그렇게 10분정도 더 기다리고 있으니 

눈 덮인 도로 사이로 새하얀 야상을 덮어쓰고 

재빠르게 달려오는 눈덩이같은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거리가 좁혀져 왔음에도 미안한 듯 쉽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엉성하게 눈을 마주치며 

달려오는 그녀의 모습은,


30분간 벌벌 떨며 느낀 추위를 단번에 녹여버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충분히 사랑스러웠다. 


바로 전날 밤까지 같이 있었어도 다음날 또다시 

마주치면 서로 반년은 만나지 못한 것 같은 

모양새로 숨이 막히도록 꽉 껴안던 우리였지만,


가까이 다가오고 나서도 안기지도 못한 채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니, 

어제 먹은 라면들과 함께 오늘 하루 동안 

소모되었어야 할 기력도 함께 변기 속으로 

흘려버린 듯한 창백한 얼굴색을 띄고 있었다. 


영하 12도에 온도에서 30분이나 늦어버린 

자신 때문에, 내가 살짝 

화가 나 있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제 매운 거 잔뜩 먹었다가 아침에 

속이 뒤집어져서 아침에 도저히 

제 시간에 맞춰서 나올 수가 없었어, 정말 미안...”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더 이상 터져 나오는 미소를 숨기기가 힘들었다. 


“너 기다리느라 정말 추워서 죽는 줄 알았어, 

제발 매운 것 좀 적당히 먹어. 너무 보고 싶었어. 

오늘 컨디션을 보니 너 이따가 병원에서 

교수님한테 한참 혼날 거 같다.


외래 진료 끝나면 전에 지나쳤던 쌀 국숫집 

먹으러 가자하려고 했는데, 네 모습을 보니 한동안은 

엘리멘탈만 먹어야 할 것 같다 그치? “ 


그녀를 껴안고는 약간은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간만에 편하게 쉴 수 있게 된 주말을 기념해서 

병원 근처에 있다는 쌀국수 맛집을 지예와 함께 

찾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말 미안해.. 대신에 우리 오늘 영화라도 

한편 챙겨보고 집으로 돌아가자

나도 너무 보고 싶었어.


일단 빨리 버스부터 타자 

오래 기다렸을 텐데 많이 추울거같아, “


지예는 내가 입은 베이지색 야상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내 손과 자신의 손을 맞잡았고, 

5분정도 줄을 기다려 우리는 병원을 가기 위해 

항상 타던 버스에 올라탔다.


같은 색상의 야상을 입고 다니는 건 

너무 눈에 띄기에, 적당히 커플 사이로 보이고 싶어 

내가 신중하게 선택했던 베이지색 야상은, 

지예가 입은 하얀색 야상보다 절반은 더 

저렴했던 물건이다. 


둘이서 어디 한번 놀려가려 할 때마다 

지예는 부모님한테 말하고

가볍게 용돈을 받아내면 그만 이였지만, 


아는 친구들에게 사정해서 아르바이트 대타를 

뛰지 않고서는 놀러 갈 생각을 하기도 힘들 정도로, 

그 시절의 나는 궁핍했고 추한 모습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5분 동안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그녀의 손이 점점 따듯해졌다. 서로의 온기가 맞닿아 

온도가 올라간 듯 했다. 


나는 함께 있다는 그 느낌이 무척이나 좋았다.


“도대체 뭘 먹고 다니기에 염증 수치가 

그렇게 하늘을 찌를 수가 있냐며 

교수님한테 혼났어.”


담당 교수님께 한참을 혼나고 

3일 동안 크론병 환자 전용 대체 식품인 

엘리멘탈만을 먹을 것을 선고받은 지예는, 


울상인 표정을 짓고는 총총걸음으로 진료실에서 

빠져나와 나에게 안겨왔다. 


누구보다 먹는걸 좋아하는 그녀에게 있어 

3일 동안 금식을 선고받는 고통은, 

3일 동안 나를 만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괴롭다고 했다.


전에 지예가 마시던 엘리멘탈을 한입 

먹어본 적이 있었는데, 


온갖 야채들을 믹서기에 넣고

바나나를 아주 약간 첨가한 뒤,

알갱이가 살짝 남을 정도로 갈아서 

그대로 마시는 듯 한 끔찍한 맛이 느껴졌었다.


가고 싶었던 쌀국수집을 

가지 못하게 된 건 무척이나 아쉬웠지만, 

아프다는 애를 두고 별 수 있겠는가, 


헬스 애호가들이 먹는 단백질 보충제 같은

맛과 식감을 자랑하는 대체식품을 

3일 동안이나 먹을 그녀를 위해

나는 병원 지하에 있는 작은 빵집에서 

프렌치토스트와 주스 한잔으로

끼니를 달래고는


미안한 듯 검지를 꼼지락 거리는 

지예의 손을 맞잡고 병원을 나섰다. 

빵을 먹고 남은 비닐들을 주워다

쓰레기통에 넣고 시계를 바라보니,

시침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는 사실에

저절로 입 꼬리가 올라갔다.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예를 보니 

그녀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이 다음 우리가 어디로 향했었는지 무척이나 

궁금해 질 때 즈음,


한순간 눈앞을 수놓았던 기억의 단편들은,

순식간에 내 앞에서 사라져갔다.


나를 죽이는 동시에 살아나가게 만드는 

이 기억들은, 이렇게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따듯했던 추억들을 갑자기 내 가슴속에 던져놓고는, 


그 추억의 온기를 껴안고 조금이나마 

과거를 곱씹으며 현재를 잊어보려 하면,

이렇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매정하게

다시 그 기억들을 가져가버린다.


나는 한 번의 잊지 못할 사랑과 

한 번의 잊지 못할 상실을 경험했다.


잊지 못할 열정적이고 미숙했던 사랑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만족감과 행복감을,

때로는 온 몸에 전율이 돋을 정도로 강한 

육체적인 쾌감을 가져다주었지만, 


살아 숨 쉬며 계속해서 순간을 영위하는 이상 

인간은 절대 과거로 돌아갈 수 없기에, 


오늘과 별반 다를 것 없었을 어제로 조차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쉽게 깨닫지 못했던 

나라는 존재는, 바로 옆에서 한걸음 다가가면 부딪힐 

정도로 가까이 있었던 소중했을 인연을 망각했다.


흘러넘치는 인파로 끝이 보이지 않는 

줄 속에서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가고 있으면,


2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잠실 어딘가에 잠들어있을 그때의 그 기억이 

한 보폭만큼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한겨울에 내리는 눈을 차창을 통해 바라보며, 

정체된 도로 속에서 기어가던 버스 속에는


그녀와 내가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어떤 불안감도 해소될 법한 안정감이 있었고.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주말 오후 즘에 

아차산대교를 뒤져보면, 


느릿느릿 나아가는 버스 한편에 서로 

다른 교복을 입은 조그마한 연인 한 쌍이 

지금도 손을 맞잡고 서로의 어깨를 베게삼아 

기대고 쪽잠을 자고 있을 것 같은 생생함이 있었다. 


지금도 나와 같은 세상에서 숨을 쉬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그녀는 아마도 이 단순하고 

구차한 기억을 더 이상 머릿속에 담아놓을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런 사실에 마음이 쓰라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기억일지언정 

내 속에서 살아 숨 쉬며 지금까지도

세상 어딘가에서 존재하지 않을까 싶은

생생한 기억들은,


무의미한 일상 속에서 비워진 나라는 인간의 

내면을 채워주는 훌륭한 양식이었고, 

나를 살아나가게 함과 동시에 죽어나가게 

하는 지금의 나를 구성함에 있어, 

가장 중요시 되는 요소였다. 


나는 무의미한 나날 속에서 가슴속

기억들을 좀먹으며 지금까지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줄 앞으로

버스가 다가오기 시작했고, 

버스에 올라타고 나니 가죽, 페인트, 

플라스틱에서 풍겨오는차 냄새와 

약간은 답답한 에어컨 냄새가 풍겨왔다. 


쓰라린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냄새지만 

나는 그 냄새들이 무척이나 좋았다. 


카드를 찍고 그대로 버스 맨 뒤쪽까지 걸어가서 

가장 뒤에 있는 오른쪽 구석 자리에 앉았다. 

비교적 넓은 발 간격과, 뒤에 아무도 없다는 

안정감을 주는 이 자리는, 피곤한 퇴근 시간에 

맘 놓고 쪽잠을 자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리였다. 


또한 오른쪽 차장으로 보이는 한강의 야경은 

언제 보아도 건조해진 내 마음을 달래주는 

따듯한 차 한 잔과도 같았다.


버스는 환승센터를 벗어나 잠실대교로 향했다. 

이곳의 야경은 보고 있으면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진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중심 한가운데에

랜드 마크처럼 자리 잡혀 있고, 

건물 외벽을 감싸는 형형 각색의 조명들과, 

타워를 중심으로 자리 잡은 복함 쇼핑몰, 

테마파크와 고급 호텔들은 각자의 매력을

조명과 장식으로 뽐내며 선명하게 

살아있는 서울의 밤을 연출한다. 


그 밤 속에서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화사한 야경들을 지나쳐 잠실대교 입구로 진입할 즈음, 

바로 옆자리에 한 여자가 앉은 것이 눈에 보였다. 

검은색 얇은 긴팔 니트에 찢어진 연한 청바지를 입고, 

흰색의 얇은 카디건을 걸친 가냘파 보이는 여자였다. 


필요 이상으로 타인에게 관심도 호의도 

보이지 않게 된 내가 눈앞에 여성에게서

한동안 곁눈을 뗄 수가 없었던 이유는, 


자그마한 체형부터 가냘파 보이는 옷차림, 

날개 뼈까지 내려오는 검은 흑발이 

지금도 잊지 못하는 누군가를 

단편적으로 떠오르게 하는 생김새였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이나마 그녀가 내 옆에 앉아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말이다. 


피곤한 하루를 보냈던 건지, 

옆에 앉은 여성은 밀린 잠실대교를 거의 다 건너갈 때

즈음에 잠이 들었다. 에어컨 바람이 차가웠는지 

카디건을 늘여놓아 손까지 덮어버리곤 옆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잡아가도 모를 듯이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에어컨 바람의 방향이 그녀에게 향하지 않도록 

방향을 바꾼 후, 곁눈질로 멍하니 카디건 사이로 

살짝 삐져나온 하얀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 손가락 사이로 내 손을 겹쳐 

2년 전 그날처럼 손을 맞잡고 

내 어깨를 그녀에게 빌려주고 싶어졌다.


나와는 아무런 접점도 없는, 

방금 처음 마주친 여성인데도 말이다.


 스스로는 지나온 시간 속에서 

적어도 타인에게 향하는 감정은 고갈되었다고

항상 생각해왔지만. 


헤어진 그녀를 연상시키는 여성을 

마주친 것만으로, 이런 외로움에 휩싸여버리는 

자신이 구역질이 날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나는 결국 조금도 변하지 못한 채 

가진 것조차 지나쳐온 세월 속에서 

나를 지탱해주던 요소들을 잃어버린 

채 빈 껍데기만 남아버린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저 너무 외로워서, 


이렇게 몇 번이고 그나마 행복했던 

순간들을 곱씹지 않으면 스스로 

죽어버릴 거 같아서, 


의미 없는 추억들을 계속해서 

되새기며 살아만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아니어도 좋으니 누군가가

나를 안아주기를 마음속 어딘가에서 간절하게 바랬다. 


누군가에 품에 안겨 고생했다고 단 한 번만이라도

나에게 속삭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를 

간절하게 바라왔다. 돈을 쓰지도 않은 채

먼지만 쌓여가는 월급통장을 보며, 


집과 회사에서 멀리 있는 

퇴폐업소 같은 곳을 찾아가, 

돈을 줄 테니 한 번만 나를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겠냐고 

부탁하고 싶었다. 


도대체 스스로 어디까지 망가진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당장 내일이어도 좋으니, 지쳐버린 마음을 달래줄

 단 한 번의 특별한 경험이라도 내게 주어진다면, 

그것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행복을 몸 안에 가득

머금은 상태에서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었다. 


차창에서 한강의 야경이 조금씩 지나쳐 사라지고. 

버스는 집으로 돌아가는 고속도로 위로 올라탔다, 

귓속으로 들려오는 노래가 세 번 정도 바뀔 즈음, 

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근처 대형 마트에서

간단하게 장을 본 후,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