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게 내려다보는 시선, 경멸 가득찬 눈동자 


앙 다문 조그만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디터의 마음을 후볐다.


디터의 곁에서, 언제나 지켜주겠노라 말하던 그 앙증맞은 입술 사이로는 이제 디터를 저주하는 말만이 밖으로 나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조용히 충격에 빠진 디터가 자신의 팔목 보호대를 슬었다.


어딘가가 잘못된 세계에서, 그녀만이 나를 이 장소를 의미있게 해주었는데


디터는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자신의 과거를 청하며 눈을 감았다.


지금이 꿈이었으면 하는 조그마한 소망도 함께



"멍청한 놈, 디터!"


뱃살이 푸짐하게 나와 흉갑도 다 가려주지 못해 옆구리가 터져나올듯만 해보이는 후줄근한 기사가 디터를 쏘아붙였다.


"잘 좀 해보란 말이다, 내가 그 사이에 살이 쪘을리가 없어!"


빽, 고성을 내뱉은 기사는 디터의 세심하지만 재빠른 손놀림에도 가려지지 않는 옆구리가 불만스러웠던 듯, 괴성을 질렀다.


바쁘게 손을 놀리던 디터도 이제 더이상 안됀다는듯, 바쁜 손길을 늦추고 다급히 말했다.


"하지만 나으리!"


그런 디터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볼기짝이 얼얼해짐을 알 수 있었다.


"이 멍청한 놈, 쓸모없는 놈! 길바닥에서 동냥이나 하던 너를 거두어주었거늘 너는 언제나 이런것도 못하구나!"


자신의 낡은 가죽 장갑으로 디터의 뺨을 강하게 내리친 기사는 이내 우악스럽게 받쳐들던 흉갑을 디터 곁으로 휙 던지더니


다시 여관으로 들어갔다.


힘없이 쓰러진 디터는, 언제 그랬는듯 벌떡 일어서더니 기사의 갑옷을 주섬주섬 챙겼다.


이 갑옷을 다시 쓰려면 마을의 대장간을 찾아야 했으니, 디터는 부어 오른 자신의 뺨은 안중에도 없다는듯 부산히 움직였다.


그런 디터의 곁에 여관주인의 딸이 다가와 우유를 건냈다.


목제 그릇에 담긴 우유가 불쑥 내밀어지자 디터가 기사의 갑옷을 한아름 끌어안던것을 멈추고 그 그릇을 건넨 주인을 쳐다봤다.


"애, 이거라도 먹으렴"


"고맙습니다. 마님"


제 나이 또래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디터는 여관집 딸에게 공손함을 잃지 않았다. 


디터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위치가 이 곳에 존재하는 그 누구보다도 낮다는걸 잘 알았다.


아니, 알지 못한다 해도 그의 몸이 기억했다.


굽신거리며 기름진 머리카락을 보이던 디터가 푹신해보이는 건초더미로 기사의 갑옷을 조심스레 뉘여두더니 목그릇을 빼앗듯 


잡아들곤 급하게 마셨다.


"뭐가 그리 급해서 그러니, 천천히 먹으렴"


어른이 아이를 달래듯 말하는 그 딸의 모습에 디터는 속으로 비웃었다.


제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럽게 보이려는 그 딸의 얄팍한 생각이 한 편으론 귀엽고, 한 편으론 건방져보였던것이다.


하지만 디터는 언제나 이런 생각을 자신의 속으로 감추어두었다.


디터는 알았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자신의 속마음을 전부다 말할 필요는 없다는걸,


눈도 마주치지 않고 우유를 비워낸 디터에게 목그릇을 다시 받아든 딸이 이번엔 딱딱해 보이는 빵을 디터의 품속에 넣어주었다.


디터는 언제나 댓가없는 호의를 거부하진 않았지만, 몇 개월동안 찾아오는 그런 호의가, 단순히 호의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는걸


잘 알았다.


빵까지 품에 챙긴 디터는 딸에게 물어봤다.


"대관절, 이러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가 굶으면서 일하는거 다 안단다."


눈을 땅바닥에 내리깔던 디터가 힐끔 힐끔, 딸의 얼굴을 쳐다봤다. 


딸의 눈동자에는 동정심이 가득했다.


멍청한 년, 저런 감정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하나도 안된다, 그런 나약한 이유에서 나를 도울리가 없었다.


디터를 거두어준 기사가 그랬고, 그전에 핏덩이의 디터를 받아들인 수도원의 사제가 그랬다.


따라서 그건 이유가 될 수 없다. 저 눈동자 너머, 그 너머를 읽어내야만 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내야만 했다.


잠시간의 기묘한 대치는, 여관 내부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깨지고 말았다.


고민에 빠졌던 디터는, 다시 현실로 끄집어내져, 건초더미에 살포시 놓인 기사의 갑옷을 한아름 끌어안아 들은채 딸에게 조심히


고맙습니다.를 말하며 멀어져갔다.


여관에서부터 대장간은 꽤나 머니 디터가 돌아오려면 시간이 걸릴것이다.


그런 디터의 뒷모습을 여관집 딸은 사라질때까지 쳐다보더니 이내 여관의 구유로 몸을 옮겼다.

을 여관집 딸은 사라질때까지 쳐다보더니 이내 여관의 구유로 몸을 옮겼다.







"글쎄, 그러니까 이 몸 빌헬름 카르슬라인님께서 젊었을땐 말이야"


디터의 볼기짝을 내려친 기사는 자신의 이름을 간드러지게 내뱉으며 무용담을 이어갔다. 손 높이 잡힌 맥줏잔에서 맥주가 조금씩


기사의 고양된 감정을 대신한다는듯, 출렁였다.


"그래서 그렇게 된거라고, 젠장 씨발!"


빌헬름의 말에 따르면, 그는 주덴마르크의 지체 높은 가문의 삼남 출신으로 촉망받는 기사였다.


그는 인신의 대의에 투신하기로 서약한 기사단에 몸을 던졌고 그 기사단 내에서도 빌헬름은 촉망받던 인재였다.


주덴마르크를 순찰하길 게을리지 하지 않았고, 전쟁이 나면 언제나 선봉에 달려가 기사단의 깃발을 휘날렸다.


그에게도 기사도의 낭만이 가슴 속을 가득 채우던, 열정의 시절이 있었음이다.


하지만, 지금 여관집 주인을 붙잡고 얼마 남지 않은 기사 연금을 축내며 맥주를 연거푸 들이키는 그의 초라한 모습은 


과거의 영광과 영락한 지금의 간극을 보여주고 있을뿐이었다.


뭐가 어찌되었든, 술독에 빠져 매일 맥주나 들이키는 그의 얼굴에선 그때의 모습을 찾아낼 수 없었다.


여관집 내의 모두가 그를 허풍선이로 여겼지만, 그가 꺼내는 감칠맛 나는 모험 이야기들은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것이었고 


그는 몇 일만에 그 여관의 명물이 되었다.


본래 처음엔 여관의 경비를 위해 고용한 용병이었고, 지금에 이르러선 그가 그 업무조차 제대로 해내리라 믿는 자는 아무도 


없을테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배불뚝이 빌, 허풍선이 빌이라는 별명을 얻게된 빌헬름은 수 개월동안 이 여관에 머물며,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에게 한바탕 이야기를 쏟아내곤, 언제나 제 몸에 맞지 않는 과거의 갑옷을 입으려 난리쳤다.


구유에 다녀온 딸은 그런 빌헬름이 한심해보였고, 오늘은 더욱 그리보였다.


딸에게 있어서, 그가 말하는 온갖 괴물과 괴수는, 그저 동화속에 나오는 내용이었고 그가 스스로 대적했다던 괴물들은 


그의 추억속에서만 생명을 얻어 움직이는 것들이었다.


그런것을 살아생전 본적 없는 딸에겐, 그저 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것이었다.


그런 그녀는 빌헬름보단, 디터가 더 눈에 들어왔다.


꾀죄죄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남자답게 생긴 그의 모습이 자신을 간지럽히는듯 했다.


입은 무거웠고, 행동은 재빨랐다.


몇 개월동안 지내면서 자신의 처지에 군 말 없는 그의 모습이 그녀의 맘을 간지럽혔다.


무거운 입에서 나온 목소리도 좋았다.


낮지만 굵은, 제 또래에선 찾을 수 없는 마치, 동굴을 울리는듯한 목소리는 그녀 말고는 제대로 들어본이 없는 그래, 저기


술주정뱅이 말고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 그녀는 언제나 빌헬름에게 구박받는 그의 처지가 가엾고 가슴 속 분노가 치밀었다.


저런 멍청하고 막되먹은 돼지에게 절절 매는 그의 모습이 답답하고 짜증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항상 그에게 먹을걸 챙겨주었다.


챙겨주기 어려운 날에는 그저 말린 육포라도 슬쩍해 건네주곤 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이런 모습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을꺼란 생각을 하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을때,


여관집 주인은 그런 딸을 보고 저녁마다 곧잘 나가는 딸의 모습을 어렴풋 눈치를 챘다.


자신의 딸은 디터라는 종놈을 좋아하는것 같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인은 딸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디터는 요즘 세상에 입만 가벼운 애들과는 달라보였고 언제나 성실해보였으니


차라리 디터가 자신의 딸과 결혼해서 이곳에 남아준다면 일도 거들어줄 수 있으니 말이다.




디터는 얼얼한 자신의 볼기짝을 매만지며, 대장장이가 서둘러 나와주기만을 기다렸다.


딱딱한 빵을 품 속에서 꺼냈다.


빵을 준 딸을 생각했다.


흘끔 흘끔 쳐다본것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디터는 여관집 딸의 얼굴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앙 다문 입술부터, 머리카락을 싸맨 두건까지 빛나는 눈동자까지 생각에 닿자, 여관집 딸의 


어울리지 않는 말투가 귓속에 울리는듯 했다.



귀엽다고 생각했다. 감정이 거기까지 닿자, 다시금 품속을 뒤적이던 디터가 자기와 함께 버려졌단 로켓을 꺼내들었다.


구질구질, 때가 잔뜩 끼었지만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는걸 단박에 알 수 있는 로켓이었다.


로켓 안에는 젊은 여자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태어날적부터 버려져 부모의 얼굴을 알 수 없을테지만, 디터는 그게 자신의 어머니라는걸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가 이 로켓과 함께 자신을 두고 간것은, 자신을 버리고 싶어 버린것이 아니라는 


디터만의 조그마한 증거였으니까, 어째서 고작 빵 따위를 깨물어 먹으며 여관집 딸을 생각했을 뿐이지만, 그게 로켓까지 닿은지는 알 수 없었다.


디터의 불은 뺨에서 투명한 눈물이 한 방울 흘렀지만 디터는 그런걸 느낄새도 없이 뜯어 먹던 빵과 로켓을 다시금 품에 숨길 수 밖에


없었다.


대장장이가 문을 거칠게 열고는 열기를 내뿜는 문지방에 우뚝 섯다.


"디터, 가져가라"


무뚝뚝하게 내뱉은 대장장이의 품에서 디터는 기사의 갑옷을 받아들 수 있었다.


대장장이의 팔뚝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거칠고 묵직했다.


 단단했다.


수 개월 동안 마을에 체류하던 디터는 마땅히 가지고 싶은 일이 없었지만, 자주 다니는 대장간을 보며


어렴풋, 대장장이가 되고싶단 마음이 일었다.


저 거칠고 투박한 손아귀에서 탄생하는 반짝이는 갑주와 무구, 그리고 대지를 다듬는 농기구가 만들어지는게 퍽 신기했다.


그렇지만 그건 자그마한 소망에 불과했다.


부모도 없이 버려진 디터를 수도원에서 꺼내준 빌헬름 경은 자신이 대장장이가 되길 바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룰 수 없는 소망을 뒤로한채, 디터는 주인의 갑옷을 다시 품에 앉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어둠이 깊게 내릴려는 밤이었다.



디터가 여관무렵에 도착할때는 이미 어둠이 깊이 내려, 달빛조차 들지 않는 밤이었다.


오로지 여관밖 대문에 걸린 등불만이 디터의 길을 인도해주고 있었다.


터덜 터덜, 힘들게 걸어오는 디터의 모습에 등불 근처의 인영이 급하게 뛰어나왔다.


"애, 뭐하다가 이리 늦었니?"


걱정되는 목소리가 디터의 귀를 간지렸다.


디터는 예상했다.


언제나 자기가 조금씩 늦을적엔, 여관집 딸이 어둠을 쫒는 등불 아래서 풀벌레들과 함께 자신을 기다려주었음을 


알고 있었기때문이다.


"기사님의 체구에 맞춰서 갑옷을 넓히는 주문까지 했던지라 작업이 늦어졌습니다. 마님"


담담히 답을 내린 디터가 야속하다는듯 쏘아붙였다.


"그까짓 갑옷, 맡겨놓고 내일 찾으러가면 누가 뭐라고 한대니?"


이미 늘어질대로 늘어진 갑옷이 흉물이라도 되는듯, 쳐다보던 딸이 조용히 소리쳤다.


그러다가 잠깐 머뭇거리더니, 다시금 말했다.


"닐리"


말을 마친 딸은 기사의 갑옷을 짊어진 디터의 손을 우악스럽게 잡고선 여관으로 들어가려 했다.


디터는 자신의 팔에 고사리같은 손이 자신을 잡아 끔을 알았다.


닐리의 손길을 느껴보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 느낌이 더욱 조심스럽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