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BT+ 채널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찾아뵙습니다.

일단 4학년 1학기까지 마쳤고, 이제 대학원 진학을 위해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시기가 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해결된 문제가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상황입니다. 지난 4월에 이전에 언급했던 선생님으로부터 진료의뢰서를 발급받긴 했는데, 해당 서류에는  F64.0이 아닌 F64.9가 적혀 있어, 고려대병원을 방문하더라도 F64.0에 해당하는 요건을 '증명'해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 이후로는 학업으로 인해 어떠한 치료도 진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증명'과는 관계없이 제 트랜지션 계획, 나아가 인생 전반의 계획이 사실상 원천봉쇄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로써 최선의 방법은 국내에서 석사 과정을 속행하며 호르몬 치료를 받는 것인데, 제가 겪고 있는 문제가 '취향'의 차원이거나 단순히 병역을 지기 싫어 기피하려는 것이 아님에도, 부모님(특히 엄마)는 헛소리 치부하며, "병원 진단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은 하지도 마라, 그게 과연 정당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냐, 병역 면탈과 다를 게 뭐냐, 군대 문제는 지금 너한테 닥친 현실이고, 그걸 거부하겠다는 건 결국 네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이 아니냐, 그런 소리 할 거면 나가라"는 소리를 계속 늘어놓습니다.

별개의 문제라고 설명했음에도 들으려고 하지 않으시는데, 애당초 '설득'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이전 병원의 선생님도 강조하셨습니다.(문제는 그 병원에서 너무 많은 비용과 시간을 허비했지만요.)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군대에 가기 싫다는 것도 아니고, 군대에 가기 싫어 여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닌데, 인과관계를 곡해하면서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 매우 답답합니다. 정리하자면 "네 계획은 너에게 주어진 병역의 의무를 부정하려는 것이다. 네가 주장하는 성 정체성 문제를 포함한 기타 정신의학적 문제는 헛소리다. 정신 차려라."가 되겠습니다. 법과 현실이라는 게 있기는 하지만, 전형적인 원천봉쇄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병역기피를 의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절차만 잘 진행되면 상관이 없는 건데, 반대로 그러한 계획과 생각 자체가 (의무라는 상태를 무시하는 사실상의) 면탈 시도에 해당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니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기 싫은 것'이라기보다는 '결과적으로 굳이 할 이유가 없기에' 안 하게 되는 것인데 말이죠.

커밍아웃(같지도 않은...불필요했던 의사 표현) 시기가 좋지 않았던 것과 이로 인해 논점이 성전환 자체가 아닌 병역으로 흘러간 것이 지금의 상황을 만든 핵심 요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때문에 나아가 아무런 인생 계획이 없다고 오해를 받고, 이미 커리어에 손상이 가기 시작했다면서 짜증을 내시더군요.

물론 제가 시스젠더 남성이였으면 병역 역시 전체 계획에 포함했겠지만, 그렇지 않기에 트랜지션 등 의학적 과정 및 그 이후의 법적 절차에 따른 과정을 학업과 병행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둔 것이고, 그걸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하니 이 사단이 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현실을 개척해야 하는 것은 본인의 몫이라고 하는데, 그 자체로는 합리적 주장이지만 애당초 알아서 하고자 하는 그 과정 중 일부가 본인이 내세우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방해받고 있다는 점은 모르고 있습니다. 보다 강하게 주장하려고 하면 찍어누르기 바쁜데, 그 결과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제가 두려워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강한 주장을 할 수 없다 보니 제 성향에도 맞지 않고  우유부단하며 단정적인 결단이 필요할 때 방해가 될 수 있는 '어떻게든, 일단은' 등의 단어를 자주 사용하게 되어 이에 대해서도 지적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다고 단정적 결단을 강하게 말하면 또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찍어누를 게 뻔합니다. 임기응변식으로 대처하지 말고 치밀하게 세워둔 계획이 모종의 이유로 실패했을 때 그를 대비해 세워둔 B를 실행하라는 주장 역시 맞는 주장이나, 비현실적이고 허무맹랑하여 불가능한 것이 아님에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허용하지 않는 부분을 그런 식으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현실을 '인식'하는 것과 '순응'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대로 아무 진전이 없다면 커리어 전체에 차질이 발생한다는 점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부모님의 주장은 애당초 그 개척 시도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안 그래도 이와 유사한 화법으로 동생이 원하는 진로를 간접적으로 방해한 바 있습니다. (그나마 동생은 여자라 병역의 의무로부터는 자유롭지만요)


차라리 4학년 2학기를 남기고 휴학 후 입대를 한다면 표면적으로 봤을 때 시간은 벌 수 있고, 제가 적극적으로 어필한다면 훈련소에서 귀가조치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 '그런 곳에서 적응을 못 하면 사회생활은 어떻게 하려고 하냐'면서 몰아붙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분들의 격려와 응원을 받으며 당면한 문제에 대처해 나갔지만, 이번만큼은 매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조언을 받아 현 상황을 타개해 나가고자(그렇지 못해도 적어도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가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