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라인은 따라 놓은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운을 떼었다.


 “언제나 리돌 양을 보살펴 주시느라 고생이 많으시군요. 민재 씨.”


 “덕분에요.”


 정말 덕분이지. 음. 당신만 없었어도 내가 요새 이 고생은 하지 않을 테니까. 


 “혹시 민재 씨, 지금 리돌 양의 생활비로 지급해 드리는 돈의 액수는, 괜찮습니까?”


 “예... 괜찮... 죠?”


 말이 이상하게 매듭지어졌다. 사실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이 녀석은 딱히 식비 외에 돈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캐롤라인이 주는 금액에서, 한 달이 지나 정산하고 보면 살짝 남는 정도의 금액인데... ‘괜찮다’ 라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 내가 설마 남는다고 말하면 줄이려고 그러는 건가? 아니, 그보다 방금 대답한 게 어떤 뜻이었는지는 알아 들은건가?

 내 마지막 의구심은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캐롤라인은 깔끔하게 나의 대답을 무시하고 자신의 말을 이어 나갔다.


 “다른 게 아니라, 아무래도 제가 볼 때는 지금 리돌 양을 보살피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좀 적은 듯 싶어, 이번 달부터는 조금 더 넣어드릴까 합니다.”


 “예? 왜죠?”


 속으로만 가득했던 의구심은 삽시간에 내 얼굴을 다 물들이고서는,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물론 어느 누가 받는 돈이 늘어 난다는데 기쁘지 아니할까.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필요한 곳이 아니라면, 절대로 투자를 할 성격이 아니다. 설령 방금처럼 조건을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캐롤라인은 살짝 눈을 가늘게 깔았다. 


 “돈을 더 드리는데도 이유가 필요한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제가 모자라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없는데 먼저 그렇게 이야기를 꺼내시니까, 이상해서요. 보통 직장에서도 최저시급이라도 올라야 간신히 월급이 올라가잖아요?”

 “리돌 양과 같이 살고 있는 민재 씨의 노고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짐을 조금이라도 더 나눠지고자 이렇게 올려드린다 하면, 설명이 될까요.”


 말은 청산유수로소이다. 딱히 뭐라고 반박할 거리도 없다. 어차피 나한테 그냥 좋은 일이고, 다른 조건을 건 것도 아니니까. 아직은.

 말을 끝낸 캐롤라인은 가방에서 예의 봉투를 꺼내어 식탁 위에 올려 놓고서는, 조심스럽게 내 앞으로 밀어 놓았다. 무슨 뇌물 받냐? 왠지 나도 조심스럽게, 손 끝으로 봉투를 끌어 식탁 아래로 끌어내렸다. 

 이봐, 당신이 먼저 시작했잖아. 그렇게 이상한 것 보는 눈으로 사람을 보지 말라고.


 “한 번 확인해 보시죠.”


 ...아무래도 모양새 때문에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나는 머쓱하게 다시 책상 아래서 봉투를 꺼내어 안에 액수를 확인하였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다시 표정이 의구심으로 가득 차 버렸다.


 “저, 이거 잘못 넣으신 것 같은데요. 액수가 왜 두 배가 뻥튀기가 되었습니까?”


 “정확하게 2배입니까?”


 “네.”


 “정확하군요.”


 말장난? 지금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거?

 농담 같지도 않은 농담을 건넨 캐롤라인은, 잠깐 뜸을 들이고서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방금 민재 씨가 확인하신 대로, 이전에 받으시던 금액의 두 배를 넣어 드렸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는 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 물론 고맙다는 말은 할 생각이 없다. 나는 해명을 요구할 생각이니까. 정확하게는, 도대체 어떤 연유로 이 돈을 나한테 주는 건지를 알아야 겠다. 어느 정도만 늘어나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겠는데, 이 정도의 금액은 너무하잖아, 이건. 

 나는 다시 봉투를 캐롤라인의 앞으로 밀어 넣었다. 천천히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하얀 물체를 보는 캐롤라인의 눈동자에 의구심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저는 이 돈 못 받아요.”


 그리고, 거절의 의사에 그 눈빛은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눈으로 단 두 단어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니가?’

 그리고, 그 눈빛은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았다. 캐롤라인은 단 한 번, 나와 봉투를 번갈아 쳐다 보고서는 놀란 기색을 바로 감추고 그 봉투를 거둬들였다.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네.”


 정적. 


 “...뭐 다른 하실 말 없으세요?”


 “무슨 문제라도?”


 다시 또 정적. 따라놓은 콜라에서 탄산이 빠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아니, 액수가 적은가 라던가 아니면 어떤 다른 설명은 없는 겁니까?”


 “설마 돈이 더 필요하신 문제신가요, 민재 씨?”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도대체 왜 갑자기 이 돈을 주는 거에요?”


 “말씀드렸잖습니까. 리돌 양을 보살피는 민재 씨의 노고를 위로해 드리기 위해서라고요.”


 캐롤라인은 말을 마치고서는, 다시 나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겠지. 갑자기 앞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머리를 양 손으로 부여잡고 멍한 표정을 지으면.  사람 앞에 두고 이러는 게 결례라는 건 알고 있지만, 너무나 급작스러운 상황변화는 내 골머리와 함께 내 자세마저 무너지게 했다. 왜 아무렇지도 않게 돈봉투를 다시 갖고 가는 거지? 내가 아까까지 고민하고 있던 협상이란 부분은 콩가루 집안 밥상마냥 뒤집어 진 건가? 생각보다 포기가 너무 빠른데? 보통 이런 자리에서는 한 번 뜸을 들이면, 반대편에서는 다른 조건을 제시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아?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정말 호의로 준 부분인가? 그런거야? 대체 왜? 왜?!

 내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캐롤라인은 한가롭게 리돌과 만담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내가 대화를 할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바로 간파한 것 처럼.


 “요새는 좀 어떤가요, 리돌?"


 "어느 부분?"


 "생활에 불편함은 없는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불편한 점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다만?"


 "민재가 나를 앞에 두고 혼자 즐기려고 하여, 나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뭔 말이여. 공부하는 건 나지, 네가 아니잖아?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 나는 저 몸도 머릿속도 하얀 아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듣기 위해, 떨구었던 고개를 치켜 올렸다. 캐롤라인은 의구심이 가득한 눈으로 리돌에게 재차 질문하였다.


 "혼자... 즐긴다구요?"


 "네, 민재 앞에 서서 춤추거나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고서는 침대로 갑니다."


 "야, 오해 살만한 말 하지 마!"


 무언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대사에, 척수가 먼저 반응하였다. 내 손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속도로 리돌의 입을 가려 버렸다. 말이 시작하자 마자. 하지만, 내가 잊어버리고 있던 것이 있다. 이 녀석은 입이 아닌 번역기에서 소리가 나온다는 사실. 분명히 입은 제대로 틀어 막았지만, 그 안에 들은 엄청난 내용물은 이미 줄줄 새고 있었다. 미치겠네, 내가 무슨 변사또 플레이라도 한 줄 알 거 아냐?! 아니나 다를까, 말이 끝나자마자 캐롤라인은 도끼눈을 흡뜨고 나를 바라 보았다.


 "민재 씨? 지금 리돌 양이 뭐라고 한 겁니까?"


 "아, 아니에요오오!"


 내 목소리는 비명이 되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황당함과 억울함, 두려움이 담긴. 왜 두려움이 섞였냐고? 지금 저 표정을 한번 보면 알 수 있을걸? 지금 내 앞에 있는 악귀의 얼굴에는 수 틀리면 죽여 버리겠다는 의지가 충만하다.


 "제가 분명히, 리돌, 양을, 잘 보살펴 달라,고, 했을 텐데요??"


 정정한다. 그냥 죽여 버리겠다는 것 같다. 목소리 톤 자체는 여전히 침착하지만, 말이 뚝뚝 끊기는 모양에서 이미 분노가 가득 차 있는 것이 느껴진다. 캐롤라인은 사람 하나 죽여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기세로, 천천히 일어나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난 잘못한 게 없다고!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저기, 방금 이야기는 잊어버리세요! 아시잖아요, 얘가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왜 제 얘기는 듣지도 않고 이러시는 거에요!?"


 "호오, 그렇습니까? 그럼, 지금 그 아무렇지도 않은 스킨십은 언제부터 시작하신 겁니까? 춤출 때부터? 노래할 때부터?"


 스킨십? 무슨? ...아.


 내가 화들짝 놀라서 손을 놓은 그 시점에야, 리돌은 다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놓아주십시오. 민재."


 ...아까 리돌이 이상한 이야기를 한 거야 어떻게든 설명하고 넘어갈 수 있다손 치지만, 지금 이 모양새는 내가 봐도 용납이 되지 않을 성 싶다. 방금 전까지 난, 한 손으로는 리돌의 입을 틀어막고 나머지 손으로는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은 모양새로, 그렇게 아주 야릇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애정행각처럼, 어찌 보면 납치범처럼. 


 "다, 당신 때문이잖아! 누가 그렇게 앞에서 무섭게 서 있으래!?"


 나는 다급한 나머지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리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 결박에서 빠져나왔고, 그 덕에 캐롤라인은 나에게 한 발 더 가까워 질 수 있었다. 

 "남길 말은 그것 뿐입니까?" 


 아, 아니라고!


 애써 부정하고 싶지만, 공포로 잠겨버린 목구멍에서는 가래끓는 신음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다만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른 혓바닥만이 공허히 입 안을 휘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