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히 많은 책들이 나의 주위를 나비처럼 날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이상한 종류의 참고서들이 흑채같은 분가루를 흩뿌리며 나풀거린다. 러시아어 한달만 하면 푸틴만큼 한다, 수학 손짓발짓으로 배우기. 정신분석이론? 저건 또 뭐야?

 

 나는 바로 눈 앞을 날아가는 책 한 권을 집어들어, 몇 페이지를 넘겨 보았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 저 떨어지는 검은 가루들이 모두 활자인 모양이다.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마치 꼬꼬마동산 같은 초원으로 이루어진 구릉지역에는 나와, 책나비들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있는 거라곤 머리 위의 태양... 아니, 태양'들'과, 저 지평선 너머에서 스멀거리는 왠지 모를 어두운 공간 하나 뿐. 태양들은 마치 토성의 고리처럼 둥글게 하늘 위를 가르고 있었고, 일조량이 수백배로 달하는 이 와중에도 지평선 저 끝에는 벽으로 닫힌 듯한 어두운 공간이 있었다. 마치 빛과 어둠은 서로 힘겨루기를 하듯 서로의 경계선을 느물느물 침범하고 있었고, 눈이 부셔 바라보지 못할 것 같은 하늘도 그 덕분인지 별 무리 없이 쳐다볼 수 있었다.

 

 은연중에 나는 그 어둠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풀을 밟을 때마다 우르릉우르릉 하는 진동이 울려왔고, 종이로 된 나비들은 그 진동에 맞추듯 춤을 추며 내 뒤를 따랐다. 어느샌가 옆에 나타난 캐롤라인은, 마치 카운트다운을 세듯이 나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직 이곳을 치우고 있던 중이었거든요."

 

 아무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신 듯 보이십니다. 여기 지금 더 치울 건 없어 보이는걸요. 혹시 이 나비들도 치워야 하는 물건인 건가? 별로 신경 쓰이진 않는데.

 

 하늘에는 리돌이 즐거운 듯이 날아다니고 있다. 나는 무언가를 물어보려다, 그예 포기하고 말았다. 어차피 저 녀석이 어떤 대답을 해 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태양들 중 몇 개가 마치 백열등 터지듯이 퍽퍽 소리를 내며 빛을 잃어 갔다. 그와 동시에, 그렇게나 밝아 보였던 풀밭이 순식간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저 끝에 있던 어둠이, 어느새 내 옆까지 다가와 있었다.

 

 "위험해요!"

 

 놀랍게도 리돌이 번역기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나에게 소리쳤다. 나는 그 사실에 놀랄 겨를도  없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 날 처럼, 그녀에게 붙들려 하늘을 날았기 때문에. 리돌은 터져나간 태양 중 하나로 날아 올랐다. 그 곳에는 마치 땅굴을 파 놓은 듯한 갱도가 있었다. 그런데 분명히 하늘로 날아 올라갔을 텐데, 왠지 모르게 떨어지는 느낌이 난다. 그리고 흙벽에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보던 것과 같은, 각종 깨진 시계와 부서진 책장, 침대와 같은 잡동사니들이 박혀 있었다. 성희 씨는 그 와중에 수직으로 깎여 내려간 토굴에, 반쯤 묻힌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나에게 접시에 담긴 케이크 조각을 웃으면서 건네고 있었다. 나는 그 케이크를 받아, 고상하게 포크로 위에 있는 딸기를 한 입 깨물었다. 아무런 맛이 나지 않는다. 그 때서야 '아' 하는 탄식과 함께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것은 꿈이라는 것을. 

 

 나는 분명히 일어나 있다. 아니, 그럴 것이다. 꿈을 꾸고 자기가 나비인지 나비가 자기인지 모르시던 어떤 분 처럼 지금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꿈의 내용이 너무 개떡같다. 무슨 잉글랜드 축구선수인 마냥, 내 인생 공간에 갑자기 침투한 여자들 셋은 이렇게나 큰 영항을 끼치고 있다. 어쨌든 그 덕분에 내 두뇌는 거의 정신분열 직전의 상태에 와 있다. 침대에 앉아 멍하니 바깥을 내다보면, 반대편 건물 옥상이 보인다. 그런데 지금 그 곳에서 누군가가 나를 바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인 거고. 이래서야 방금 이야기한 양반이나 나나 별 차이는 없는 것 같기는 하다. 나는 내 위에서 이불을 치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멍하니, 아프지는 않지만 아픈 것 같은 머리를 쉬게 해 주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한 십여분 가량을 보내고 나서 깨달은 것이 있다. 오늘은 힘세고 강한 주말의 시작. 또 다시 일을 나가는 날. 나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내려와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민재. 나는 왜 지금 가야합니까?"

 

 "너 지금 그 옷만 입고 살거야? 아니, 적어도 저번처럼 밖에서 돌아다니려면 적어도 옷가지 정도는 좀 있어야 되지 않겠니? 달나라 사람들이 죄다 너 같이 산다고 아무리 이해한 손 치더라도, 여긴 지구야, 지구. 저번 같이 입고 나가면 사람들이 흉본단 말야."

 

 흉본단 말이지. 나를. 저런 옷 입는 동안 옆에 붙어 있는 놈팽이가 뭘 한거냐고. 
 식빵 두 개 사이에 계란후라이와 케찹을 바른 초간단 샌드위치로 아침을 때우고 나서, 나는 저번부터 별러 왔던 리돌의 옷을 사는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서 그녀에게 동반 외출을 권유해 보았다. 하지만 같이 나갈 확률은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마. 나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영화를 갖고 있습니다. 연결을 끊을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이 녀석, 입으로는 말을 하면서도 해적들이 신나게 칼싸움을 벌이는 TV속의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한숨이 나온다. 또 이걸 보면서 지구의 문화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들을 생각을 하면.

 

 프XX스 XX커 라는 게임을 아시는지? 맞다. 두 번째 시리즈가 가장 유명한 그 게임. 거기서 보면, 용사라는 놈이 하늘에서 스카이다이빙 한 아이를 주워다가 멋대로 입양하여, 자기 입맛대로 그 애를 키워낸다. 어허, 그 가리는 파일 지우는 그런 것만 기억하지 마시고. 애가 성인이 되어 게임이 끝나게 되면, 애를 던져놓고 나몰라라 하면서 처음에만 나왔던 신이라는 양반들이 그 때 가서는 뭐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딸이 어떻게 자랐네 좋은 아빠네 나쁜 아빠네 요새 유행하는 오디션 프로그램마냥 평가를 해대는, 아주 비인륜적인 그런 게임. 내가 지금 딱 그 용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달나라에서 떨어진 얘는 계속 뭔가 배우고 있는데, 정작 나는 이 녀석의 생활 부분에 있어서 금전적 처리에 도움만 주는 거지. 어쨌든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현재 이 녀석의 스테이터스는 - 반항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아니, 듣자듣자 하니 아주 이야기하는 것이 제멋대로다. 저번에 같이 장 볼 때는 나도 뭐 옷가지나 이런 것에 신경 쓸 여력도 없었고, 무엇보다 돈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맡아달라고 하는 나름의 보호자인 캐롤라인에게서 얼마 전에 생활비도 받았고, 그래도 여자아이인데 리돌이 원하는 옷가지라도 좀 사야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일 나가기 전에 겸사겸사 같이 나가자고 권유를 한 것인데, 정작 이 녀석이 나가기가 싫다는 것이다. 그것도 영화 핑계를 대면서. 

 

 "지구상의 민재는 달빛을 받는 골격이 된다."

 

 "뭐?"

 

 "아닙니다."

 

 게다가 요새는 끝까지 얘기하지도 않는다. 자기도 이제 번역기로 듣는 것이 답답한지, 자기가 정말 궁금한 게 아닐 땐 끝까지 캐물어서 확인하는 법이 없다. 그렇기에 나는 이야기할 때 더욱 더 열이 받는다. 아니, 정작 간단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부분에 있어서는 질문을 하지 않고, 정말 오래 걸리고 계속 같은 대답을 돌아돌아 설명해 줘야 되는 건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이럴 거면 한국말을 배우라고.

 

 "너 한국말 배울 생각 없지?"

 

 방금 마음 속에 있던 질문을 직각으로 꽂아 넣었다. 요새는 방금 말한 말마따나 얘기를 이어가는나 자신도 답답하고,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이라도 시원시원하게 해야 좀 뭐라도 되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 뇌를 안 거치고 이야기하는 버릇이 생겨 버린 것 같다. 이게 이 녀석 앞에서는 별 상관이 없어서 그렇지, 사실 다른 사람들하고 있을 때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리돌은 여전히 TV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하였다.

 

 "번역가가 정말로 한국어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인은 어렵다.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V에서 보는 것을 현실에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대충 이런 뜻인 듯 하다. 한국어를 배우는 건 어렵지만 TV에서 보고 따라할 수 있는 것은 있다 정도? 나름 훌륭한 교습법이긴 한데, 어떤 교재로 배웠는지 심히 걱정되긴 한다.

 

 "아, 그러셔? 그럼 뭐 배웠는데? 한번 보여줘봐."

 

 리돌은 턱 아랫부분을 매만져 번역기를 끄고서는 헛기침을 하면서 목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래도 하루 웬종일 TV만 본 게 좀 도움이 되었나? 

 

 "열을 쎌 똥안 이 빵에서 꺼쪄. 하나, 뚤, 열."

 

 ...이 녀석, 무슨 뜻인지는 알고 이야기하는 건가? 이 예쁜 목소리를 쓸 데가 그렇게 없나? 그런 갸냘픈 톤으로 저런 무식한 대사를 읊으니, 파괴력이 한층 배가되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왜 이렇게 된소리로 발음하는 거야?

 

 "좀 더 발음을 약하게 해봐."

 

 ...나도 모르게 발성 연기를 지도하고 있다. 리돌은 내 지시사항을 듣더니,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하고서는 목소리를 작게 하여 말했다.

 

 "......."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아니, 그게 아니라, 발음. 발음을 약하게 하라고. 쎌 말고 셀, 빵 말고 방. 이렇게. 소리 크기 말고. 음량 말고."

 

 "열을 셀 동안 이 방에서 꺼져. 하나, 둘, 열."

 

 "그래 잘 했다. 그런데 그 말은 다른 데 가서 써먹지는 마라. 맞는다."

 

 "영화에서는 그 말을 할 때 다른 사람이 먹을 것을 남겨 주었습니다."

 

 "유언 남기고 싶냐? 여하튼, 밖에서는 쓰지 마. 알았지?"

 

 시간과 예산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하루 웬종일 이 녀석만 붙들고 한국말을 제대로 좀 가르쳐 주고 싶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다. 당장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 그 정도까지 신경을 쓸 여유는 없다. 하지만 답답한건 나라고, 진짜. 

 

 참 신경 쓸 구석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많다. 일단 사람 사는데 당연히 필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의외로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동거를 시작하고 며칠 뒤, 나는 싫어하는 음식이 있냐고 물어 보았고, 리돌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시 되물어보니, 너무나 당연하게도 리돌은 우리나라의 먹을 거리가 무엇이 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실험 삼아, 이것저것 해 먹여 보았다. 어차피 첫날에 컵라면도 먹었겠다, 매운 것도 OK라는 생각으로 전혀 거리낄 것 없이 아무거나 막 만들었다. 입문 난이도 하급인 계란말이, 햄, 콩자반 같은 것들부터 시작하여 본격적인 한국스타일 요리인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 국물요리까지. 놀랍게도, 이 녀석은 그 중에 가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맛있다는 말만을 반복할 뿐. 말에는 감정이 묻어나오지 않지만, 이 녀석, 먹는 표정을 보면 참으로 음식 만드는 사람으로서 보람이 생기긴 한다. 나중에 젓갈이나 회 같은것도 한번 먹여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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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늦게 올려버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