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편에게서 벗어나 흔한 것이 되었다. 남편과의 불화로 인해 집을 나와서 마음대로 떠돌아다니는, 이혼은 하지 않은 여자. 지구에 돌맹이처럼 굴러다니는 그런 흔한 속성의 여자가 되었다. 집을 나온 첫 날, 나는 심야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갈 것을 결정했다. 남편에게서 최대한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버스표를 끊으려고 지갑을 열었을 때 내가 들고 있는 것이 남편의 카드인 것을 보면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남편에게서 멀어지는 것도 남편이 없으면 안 되다니. 버스에 올라타자 공허함이 내 몸을 감쌌다. 남편을 알고 난 후 지금까지의 시간을 생각해보면서, 남편과 여행 한 번 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왔다. 해방감 같은 것은 없었다. 그 해방감이라는 것도 다시 묶여있을 곳이 있어야 찾아오는 것이었다. 잠은 찾아오지 않았다. 가늘던 빗줄기는 서서히 묵직해져, 창문으로 날아들어 부서졌다. 뭘 하면 좋을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차창 밖에 풍경은 나의 심상을 펼쳐 놓은 것 같이 보였다. 칠흑 같이 어둡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터미널에는 여섯 시 쯤 도착했고, 비는 아직까지도 내리고 있었다. 나는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고, 근처에 있는 가장 비싼 호텔을 찾았다. 택시를 불러서 호텔로 가고, 10일 정도 체크인을 했다. 내가 죽을 때까지 긁어대고, 이 카드는 언제까지고 나에게 물건들을 허락할 것이었다. 남편은 자기가 받은 금전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나는 곧장 밖으로 나와서, 먹을 만한 것을 검색해 보았다. 링크를 타고 들어간 게시글에서 보이는 모두가 누군가와 같이 있었다. 나는 식당에 들어가서 2인분을 시키고, 1인분만 먹고, 1인분은 그대로 남겼다. 술을 평소보다 많이 먹었고, 그 자리에서 울었다. 혼자라는 사실이 더 깊게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호텔로 들어가서,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침대는 차가웠다.

   눈을 떴을 때에도 아직 하루는 있어주었다. 나는 핸드폰을 들고, 메모장을 켜서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정리할 때 한 번씩은 하는, 그러나 크게 의미는 가지지 못하는 그런 행동. 들어만 보았지 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극장가서 심야 영화 보기

천문대 가서 조용히 오랫동안 별 보기

캠핑카 사서 캠핑 일주일 동안 하기

내 손으로 내가 쓸 가구 만들어 보기

맨체스터 더비 직접 관람하기

 

 그 쯤 적으니 손이 멈추었다. 정말 하고 싶은 거 없는 인생이네, 라고 생각했고, 그 이후에 곧바로 뒤이어서 문장 앞에 전부 ‘남편과 같이’가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써놨던 것을 모두 지우고, 앞에 ‘남편과 같이’를 붙여서 다시 적어나갔다. 둑 터져 나가듯 문장들을 수도 없이 쏟아낼 수 있었다. 병신 같은 짓이네, 나는 툭 내뱉고는 휴대폰을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호텔 밖을 나섰다.

   바닷가는 한산했다. 낚시하는 사람 두 명을 빼면, 근처에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계단에 앉아서 낚시하는 사람들의 등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얻어갔다. 저 사람들은 어디에서부터 왔을까. 어떤 유년 시절을 보냈고, 거기에서 어떤 사람으로 자라났을까. 무슨 꿈을 가졌었을까. 첫 낚싯대를 잡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지금 여기에서 낚싯대를 쥐면서 무엇을 얻으려고 할까.그들의 등은 묵묵히 침묵만을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그렇게 질문해 주길 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누군가가 목적지를 잃고 날아온 나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져주기를, 잠시나마 나의 시간을 받아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내가 기다린다고 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찾는다고 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 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원하는 답은 찾았다. 나는 조금 더 바다를 보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파도는 흐느끼듯 방파제를 만나 부서졌다.

나는 새벽의 날벌레처럼 한 전광판에 이끌렸다. ‘La Dolce Vita'. 그 전광판은 숲 속에서의 불빛처럼 은은히, 혼자 빛나고 있었다. 나는 가게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안정되게 내려앉은 자줏빛 공기가 피부로 밀려들었다. 가게는 외국식의 바(Bar)형 술집이었다. 바(Bar)안에는 하얀색 양복을 입은 20대 후반의 여성이 하얀색 조명 밑에서 선반을 정리하고 있었다. 바텐더인 모양이었다. 바텐더는 머리에 토끼 귀 모양 머리띠를 하고, 목에는 회중시계를 걸고 있었다.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바텐더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토끼 귀 머리띠가 쫑긋쫑긋 움직이는 것도 같았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비치된 술병들을 훑어보았다.

  「드시고 싶은 술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추천?」

  「제일 비싼 걸로, 그리고 제일 독한 걸로요. 술은 잘 몰라서.」

  「제일 비싸고, 제일 독한 걸로, 라.」

   바텐더는 흠흠, 하고 입소리를 내면서 오른손 검지로 턱을 긁으며 술들을 훑어보다가, 이윽고 선반에서 술을 몇 개 꺼내서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바텐더가 만든 것은 주황빛을 머금은 붉은색의 술이었다. 바텐더는 잔을 조용히 나에게 내밀었다.

  「키스 온 더 파이어. 그 쪽한테 어울리는 거 같아서. 그렇게 비싸진 않아요. 기주는 조금만 넣고, 물에 타서 희석시켜서 맥주마시는 기분일 거에요. 그리고 돈은 안 받아요. 첫 손님이니까.」

  「주문한 거랑 완전히 다른 게 나온 것 같은데요.」

   바텐더는 고개를 저었다.

  「그 쪽이 주문한 건 이거에요. 입으로 말한 건 그냥 던져본 말이잖아요? 그렇게 마시는 술은 마시는 게 아니에요. 버리는 술이지. 술도 버리고, 몸도 버리고. 그렇게 마시는 건 술이 아니에요. 독을 마시는 거지.」

  「장사가 너무 제멋대로인 거 아니에요?」나는 툭 쏘아붙였다. 그러자 바텐더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생업이 아니라 취미니까.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좋은 대로 해도 되는 거잖아요?」

  「장사를 왜 하는 건데요?」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죠. 그리고 누군가에게 필요가 되는 것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필요가 된다고요? 누군데요?」

   바텐더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바로 거기 앉아 있잖아요.」

  「내가요? 내가 여기에서 뭘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에요?」

  「‘여기에 무슨 일로 왔어요?’ 이 말이 필요한 거 아니에요?」

   나는 그 말을 듣고는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당신이 오기 전부터 나는 당신이 올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온 몸에 소름이 쫙 하고 돋았다. 남편 같은 사람이 남편 말고 또 있다는 거야? 바텐더는 내 놀라는 표정을 보고는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소리 내서 푸하핫, 하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곤 기분이 나빠졌다. 내가 정색하자 바텐더는 아차, 하곤 입을 손으로 가리며 표정을 정리했다.

  「농담이에요, 농담. 그런 건 그냥 보면 알 수 있는 거예요. 나랑 나이가 비슷한 여자가 이런 날에, 이런 시간에 술집에 혼자 들어와서 제일 비싸고 독한 술 달라고 하면, 뭐겠어요. 무슨 일 있다는 거지. 게다가 척 보면 여기 근처 사람도 아니고, 그러면 이야기는 하고 싶은데 마땅히 풀어놓은 곳은 없다는 게 되죠. 그런 사람한테 가장 필요한 게 뭐겠어요. ‘무슨 일이니?’라고 물어주는 거죠.」바텐더는 그렇게 말하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여자들은 정말 운명에 약하다니까요. 내가 남자였으면 진짜 인기 많았을 텐데.」

   운명에 약하다. 나는 그 말을 입속으로 되뇌어보았고, 그 말의 어감을 되새김질했다.

  「다른 여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점수 좀 땄겠어요.」

  「어머, 누가 그렇게 말해서 넘어간 적 있어요?」

  「넘어간 정도가 아니라 던지다시피 했어요.」

  「어떤 남자인데요?」

  「제 남편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곤 칵테일을 들어, 물마시듯 목구멍 너머로 꿀떡꿀떡 삼켰다. 부담없이 달고, 적당히 씁쓸했다. 딱 먹고 싶었던 맛이었다.

   나는 바텐더에게 남편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바텐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몇몇 부분에서는 오, 하고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중간중간에 칵테일을 마셨고, 이야기를 다 마쳤을 때는 내 앞에 두 개의 잔이 바닥을 보이며 나란히 서 있었다. 바텐더는 이야기를 다 듣고는,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리곤 자기 목에 걸려있는 회중시계를 세 번 정도 만지작거렸다. 알라딘의 요술램프라도 되는 것처럼. 이윽고 자기 혼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떼었다.

  「흔한 이야기는 아니네요. 들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이야기 하고 나니까 좀 어때요?」

  「나쁘지 않아요. 조금은 개운해졌어요.」나는 그렇게 말하곤 곧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뭘 하는 게 좋을까요?」

  「굳이 뭘 ‘해야만’ 하나요?」

  「무슨 뜻이에요?」

  「지금 당신이 찾는 건 마취제에요. 그러니까, 지금 자기한테 주어진 상황을 좀 잊어버려는, 그래요. 생각을 좀 다른 곳으로 유기할 수 있는 그런 걸 찾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마음이란 게 몸이랑 달라서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이 없어진다고 해서 그게 치유되거나 그렇지는 않거든요. 그걸 그렇게 ‘잊는다’의 영역에 집어넣어버리면, 그건 그 안에서 꾸역꾸역 자라나요. 그리고 기어코 튀어나와서는, 주기적으로 그걸 가지고 있는 사람을 무너뜨리죠. 나는 당신에게 필요한 게 뭐냐고 생각하냐면, 그걸 그냥 느끼는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다가오는 걸 그대로 직시하고, 힘들어하는 자신을 조용히 지켜봐주는 거죠.」

  「그렇게 하면 뭔가 달라지나요?」

   아니요, 하고 바텐더는 칼로 자르듯 단언했다.

  「달라지진 않아요. 뭔가 주어지지도 않고. 하지만 그 방법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택할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라는 건 확실해요.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는 최선이고요. 그렇게 미련조차 남지 않게 괴롭고 나면, 나중엔 쉽게 그 상황이 당신을 무너뜨리지 못하죠. 그리고 나서 변화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고 나서도 늦지 않아요.」

  「나는 남편이 정말 나를 버렸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럴 가능성도 있죠.」

  「하지만 남편이 나를 정말 버린 건 아닐까, 다시 나를 영영 찾지 않는 건 아닐까 너무 두려워요.」

  「그럴 가능성 또한 있죠.」

  「어떤 게 더 큰 가능성일까요?」

  「동등한 가능성이에요. 그리고 어떤 가능성이 찾아오든, 받아들이고, 그리고 나아가면 되는 거예요.」

  「받아들이고, 나아간다. 말은 쉽네요.」

  「뭐든 그래요. 그리고 무슨 일이든 말이라도 한 마디 하는 것부터가 시작이에요.」

  「그건 좀 위로가 되네요.」

  「그렇죠? 시선만 조금 바꾸면 이렇게 바라볼 수도 있는 거예요.」

   바텐더는 나에게 술 한잔을 더 건넸다. 한 손에 쥐어지는 유리잔 안에는 얼음이 가득했고, 그 얼음들의 틈새를 밝은 호박색 술이 채워주고 있었다.

  「그 쪽이 입으로 주문했던 거예요. 비싸고, 독하죠. 아껴뒀던 거니까 막 삼키지 말고 조금씩 천천히 마셔요. 그리고 입에 머금고 맛을 느껴보도록 하고요.」

   나는 바텐더의 말대로 했다. 조금 입에 머금곤, 차근히 음미했다. 강한 알코올이 코를 찌르고, 귀가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술의 차가움이 미지근함의 경계에 도착했을 때에, 달큰한 과일향이 혀를 뜨겁게 감싸주었다. 나는 꿀꺽 술을 삼켰다. 목 너머로 기분 좋은 뜨거움이 나른하게 찾아왔다. 숨을 들이마시고, 뱉을 때마다 과일향이 다가와 후각을 두드렸다.

  「맛있네요.」

  「독한 술은 천천히. 그렇게 먹는 거예요. 기억해둬요.」

   바텐더는 내가 잔을 다 비울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바텐더는 내가 마시는 것을 지켜보다가, 내가 사용했던 잔들을 잠자코 세척했다. 내가 잔을 다 비우자, 바텐더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어디 딱히 갈 곳 없죠?」

  「지금은요.」알코올 때문인지 감각이 조금 몽롱했다.

  「그럼 앞으로 종종 찾아와요. 오고 싶을 때, 마음 내킬 때. 그리고 나랑 같이 일 좀 해요. 오후 4시부터 오전 2시까지. 아무 것도 안 하고 싶으면 그냥 앉아있으면 되고, 마음에 드는 손님 있으면 몇 잔 줘도 되요. 돈은 제대로 줄 테니까.」

  「뭐야, 그렇게 해도 괜찮은 거예요?」

  「그럼요. 취미로 하는 게 이래서 좋은 거죠.」

   나는 두 다리로 겨우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마셨다. 그리고 처음 만난 바텐더의 부축을 받으면서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바텐더는 내가 잠들 때까지 조용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바텐더에게 물었다.

  「그 토끼 귀랑 회중시계는 왜 차고 있는 거예요?」

  「이거 몰라요? 책 많이 안 읽었나보네요. 어렸을 때.」

  「네, 안 읽었어요. 남편이 한 때 책을 하도 많이 읽어서 보기만 해도 질리더라고요.」

  「그래도 이건 꽤 유명해서 알 텐데. 그거에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거기에서 나오는 토끼. 그 토끼가 회중시계를 차고 있거든요.급하다 급해. 이러면서 뛰어다니고. 그 토끼를 따라서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요. 이걸 차고 있는 건, 내가 너무 급하게만 살았었다는 그런 표시에요. 그래서 너무 많은 걸 놓쳤고, 소중한 걸 잃었어요. 동시에 목적도 잃었죠. 그래서 지금은 느긋하게 사는 토끼가 되었어요. 그런 거예요.」

  「나한테 해줬던 말은 다 자기 경험이었군요.」

  「사람들이 다 그렇죠. ‘내가 해봤는데’,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다 거기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드러내느냐 그러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는 거지.」

  「그렇구나. 그랬었구나….」

   나는 그렇게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다. 속은 쓰리고, 머리는 아프고, 바텐더는 어딘가로 사라진 후였다. 나는 밖으로 나가서 해장국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고, 돌아와서 다시 잠이 들었다. 점심 때 느즈막히 일어나서, 서점에 가서 코멕 메카시의 ‘더 로드’를 집어 들어 계산했다. 그 책을 고른 것은 제목 때문이었다. 내가 잃은 것이어서 내 눈에 띄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책을 들고는 어제의 그 술집으로 향했다. 바텐더는 아무 말 없이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일은 하지 않고, 그저 앉아서 사온 책을 읽었다. 책의 주인공은 바다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도착한 바다에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끝내는 죽어버렸다. 책을 골라도 이런 책을 고르다니. 그러나 나쁘지는 않은 책이었다.

   하루하루는 조용히 흘러갔다. 이따금씩 불현 듯 괴로웠고, 외로웠다. 그러면 나는 눈을 감고 고요히 고통스러워했다. 호텔의 체크인 기간이 끝나자 바텐더는 자기 집에서 지낼 것을 권유했다. 거기에는 책이 많았고, 영화가 많았고, 음악이 많았다. 나는 그것들을 간식 먹듯이 내키는 대로 꺼내보았다.

   15일 정도를 보냈을 때, 나는 확인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집 근처에 있는 흥신소에 전화를 걸어서, 그 사람이 흔히 들었을 말을 했다. 남편이 외도를 하는 것 같아서 이혼을 생각하고 있어요. 법정에 증거물로 제출할 만한 사진이 필요해요. 이백 만원을 입금할 테니 그만큼만 일해주시면 되요. 그 동안 아무 일도 없다면 그만 두시면 되고, 무슨 일이 있다면 한 번만 보내주세요. 흥신소에서는 일을 받아들여주었고, 나는 오전 11시에 그 쪽의 계좌에 입금을 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렸다. 매직박스가 열릴 때까지, 나는 바텐더와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서 드라이브를 하고, 거기에 가서 서로 말 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밥 때가 되면 눈에 들어오는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그리고 술집으로 가서 일을 했다. 손님들은 가게로 찾아와 태엽인형처럼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바텐더는 질리는 기색도 없이 손님들의 이야기를 받아주었다. 나는 가게에 앉아서, 흥신소에서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는 것에 안심을 하다가도, 무언가 커다란 게 다가오고 있는 건 아닐까하며 실체 없는 불안에 종종 부딪히기도 했다.

   그리고 매직박스는 여기에 온지 28일이 지났을 때 벌컥 열렸다. 우편물은 오전 11시에 날아 들어왔다. 나는 심호흡을 세 번 정도 하고, 내 앞에 있는 것들과 마주할 준비를 했다. 사진에 담겨있는 남편은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찍혀있었다. 병원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들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새로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나는 남편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이 사람은 자기가 몸 담았던 곳을 빠져 나오자마자 자기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는 걸까? 그 전에 있었던 일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생각해보면 예전부터 그랬다. 남편의 자리는 누군가 정해놓은 것처럼, 항상 준비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사진을 계속해서 넘겼고, 이윽고 허물어지게 되었다. 내가 쌓아두었던 방벽은 내가 마주한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연약한 것이었다.

남편은 내가 아닌 여자와 키스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