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는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는 그 어떤 침입자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티라노사우르스의 2배에 달하는 어금니는 사바나의 어떤 맹수도 손쉽게 뚫어 버릴 수 있죠.'


 "리돌, 밥 다 먹으면 이야기하라고 했지."


 배고프다는 듯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밥솥의 모양이 매우 애달파 보인다. 요새 밥솥이 배를 너무 많이 굶고 있는 듯 하다. 집에만 돌아오면 밥이 없으니. 나의 짜증섞인 추궁에 리돌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하였다.


 "제가 안 먹었습니다."


 이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거짓말을 해댄다. 저번에 닭도리탕 증발사건 이후로, 그래도 여자애고 하니 먹는 것에 거짓말하는 것을 한 번 눈감아 준 적이 있다. 그런데 한 번 그랬더니 이제는 내가 나갔다 와서 밥솥이 비어 있으면 무조건 자기는 안 먹었댄다. 참으로 이야기하기 애매한 부분인지라, 언제 같이 싸잡아서 이야기하려고 타이밍을 보고는 있는데, 그닥 틈이 보이지 않는다.


 '가끔씩 어린 하마가 무리를 이탈하는 경우 하이에나 무리에 사냥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 자란 하마를 사냥하는 것은 사자들에게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영화 좀 그만 보라고 잔소리를 한 지 거의 일주일. 요새 리돌이 채널을 고정하는 프로그램은 다큐멘터리다. 지금 TV에서는 사바나의 동물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흘러 나오고 있다. 처음에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냐고 찡찡대던 리돌도, 갑자기 TV에서 인간 아닌 다른 생명체가 나오자 눈에 불을 켜고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어보니, 달에는 동물의 존재가 전무하단다. 하긴, 달에 어떤 동물이 산다고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으니까. 동물도 없는데 사람이 어떻게 살아요 라고 묻지 마라. 나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 리돌이 보여주는 반응은, 어떤 나라에서나 아이들이 처음에 동물원에 가면 호기심 넘치는 눈빛으로 이게 뭐냐고 저게 뭐냐고 막 묻고 그러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아무튼 다큐멘터리로 고정된 TV에서는 어제는 북극곰과 바다코끼리의 생존에 관한 혹한의 영상이 나왔고, 오늘은 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리돌은 마치 영화관에 온 듯이, 간식으로 둔 땅콩을 먹고 콜라를 마시며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다큐멘터리를 관람하고 있다. 나는 심각하게 이건 이대로 괜찮은가를 고민하고 있는 중이고. 


 "민재, 북극곰과 하마가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TV에서는 사자 무리가 방금 한 마리의 하마를 제대로 사냥하지 못하고 쫓겨 나오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리돌은 그 장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마치 엄청난 감명을 받은 듯한 표정으로 급하게 나를 돌아보며 물어 보았다. 나는 한숨조로 대답했다.


 "걔네 둘은 만날 일이 없어, 리돌."


 "어째서입니까?"


 "어째서긴, 사는 데가 다르니까 그렇지. 북극곰은 북극에, 하마는 사바나에 사는데 어떻게 만나겠냐."


 리돌은 나의 이 설명을 듣고서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보냈다. 


 "북극과 사바나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가깝습니까?"


 "가깝습니까 가 아니라 멉니까 겠지. 너가 가면 얼마나 걸릴 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지구 사람들은... 보자, 비행기로 가도 한 여서일곱시간정도 걸리겠네."


 리돌은 갈수록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물론 그렇겠지. 일단 지구의 대략적인 넓이에 대해서부터 아예 감이 없을 것이고, 비행기가 얼마나 빠른지도 모를 테니. 나는 핸드폰으로 지도 어플을 켜서 보여줬다. 중심에 우리 집을 띄워서.


 "자, 여기가 우리 집이야?"


 리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화면 하나에 집 앞에 자주 같이 가는, 정정한다. 이 녀석이 유일하게 외출을 하는 곳인 슈퍼마켓까지 같이 나오게 배율을 조정했다. 


 "자, 여기가 그리고 슈퍼마켓이야. 너 여기까지 가는데 얼마나 걸리는 지 알지?"


 리돌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 가게까지 가는 데는 대략 5분 정도가 걸린다. 그리고 다시 지도를 줄였다. 우리집과 가게 사이의 거리가 먼지만하게 보일 때 까지. 여기서 리돌의 눈의 휘둥그레졌다. 대략 서울의 절반 정도가 화면 안에 들어왔다.


 "자, 이게 지금 우리 살고 있는 도시의 절반 정도야."


 그리고 대한민국이 완전히 나오게 지도를 다시 줄여서 말 없이 손가락으로 거리가 멀다는 제스처를 취한 다음, 세계지도를 한 바퀴 돌려 줘 보였다. 그리고서는 북극과 아프리카가 나오게 화면을 조정했다. 사실 이렇게 설명하려고 하니 나도 헷갈린다. 


 "봐, 우리나라가 진짜 작은 편인데 크기가 이만큼이야. 그런데 우리나라가 코딱지만큼 보일 정도로 줄였는데도 이렇게나 멀어. 어떻게 가겠냐?"


 리돌은 동공이 풀린 채, 입을 쩍 벌리고 나를 쳐다 보았다. 그래, 이해가 전혀 되지 않으시겠지. 사실 나도 이렇게 자신감넘치게 설명을 해 줄 수 있는건, 그래도 고등학교때 과학 시간에 그렇게 많이 졸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구 표면적이 달의 몇배이고 어쩌고 하는 것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최소한 달이 지구보다 한참 작다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보십시오. 사자가 짝짓기를 하고 있군요.'


 나를 쳐다보는 리돌의 뒷쪽에 혼자서 제 본분을 다 하고 있는 TV 화면에서는, 참으로 민망하게도 짝짓기를 하는 장면이 송출되고 있었다. 지금 리돌이 나한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하게는, 나한테 신경이 집중되었다기 보다는 동물들의 배틀로얄이 성사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 같지만.


 "그럼 못 싸우는 겁니까?"


 "그래. 너 같으면 한 번 싸우려고 다섯시간 여섯시간 걸어가야 겠어?"


 물론 이야기의 논제는 그것이 아니지만 뭐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하나 싶어 대답을 대충 해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이 녀석은 이 말도 안 되는 대답에 납득을 해 버렸다는 것이다. 리돌은 마치 굉장한 공감대를 형성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상관 없을라나. 


 "이해했습니다. 민재."


 엄청난 오해로 만들어진 이해관계 뒤에, 리돌은 다시 TV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화면에서는 암사자와 숫사자의 진한 베드신이 계속되고 있었고, 나는 잽싸게 리돌의 옆에 있던 리모콘을 낚아채어 채널을 돌렸다. 분명히 이 윗채널도 다큐멘터리였던 것 같은데.


  '흰등고래의 짝짓기 장면은 흔하게 발견되는...' 


 아니, 왜 다큐멘터리 채널이 죄다 짝짓기로 도배가 돼 있어? 성인 채널을 잘못 돌렸나? 나는 왜 채널을 바꾸냐는 말을 온통 찌뿌린 표정으로 대신하는 리돌을 무시하고 다시 채널을 올렸다.


 '...를 합니다. 어쩔 때는 며칠이 걸리기도 하지만, 검은발 살쾡이는 끈기있게 쥐가 나오기를 기다립니다.'


 다음 채널에서는... 뭐야, 저거 완전히 고양이 아냐? 고양이와 거의 흡사하게 생긴 살쾡이가 수풀 사이에 앉아 구멍을 노려보고 있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이름은 살쾡이라고 나와 있는데, 보통 우리나라에서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고양이보다 훨씬 작고 보들보들해 보인다.


 '검은발 살쾡이는 보통 한두마리의 새끼를 가집니다. 지금 어미가 아이들에게 먹이를 잡는 훈련을 위해서 쥐를 물어왔습니다.'


  이야, 완전 귀엽잖아, 저거. 나는 채널을 더 돌릴 생각을 하지 못하고 TV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나뿐만 아니라, 리돌 역시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리돌은 어제 북극곰을 보았을 때 보다, 오늘 하마를 보았을 때 보다 더욱 커다란 눈으로 저 고양잇과 동물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눈빛이 사뭇 다르다. 하긴, 어제 오늘 보았던 북극곰과 하마, 사자 등등은 맹수고, 영상 자체도 비정한 약육강식의 세계를 조명했다면, 지금은... 그냥 유X브 고양이 채널 같다. 카메라의 시선은 느긋한 노래에 맞춰, 귀여운 아기고양이들이 풀밭에서 뛰노는 모습을 평화롭게 비춰주고 있었다. 

 리돌은 총 맞은 듯한 표정으로, 홀린듯이 나에게 질문하였다. 표정이 막 지금이라도 화면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깨물어 주고 싶고 껴안아 주고 싶은 표정이다. 아무래도 새끼동물, 특히 고양이의 귀여움은 온 우주를 관통하는 것 같다. 


 "민재, 민재. 저 동물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리돌만큼이나 나도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는데도, 방금 전에 동물 이름을 이야기해 준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래서 마치 못 들은 체 화면을 멍하니 주시하는 척 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이름이 나오지 않을까 하고.


 "민재."


 기다릴 새도 없이, 리돌은 내 소매를 마구 잡아당겼다. 그래서 나는, 아까 그러했듯이 대충 대답해 줄 수 밖에 없었다.


 "응? 으, 응. 고양이야, 고양이. 저건."


 "고양이입니까?"


 "그래, 고양이."


 '검은발 살쾡이의 행동영역은...'


 이야기가 끝나자 마자 이름이 튀어 나올게 뭐냐. 사람 뭐 팔리게. 나는 황급히 리돌에게 잘못된 지식을 수정해 주려 하였으나, 리돌은 고개를 숙이고서는 '고양이, 고양이' 하며 계속 이름을 되뇌이고 있었다. 뭐, 어떠랴. 어차피 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녀석들이고, 저렇게 생긴 게 고양이라고 해도 틀린 건 아니니까. 


 나는 이 이름을 알려주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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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일이 있어서 까먹을것같아 미리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