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를 찾은건 순전한 우연의 일치였다. 친구와 소주를 한 잔 걸치고 입에서 토사물을 게워내지 않았다면. 어지러움에 길을 잘못들어 처음 보는 골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리고 내가 머저리처럼 골목의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히고 기절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 장소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그 바를 찾았다기보다는 그곳이 나를 찾았다는 표현이 알맞을 것 같기도 하다. 


껍질이 닳은 가죽 소파와 공기 중에 떠다니는 에탄올의 향기. 도시의 오물이 널린 콘크리트 골목.

바 미드나이트. 이미 자정이 지나고 세시가 다 되어갔지만, 간판에 달린 네온사인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



숙취 때문인지 전봇대 때문인지 머리가 욱신거려왔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토사물의 감촉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상 외로 나를 반겨주는 것은 어느 여성의 목소리였다.


“이제 정신이 드시나보네요, 손님.”


식도가 불에 타는듯 따끔거렸다. 목구멍 안쪽에 무언가가 걸린 것 같아 몇번 기침을 해보았지만, 그저 목이 말랐던 것 뿐이었다.


“물…”


“원래라면 물도 이곳에서는 유료지만, 오늘은 그냥 드리죠. 어차피 술을 사실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니까요.”


한 손을 들어 허우적대자 유리잔이 잡혔다.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헷갈릴 정도로 물을 들이키고 나니 비로소 갈증이 가라앉았다. 나는 자꾸 감기려는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앞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길게 내려온 흑발과 꼭 감은 눈. 그리고 와이셔츠 위에 걸친 검정 튜닉, 바텐더복. 잔에 남은 물을 입에 털어놓은 후 앞에서 깐죽대는 여자를 노려보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입을 열었다.


“물론 돈을 내시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저희 가게가 사정이 빠듯해서.”


“여긴 어딘가요?”


“글쎄요. 여기엔 술도 있고, 주크박스도 있군요. 저기에는 바 테이블도 있고, 심지어 저는 바텐더복까지 입고 있습니다. 여기가 대체 어디일까요?”


“…그러니까, 어디 있는 바인지 묻고 싶었는데요.”


나는 잔을 소파의 손잡이에 두고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현기증에 지끈거리는 머리가 더 아파왔다.


“저희 바 미드나이트는 세종로에 들어서서 두번째로 있는 오른 골목에 있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손님께서 이마를 박고 쓰러진 전봇대 바로 앞이죠.”


“지금까지 본 바텐더중에서 제일 친절하시네요.”


바텐더가 소파에 올려져있는 유리잔에 다시 차가운 물을 부었다.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한번 까딱이고는 그녀를 바라보니 그제야 이상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이 지나치게 밝은 것도 아닌데도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좀 더 필요하십니까?”


“주신다면 감사히 받죠. 적당히 마실걸 그랬어요. 마실 때마다 이런다니까요.”


“술. 한 잔이 적당하고, 두 잔은 부족하지만 세 잔은 넘치죠. 자, 여기 있습니다.”


두번째로 냉수를 입에 머금자 목구멍 뒷쪽에 감돌던 시큼한 냄새가 사그라들었다. 물을 마시고 나면 두통이 가실거라 생각했지만 갑자기 차가운 물을 마셔서일까. 오히려 골이 울리는 느낌은 더 심해졌다. 나는 다시 소파에 주저앉아 마른 세수를 했다. 푹, 하고 소파의 쿠션이 꺼지는 소리가 났다.


“괜찮으십니까? 원하신다면 구급차를 불러드릴 수 있습니다.”


“구급차까지야. 그냥 조금 앉아있다보면 나을 거에요.”


“마침 심심하던 터인데, 잘됐군요. 술도 깨실겸 저와 어울려 주시겠습니까?”


바텐더가 내 손에 들린 잔을 낚아채었다. 나는 어느새 바 테이블의 안쪽으로 들어간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오늘은 토요일이고, 회사도 쉬는 날이니 이곳에서 시간을 때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 * * *



잔에 담긴 선홍색 액체가 나를 비웃듯이 바라보았다. 적당히 마시겠다고 다짐한지 10분. 아무래도 의지박약을 의심해보아야 할 것 같다. 


“블러디 메리입니다. 해장술로도 유명하니 한 잔 정도는 나쁘지 않을겁니다.”


“…한 잔 정도는.”


토마토 주스 같이 걸쭉한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토마토 냄새와 향신료에 파묻혀 알코올의 향기가 연해지기는 했지만 아예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잔의 3할 정도를 비우고 바텐더를 바라보자 그녀가 뭘 보냐는듯 어깨를 으쓱였다.


“눈은 왜 감고 있는건가요?”


“언제 물어보시나 궁금했습니다. 떠도 의미가 없으니까 감고 있답니다.”


바텐더가 닦던 유리잔을 찬장에 올려놓고는 다른 잔을 손에 쥐었다. 그녀는 새하얀 냅킨으로 잔을 구석구석 닦더니, 그것들을 테이블 위에 던지다시피 올려놓았다.


“그러면 눈이-“


“예.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말을 멈추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호기심에 손을 그녀 앞에 흔들어보이자, 바텐더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테이블을 툭툭 쳤다.


“눈은 멀었지만 귀는 멀쩡합니다. 저희 바는 이성적인 손님은 내쫓지 않지만, 늘 예외는 있는 법이랍니다.”


“어, 미안해요.”


지금쯤 내 얼굴은 잔에 들은 술만큼이나 붉어졌을 것이라 생각하며 나는 술을 한모금 더 홀짝였다. 다행히도 바텐더가 달아오른 얼굴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어색한 침묵이 얼마간 계속되자 바텐더가 혀를 작게 차더니 또다른 잔을 하나 꺼내었다. 이번에는 얼음을 넣고는 호박빛 액체를 부은 그녀가 요란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손님. 지금까지 그런 짓을 했던 사람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까 신경쓰지는 마십시오.”


“…네.”


“하지만, 다른건 몰라도 동정은 하지 말아주면 좋겠습니다.”


갑자기 들어온 미지근한 술 때문일까. 유리 조각상처럼 투명했던 얼음에 새하얀 금이 갔다. 얼음이 깨진 소리를 들은 바텐더가 유리잔을 이리저리 기울이자 안에 담긴 액체에 작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평소 바를 열 때는 술을 마시지 않는게 원칙이지만... 하루 정도의 일탈도 나쁘지는 않겠죠. 건배?”


“건배.”


그녀가 들어올린 잔과 절반 정도 술이 남은 나의 잔이 닿았다. 유리잔을 단번에 비우고 나니 쓰라린 속이 진정되는 것 같다.


아이러니하다. 술 때문에 상처가 난 속을 술로 진정시키다니. 이게 잘하는 짓일까.


“어딘가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원래 건배는 서로의 잔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한 행동이라는군요. 잔을 세게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술이 더 많이 섞일수록 더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표하는겁니다.”


“전혀 섞이지 않았네요.”


“당연한 일입니다. 생면부지인 타인의 타액이 섞인 술을 마시는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손님이 마시고 계시는 블러디 메리도 제가 만든 술 아닙니까?”


눈 깜빡할 새에 바텐더의 잔이 비었다. 목구멍에 들이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술을 들이킨 그녀가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잔에 든 얼음 조각을 입에 물었다.


“은근히 뒤끝이 있으신가봐요.”


“자주 듣습니다. 저는 장난으로라도 성격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사람이거든요.”


아드득. 어금니로 얼음을 부순 그녀가 잔을 놓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뭘 했다고 벌써 4시인지. 아무리 주말이라고 해도 잘 시간은 한참 넘었군요. 슬슬 바도 닫아야하니, 일어나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아직 전봇대와 충돌한 이마가 욱신거리기는 하지만 참을 수 있을 정도다. 아마도 자취방에 도착할 때 즈음에는 동이 트기 시작할 것이고, 나는 소중한 주말을 드러누워서 보내게 될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바텐더의 얼굴을 보자, 무심코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서우재에요.”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만한 감정이 드러났다. 당황. 곧 바텐더는 풋, 하고 작게 웃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바텐더와 손님 사이의 통성명은 썩 좋은 일이 아니지만... 이 쪽만 손님의 이름을 아는건 불공평하겠죠. 바 미드나이트의 바텐더, 한선화입니다.”


검은 색 바탕에 금빛 글씨가 쓰인 명함을 지갑에 고이 넣어둔 후, 나는 비틀거리며 바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앉아있을 때에는 많이 취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술이란 것들은 들어가고 나서 사람을 잡는다.


“즐거운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마신 것들은 가게에서 내는걸로 하죠.”


“고맙네요, 바텐더 씨. 좋은 주말 보내세요.”


“이런. 이름까지 알려드렸는데도 ‘바텐더 씨’라니. 손님들 중에서도 제 이름을 아시는 분들은 드문데요.”


“벌써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거리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재미있다는듯이 웃어보였다. 감은 눈 위의 눈썹이 은근하게 올라갔다. 바의 문이 열리며 딸랑, 작은 종소리를 내었다. 


“거리감이라면, 얼마만큼의 거리감입니까?”


“글쎄요. 섞이지 않은 술만큼의 거리감이죠.”


이번에는 그녀의 눈이 확실하게 호를 그리며 휘어졌다. 마지막으로 바텐더를 향해 과장되게 인사를 하고는 바를 나서자, 시원한 새벽녘의 바람에 그녀의 목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은근히 뒤끝이 있는 손님이군요.”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