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이 제부도에서 다시 남원시로 가는 길에도 패배의 충격은 여전했다. 자기 자신을 자책하기도 했으며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부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회 결과는 이미 돌이킬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진실. 강찬은 허탈감을 느꼈다.

 

강찬은 버스를 타고 집에서 내리려고 멍하게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엄마가 하는 헌책방 일을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자신의 엄마가 헌책방에서 일해서 자신을 데려주지 못했다는 것도 까먹은 것이었다. 강찬이 그대로 다시 자리에 앉아 버스를 타고 쭉 갔다. 

 

강찬이 버스에서 내려 헌책방에 들어갔다. 발걸음을 터덜터덜 옮기면서 무심하게 인사를 뱉었다.

"다녀왔습니다."

"어, 왔어? 대회는 잘 됐어?"

"에휴... 아니요."

강찬이 한숨을 쉬며 쳐진 목소리로 말했다. 강찬의 어머니는 그의 말에서 대회 결과를 슬쩍 눈치채고 별 말 없이 넘어가주었다.

"그렇구나. 그건 그렇고, 저기 저 책들 좀 옮겨줄래? 그리고 오늘은 별로 할 일 없으니까 그것만 하고 집에 가도 돼."

강찬은 그 말에 천천히 책들이 쌓여있는 곳으로 갔다. 고물상에서 산 책들과 고객에게서 산 책들이 여러 뭉치가 놓여있었다. 강찬이 책을 나름대로 열심히 옮겼다. 조금씩 팔이 저려왔지만 그보다 더한 심리적 고통이 몸을 비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리적인 아픔은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강찬은 마지막 뭉치를 옮기던 도중 책을 떨어뜨렸다. 팔 힘이 받쳐주지 못하니 그럴 만 했다. 강찬이 바닥에 흩뿌려진 책들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웬 쓸데없이 고급진 가죽커버가 씌여져 있는 책이 자기 발을 찧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작은 소리로 한탄했다.

"씨바..."

 

 

그 책들을 전부 옮기고 강찬이 헌책방을 나와 다시 버스를 타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강찬은 침대에 엎어져 축 쳐진 미나리가 되었다. 강찬이 모든 것이 다 귀찮아져 기운 없이 잠이나 자려는 순간 전화벨이 강찬을 방해했다. 강찬이 살짝 짜증나게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박태오였다. 강찬이 대회 패배 이후 계속 자기 가방에서 울려퍼지던 착신음이 떠올랐다. 그래서 신세나 털어놔보자는 심정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태오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오, 받았다!"

강찬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태오가 말을 이었다.

"너 혹시 쇼크먹었냐?"

"그렇다 어쩔래."

강찬은 아직도 무기력해있었다. 전화도 침대에 누워서 받을 정도였다.

"너 102강전 떨어졌다고 쇼크먹은 거야?"

"그래, 내 실수로 전부 다 망쳐버렸다고. 이제 뭘 해야될 지 모르겠어! 됐어?"

강찬이 무심코 신경질적으로 뱉었다. 평소였으면 이런 말을 한 다음 미안하다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태오의 말은 강찬의 예상 밖이었다.

"뭐 하긴 뭐 해, 패자부활전 하면 되지. 너 정도면 그런 건 간단하지 않나?"

 

패자부활전. 예전에는 별 감흥이 없었던 5글자의 단어가 강찬의 머릿속을 관통해 파고들었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유일한 희망이자 자신보다 먼저 탈락한 연재도 준비하고 있던 것, 그러나 경쟁률이 치열해 애초에 후보로 생각조차 않았던 길이 강찬에게 하늘이 내린 유일한 기회로 보였다.

강찬이 말했다.

"아, 패자부활전! 그거면 되겠다!"

"그래, 여기서 네 실수를 만회해야지!"

"이야, 고맙다.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강찬의 기운이 순간적으로 차올랐다. 패자부활전이라면 또다시 1위를 노려볼 가치가 있었다.

"그보다도 너는 원래 8강에 가지 못하면 낙제잖아? 그니까 당연히 할 거 아니었어?"

태오가 무심결에 강찬에게 팩트를 날렸다. 강찬이 생각해보니 이번 대회에 참여한 것도 부진한 마법성적을 때우기 위함이었다.

"아 맞다, 져버려가지고 전부 다 잊고 있었어."

아무튼 그렇게 강찬이 희망을 되찾았다. 그리고 희망적인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강찬이 태오가 얼마나 많이 전화했었는지 갑자기 미안해지기도 하고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통화기록을 열어보았다. 박태오에게서 온 전화는 모두 12번이었다. 강찬이 이 정도 전화했으면 질리지도 않냐며 감탄했다. 한편 12번의 부재중 전화 사이에 또다른 동료인 주연재가 끼어있었다. 전화는 2번 걸었었다. 그래서 바로 걸어주었다.

 

연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받았다. 연재가 말했다.

"왜 이제야 전화하냐?"

연재는 인터넷 방송으로 송출된 강찬의 얼굴을 보고 그 표정에 숨은 뜻을 파악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더욱 걱정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화면에서 강찬이 퇴장한 때를 맞춰 전화를 걸었으나 2번이나 걸어도 받지 않자 포기해버린 것이었다.

"내가 워낙 충격을 많이 받았잖아."

"하긴 방송 보니까 우승자 보여준 다음에 전체 경기장 한 번 비춰줄 때 네가 그동안 계속 멍하니 서있는 걸 봤는데 어떻게 모르겠냐."

"그보다도 이제 패자부활전이다!"

"근데 너 왜 이렇게 하이톤이냐?"

연재가 분명히 맥빠져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습이 아니라 그 반대인 걸 알고 순간 당황했다. 강찬이 말했다.

"그때는 길이 없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길을 알아냈잖아."

"뭐... 나는 원래부터 알아냈지만."

연재가 이제서야 알아냈냐는 별 감정 없는 어조로 말했다. 강찬이 이어말했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협력이네. 이제부터는 완전히 함께잖아? 하긴 함께라면 혼자보다는 나으니까, 안 그래?"

"그렇네, 확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