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탄로났습니다. 왕국 근위군이 움직이고 있어요!”


천막의 휘장을 거칠게 제치며 한 남자가 뛰어들어와 외쳤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벌떡 일어나며 두서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어떻게? 어디서 오고있지? 숫자는 몇이지?


"우리에게 동조했던 군단들은 어떻게 됐지?"


그의 옆에서 한 여자가 벌떡 일어나며 손을 한번 휘저어 좌중을 진정시킨 다음에 뛰쳐들어온 남자에게 들었다. 남자는 침묵하며 고개를 저었다.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여자는 이를 한 번 갈며 그를 쳐다보았다. 마치 대답을 기다리듯이.

그는 문득, 어느새인가 천막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결정을 해야한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에와라닐?"


여자가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에와라닐?"


"일어났네. 그만 불러도 좋아."


“세상에. 역시. 괜찮아요? 어디 아픈 데는 없고? 팔은 괜찮나요?”


에와라닐은 대답하며 눈을 살짝 떴다. 그의 머리 위로 엘로니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에와라닐은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시 침대 위에 길게 누으며 약간의 신음을 흘렸다. 다시 누운 그의 위로 또다른 목소리가 흘렀다.


"린트부름의 독이 너무 많이 퍼졌어요. 인간이였으면 진작에 죽었을겁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빌어먹을. 페리투스."


엘로니아의 얼굴 위로 싱긋 웃는 트루드의 얼굴이 보였다.  그다지 반갑지는 않은 얼굴이였다.


“이야, 에와라닐. 정말 오랜만이네요. 한 5년 쯤?”


“그 정도 된 것 같군.”


“정말 놀랐어요. 당신이 다시 활동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놀라운데 린트부름에게 당해서 여기까지 실려오다니. 어디, 피투성이 검사의 이름이 울겠는데요. 에와라닐. 왕년의 당신이였다면 말이죠? 이정도쯤은…”


“피투성이 검사? 하발란드에서도 같은 말을 하던데요. 피투성이 검사 에와라닐.”


페리투스가 쏟아내는 말에 엘로니아가 관심을 보이며 말했다. 페리투스는 그런 엘로니아를 보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까지 끼고 말이야. 에와라닐. 당신 능력 좀 있군요? 아가씨. 피투성이 검사라는 별명은 말이야, 7년 전에…”


“그만하지.”


에와라닐의 목소리가 울리자 실컷 떠들어대던 페리투스는 웃음기와 함께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있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잠깐동안의 침묵을 깨고 페리투스는 말했다.


“에와라닐. 알 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당신이 좋았어요. 6년 전에도. 그리고 그 전에도.”


그는 말을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귀에 삐 - 하는 이명이 들릴때 까지. 방 안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누워있었지?”


“얼마 안 됐어요. 한나절 정도?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 걸요.”


“그래. 고맙네.”


“시간상으로 생각해보면 여기가 하르펜테인가보군?”


“맞아요. 페리투스라는 남자가 저희를 발견해서 이곳으로 데리고 왔어요. 젠장. 저는 당신이 진짜 죽은 줄 알고…”


“공부는 더 하는게 좋아. 린트부름의 독은 신경독이다. 대신에 독성은 그렇게 대단치 않아. 린트부름에게 물렸다고 쉽게 죽지는 않네. 하기사, 벌써부터 죽었다면 많이 곤란했겠군. 옛 폐허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는데 말이야.”


“저는…당신이 죽은줄로만 알고…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해요?”


엘로니아는 소리쳤다. 목소리에는 약간의 울먹임이 섞여있었다. 에와라닐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곧 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쾅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엘로니아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보인 건 요새의 여행자숙소를 가득 메우고 있던 요새 수비대원들의 모습이였다. 제각기 한 덩치 하는 인간과 트루드들을 피해 잠시 갈 곳과 눈 둘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엘로니아의 뒤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말을 걸어왔다.


“당신이 저 피투성이 검사와 함께 왔다는 사람인가?”


말과 함께 투박하게 거대한 손이 어깨 위에 놓여졌다. 엘로니아는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끝까지 뒤로 젖혀야 얼굴이 간신히 보일정도의 장신의 트루드였다. 하발란드의 요새수비대임을 나타내는 하얀색 방패 문양이 가슴팍에 선명하게 새겨져있었다.


“그런데요?”


“우리가 당신 친구에 대해서 아주 관심이 많아서 말이야.”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우리 이야기나 좀 하자는 거지.”


트루드는 그렇게 말하며 요새수비대들이 모여있는 홀의 한 가운데 비어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 주변을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는 수비대원들의 모습에 살짝 질린 엘로니아가 잠시 머뭇거리자 엘로니아의 등 뒤에 서 있던 트루드는 어깨에 올려놓은 손을 밀었다.


“자. 해치지 않아. 가자고.”


“친구. 내 용무가 먼저인데, 기다려주지 않겠나? 피투성이 검사한테 볼 일이 있으면 본인에게 직접 묻고.”


수비대들 사이에서 방금까지 방에 함께 있던 남자인 페리투스가 걸어나오며 말했다. 야유가 쏟아졌지만 페리투스는 아랑곳않고 다가와 엘로니아의 앞에 서 그녀를 밀던 트루드와 마주섰다.


“페리투스. 제 아무리 네놈이 감찰관이라 해도 여기는…”


“여기는 뭐? 너희들 구역이다 이 소리야?”


“요새의 주인께서 아신다면…”


“요새의 주인이 알면? 협박하는건가? 그럼 한번 따지고 보자고. 떼 지어서 인간을 겁박한 게 더 잘못인지, 아니면 겁박당하는 인간을 빼내는 게 잘못인지. 가서 한번 요새의 주인에게 말해봐.”


페리투스와 마주보던 수비대의 입에서 거의 맹수의 으르렁거림과 비슷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페리투스는 그러는 수비대의 손을 들어 엘로니아의 어깨에서 치운 다음에 엘로니아에게 말했다.


“자리 좀 옮겨야 할 거 같아. 아가씨.”



“험한 꼴 당하게 해서 미안하군. 내가 대신 사과하지. 저 치들도 그렇게 나쁜 친구들은 아니야. 다만…”


페리투스가 엘로니아를 이끌고 들어온 곳은 에와라닐이 있던 바로 위층의 방이였다. 방은 널찍하고, 깨끗했다. 주변에 정리되어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페리투스의 방인들 싶었다. 엘로니아는 잠시 바닥을 쳐다보다가 페리투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만?”


“흠… 피투성이 검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 내 말은, 아가씨와 함께 다니고 있는 에와라닐이라는 자에 대해서 말하는 거야.”


엘로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페리투스는 잠시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며 머뭇거렸다. 그런 페리투스를 쳐다보며 엘로니아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감사 인사를 못했네요. 감사합니다. 이 요새로 데려다 주신 것과, 그리고 방금 저를 곤란한 상황에서 구해주신 것요.”


“아니야, 아가씨. 당연한 일 인걸. 어제는 조금 놀랐어. 다행히도 내가 요새로 향하던 길 이기는 했지만, 발견하지 못했으면… 뭐 큰일나지는 않았을 거야. 트루드는 독으로는 잘 죽지 않으니까. 그 양반을 업고오느라 어깨가 좀 쑤신데, 치료비라도 청구해야하나.”


“방금 안 건데, 이 요새 사람이 아니신가봐요? 수비대와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고. 복장도 그렇고.”


페리투스는 싱긋 웃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찬장으로 가 술병을 손에 쥐고는 돌아와 탁자 위에 내려놓고 다시 앉으며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가씨. 나는 하발란드의 요새 감찰관이야. 하발란드의 손에 닿는 요소들을 떠들면서 상태를 점검하는 게 내 일이지. 요새들을 가만히 내버려두면 용병들에게 결탁하는 일도 있고, 도적떼하고 결탁해서 황무지를 지나는 거상들을 털어먹는 일도 있거든. 뭐 그런 게 아니더라도, 요새 관리를 소홀히 하면 요새의 관할구역 내에서 괴물들이 판을 쳐서 말이야.”


“엘로스 니아젤.”


“응?”


“제 이름이에요. 엘로니아라고 불러요.”


“엘로니아는 조금 길고, 니아젤 아가씨라고 부르지.”


“니아젤 아가씨가 더 긴데요?”


엘로니아는 의문을 제기했지만 페리투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탁상 위에 엎어져 있던 술잔들을 돌려놓고 자신과 엘로니아의 앞에 하나씩 두었다. 그러고는 술병을 따 내용물을 따르며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여하튼. 니아젤 아가씨. 아까 하던 말을 계속 하자면, 에와라닐은 위험한 사람이야. 피투성이 검사라는 별명이 왜 붙었는지 알아?”


“아뇨.”


“뭐 사실, 그렇게 좋은 별명은 아니야. 니아젤 아가씨. 황무지에서 검은 잘 안쓰이는 무기지. 휴대성이 좋은 것 말고는 다른 무기들에 비해 좋을 게 하나 없거든. 찌르고싶으면 창을 쓰면 되고, 찍고싶으면 도끼를 쓰면 돼. 베는 것 정도는 더 좋을 수 있겠지만, 가죽이 두터운 괴물한테는 별로 좋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황무지에서 검이 쓸모있는 대상이 하나 있어.”


“뭐죠?”


“두 발로 걷는 괴물.”


엘로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페리투스는 자신의 잔을 들어 단숨에 비우고는 다음 잔을 따르기 시작했다. 엘로니아도 찬찬히 잔을 입에 가져다대며 말했다.


“그렌델같은 사람형 괴물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야. 아가씨. 인간과 트루드지.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이는 괴물 말이야. 황무지를 넘어서서 전 세계에서 사람을 제일 많이 죽이는 괴물.”


엘로니아는 고개를 살짝 틀며 모호한 눈빛으로 페리투스를 쳐다보았다. 


“그래. 뭔지 알겠어?”


“음… 이거… 굉장히 독한데요? 매워요.”


엘로니아는 능청스럽게 다른 소리를 주워삼겼다. 페리투스는 피식 웃으며 받아주었다.


“아, 그래. 그건 엘림 왕국의 거상들에게서 받은 물건이야. 인간들이 더 독한 술을 마신다니까. 그 친구들 말로는 불 붙이면 붙는다고 하던데.”


페리투스의 말에 엘로니아는 인상을 쓰며 술잔을 빤히 쳐다보았다. 페리투스는 그런 엘로니아를 잠시 지켜보다가 말리며 말했다.


“진짜로 불 붙여볼 생각은 말라고. 여하튼, 에와라닐은 사냥꾼이긴 했지만… 방금 말한 두 발로 걷는 괴물을 사냥하는 사냥꾼이였어. 우리들이 흔히 말하기로는…”


“셀소드?”


“그래. 용병으로 부르는 자들이지.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작자들. 에둘러 말할 필요 없지. 에와라닐은 사냥꾼이 아니라 용병 출신이야. 피투성이 검사란 별명도 용병 일 하다가 생긴 별명이지. 어느 거상에 고용되서는, 황무지의 북부 대로를 지나면서 거상을 노리던 도적과 그와 결탁했던 수비대들을 말 그대로 갈아버렸다더라고. 페스카나에서 출발한 거상이 황무지 최북단의 릴레니스에 도착했을 때, 피칠갑을 한 채로 잔뜩 겁에 질린 거상의 행렬 제일 앞에 서 있었다고 해. 그 때부터 릴레니스의 사냥꾼들과 용병들에게서 피투성이 검사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지.”


“얘기만 들으면 그다지 위험해보이지는 않는데요? 저는 오히려 에와라닐이 6년 전에 있었던 요위들의 범람에서 활약했언 영웅이라고 들었어요.”


페리투스의 이야기를 듣던 엘로니아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엘로니아의 말에 페리투스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 뿐만이였으면 방금 요새 수비대 친구들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겠나? 요위들의 범람 이전까지 에와라닐은 황무지의 여덟개 자유도시 중 여섯개에서 살인과 강도, 방화로 그 목에 도합 1000개의 금화가 걸려있었지. 뭐, 대부분은 그 악명에 기초해서 다른 무법자들이 저지른 죄를 덧씌운 것일테지만. 확실한 건, 에와라닐에게는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거지. 뭐, 요위들의 범람의 공과로 그 현상금도 싹 날아갔지만.”


“에와라닐은 당신을 아는 모양이던데요. 당신도 그렇고.”


“저런, 들켰나? 나와 에와라닐 사이의 일은 에와라닐의 동의 없이는 함부로 말해줄 수 없는 그런 일이라서. 한 가지 말해두자면, 나 역시 요위들의 범람에서 에와라닐과 함께 싸워봤었어.”


페리투스가 말하자 엘로니아는 순간적으로 눈을 빛냈다. 엘로니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식간에 페리투스가 엘로니아를 올려보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페리투스는 그저 허리를 폄으로써 눈높이를 다시 맞췄다. 엘로니아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위들의 범람에 함께 있었다고요? 그러면 에르키엔을 아나요? 에를레인 데키엔? 하발란드의 에르키엔을?”


“데키엔. 에르키엔. 알지. 한 때 내 우상이였는걸. 창 두 자루로 뚫려버린 요새의 문을 요위의 시체로 다시 막아버리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해. 근데, 에르키엔은 왜? 아직 하발란드에서 사냥꾼으로 있을텐데?”


엘로니아는 흥분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에르키엔은 지금 폐허로 들어갔어요.”


“폐허? 폐허는 지금 페스카나가…”


“알아요. 자유도시가 폐허를 봉쇄했죠. 저는 에르키엔을 찾기 위해 에와라닐과 함께 폐허로 가는 길이에요.”


“에와라닐과? 아니 에르키엔은 왜 찾으려는거야?”


“에르키엔은 제 어머니에요. 아뇨.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요. 생물학적 어머니란 소리는 아니에요.”


“그러고보니, 에르키엔한테 딸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었는데, 그게 아가씨, 너였구나.”


페리투스는 그렇게 말하고 흥미로움 반, 걱정스러움 반 섞인 눈빛으로 엘로니아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찬찬히 입을 떼었다.


“좋아. 에르키엔에게는 진 빚도 있으니까. 폐허의 초입까지 같이 동행해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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