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으리. 제발 조금만 더 말미를 주십시오."


"이미 지난 한 달간 말미를 더 주었지 않는가. 자네가 무얼 더 옮길 것이 남았다고 그러는가?"


구군복을 입은 군관은 그에게 그동안 말미를 충분히 주었다 하여 당장 나갈 것을 요구했고, 거칠디 거친 흰 옷을 입은 남자는 마지막으로 한 번의 말미를 줄 것을 절절하게 요청하고 있었다.


"주상께서 새로이 궁을 조성하시려는 자리에 자네 집이 있어 궁을 조성할 수가 없다네, 나라에서 그에 맞게 보상을 할 터이니, 이 집을 내일까지 비우고 지정된 곳으로 이동하게."


"3대를 이어온 땅과 집이 다 여기에 있는데 그걸 다 버리고 타지로 가라니요. 그 정도 보상금으로는 턱도 없습니다. 땅은커녕 집도 못 사는데 저흰 그냥 죽으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


군관도 형편없는 보상금에 대해서는 익히 들아 알고 있었고 원래 성정이 모질지는 못하였던지라, 다른 군관들이 그러듯 뭐라 소리를 지르지는 아니하였다.


황제는 처음에 조서를 내릴 때, 궁궐을 짓느라 헐리는 집에 대한 보상금을 명확히 명시하지 않고 그저 합당한 정도의 보상금을 주겠다고만 하였다. 


민가에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는 인종 황제께서도 고조 광황제의 능을 조성하실 때 군민들을 내쫓고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으셨던 터라, 별궁이 지어지는 곳 인근의 백성들은 설마 하면서도 보상금에 대한 기대가 나름 있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철거가 진행되기 얼마 안 되었을 때, 드디어 보상금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4개의 등급 중에서 큰 집을 지닌 자는 무명 30필, 중간집은 무명 20필, 작은 집에는 무명 10필, 아주 작은집에는 무명 5필의 보상금이 주어졌다.


80필~100필 정도인 노비 1구조차도 살 수 없는 돈이었다.


당연히 기존에 재산이 어느 정도 있었던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새로 이주하는 곳에서 다시 집과 땅을 사는 건 꿈도 꿀수 없었다. 


별궁 인근의 군민 대다수는 사실상 신량역천(신분은 양인이나 천한 일을 하는 자들)과 다를 바 없는 신세에 놓이게 된 것이다.


"나으리, 제발..."


아직 집이 헐리지 않은 이들은 이웃들이 피눈물을 흘리는 꼴을 보아 왔던지라, 갖은 핑계를 대며 철거를 미루어 시간을 끌며 최대한 집을 보전하려 했다.


그로 인해 별궁 공사에는 잠시 차질이 생겨 거의 완공된 별궁은 여러 건물들이 지어지지 못해 무언가가 허전하였다.


결국 크게 노한 황제는 군관을 보내어 강제로라도 그들을 내쫓고 그 집을 허물어 버리라고 명령했다.


처음에는 황제에게 아직 나가지 않은 이들의 불쌍한 사정을 논하며 조금만 더 말미를 주어 달라고 청하는 군관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참수되어 한경(漢京, 한성부)저잣거리에 머리가 내걸리게 되었다.


"...무얼 하느냐, 어서 집을 부수지 않고."


그 꼴을 목도한 다른 군관들은 결국 죽지 않기 위해서는 집들을 부술 수밖에 없었다. 군관이 성정이 모질지 않아 대놓고 역정을 내며 나가라고는 못 했지만, 

그렇다고 자기 목숨까지 내걸며 이 농부의 사정을 봐줄 정도의 성인군자까지는 아니었다.


'빌어먹을.'


군관을 따라온 장졸들은 명이 떨어지자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굳은 얼굴로 천천히 집을 깨부수고 울타리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놈들아! 안됀다, 안돼!"


눈물로 간절히 간청한 것이 무색하게 집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자, 농부는 울부짖으며 장졸들을 붙들었다.


쿠르르르-


"아...아아..."


그러나 그런 것도 무색하게 집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무너졌고, 농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농부의 눈 안에는 끝없는 절망만이 가득하여, 조그마한 빛 한줄기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군관은 그런 농부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고개를 푹 숙였다.


명을 막 받았을 때도, 일을 끝마친 지금도 여전히 기분은 더러웠다.


***


경복궁 경회루.


태조 고황제께서 즉위하시고 경복궁이 세워졌을 때 처음 세워진 이 누각은 조선이 건원칭제를 하기 전에는 왕이 연회를 베풀거나 명국의 사신을 맡는 자리로 쓰였었다.


접대하는 자가 상국의 사신에서 번국의 사절로 바뀐 것 뿐이지 그 역할은 지금까지도 그다지 바뀌지 않아, 금상이 즉위하기 전까지는 남방의 유구국이나 북방의 부여, 장령, 영고 등의 여진들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 후 그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곳으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황상이 온갖 산해진미와 고량진미를 결들인 잔치를 여는 곳으로만 쓰이고 있었다.


황제는 큰 잔치가 없는 날이면 이곳에서 맛 좋고 도수 높은 술을 마시며 연못 주위의 경치를 관찰하고는 했는데, 국구(군주의 장인)완성부원공이 알현하고자 찾아온 지금도 황제는 황룡포를 풀어헤치고 물 마시듯 술을 마시고 있었다.


"완성부원공이 삼가 성상 폐하를 배알하기를 청하옵니다."


"끄윽,  들라. 하라."


거하게 취해 끄윽거리는 소리를 내는 황제의 용안은 불같이 시뻘갰다.


전각의 계단을 올라가며 완성부원공은 경회루를 받치는 기둥을 보았다. 가지각색의 고운 색깔로 그려진 용과 꽃이 새겨져 있는 기둥으로, 삼사의 모든 관원들의 반대에도 기어코 황제가 새겨넣은 것이었다.


아직 말을 꺼내지도 않았지만, 완성부원공은 이번에도 황제의 반응이 어떨지 벌써부터 그의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듯했다.


"오, 완성부원공! 마침 잘 오셨구려, 끄윽. 

현빈이 지금 몸져누워 술을 같이 마실 이가 없어 허전했는데, 그대도 한잔 하시겠소?"


자신의 딸인 중궁보다 천한 무수리 출신인 현빈이 더 좋다고 대놓고 말한 황제의 말에 완성부원공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지만, 완성부원공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황제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신의 나이가 많아 이제 술은 더 들수 없사옵니다. 용서하시옵소서."


"참, 그랬지. 이거 요즘 짐이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렸소이다. 짐이 실수한 것이니 경이 용서를 구할 것 없소."


"..."


잠시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머쓱해진 황제는 입을 열었다.


"아무튼, 이 늦은 밤중에 무슨 일로 온 것이오?"


이어서 완성부원공이 말했다.


"별궁에 대한 건이옵니다."


"궁을 짓는 것을 중단하란 것이오? 이미 거의 다 지어진 마당인데 그걸 허물라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소."


완성부원공은 주위 신료들을 이끌고 황제가 별궁을 지으려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끝끝내 공사는 진행되었다. 


공사가 진행되는 와중에서 완성부원공은 계속해서 공사를 중단하라고 간언하였으나 이제 별궁을 짓는 것은 완료되어 가고 있었으니, 공사를 중단하고 다시 허물라는 것이 오히려 민력이 더 소모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완성부원공은 답하였다.


"폐하, 공사를 완전히 중단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잠깐만 미루자는 것이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조금만 더 하면 끝이 나는데 그걸 어찌 미루어야 하는가?"


"성상 폐하께서 신민들에게 내리신 보상으로는 신민들은 입에 풀칠조차도 하지 못하옵니다, 세종 문황제 시절 노비 한 구의 값이 80필에서 100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단지 큰 집은 30필, 작은 집은 5필 정도만 내리시었는데, 이것으로는 땅은 커녕 집조차 살 수 없으니 신민들은 천한 일을 하거나 경사(수도)의 권족들에게 위탁하는 등 천직으로 전락하게 되옵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정말 모르시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잠시 완성부원공의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다시 생각을 가다듬은 완성부원공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기존의 보상금을 받은 이들은 이미 얼마 정도를 받았으니 그만큼 최소 70필이나 90필 정도 보상금을 더 주고, 아직까지 떠나지 않은 이들은 아직 받은 것이 없으니 8~100필의 보상금을 지급해야 그나마 신민들이 생업을 어렵게나마 이어갈 수가 있사옵니다. 그들에게 그 정도의 보상금을 다시 지급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니, 그때까지만 공사를 미루어 주소서."


'..사실, 더없이 부족하지. 허나 예산이 빠듯한 탓에 그 정도밖에는..'


100필을 받는다 해도 단기간만 간신히 풀칠할 수 있지, 이주 이전의 삶을 이어가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서경(西京, 평양)에 외성, 내성, 황성을 짓느라 예산은 빠듯했고, 결국 그 정도밖에 줄수 없었다.


하지만 30필은 너무하지 않은가. 100필은 조금 풀칠이나마 할 수 있지만 30필은 그것조차도 할 수 없다.


최소한 100필은 주어야 별궁 공사로 피폐해진 민심이 완전히 돌아서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따위 사소한 것으로 궁의 공사가 늦춰진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이미 전에 내린 것으로 보상금은 족하다. 뭐하러 그것을 더 주어야 하는가? 궁의 공사는 예정대로 진행하라, 만일 끝까지 비우기를 거부한다면 다시 아뢰지 말고 일률(사형)을 적용하라."


"....."


군주로써의 소명의식도, 국정을 돌보는 능력도, 인재를 가려내는 능력도 없는 성상은 희한하게도 제 살 깎아먹는 재주만큼은 이 해동 땅에서 제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