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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거 그 그림에 있던 애의 인형이지? 귀여워!"


"귀엽지 않다. 잘들어라. 이 인형은 인간의 심리 속에 숨겨져 있는 광기로..."


"이 애 나줘!!"


"안된다. 이건 천장에 매달아서 흔들리게 하는 용도로 쓸거다."


"싫어! 그러면 너무 불쌍하잖아!"


"하나도 안불쌍하다. 알겠냐. 이 작품은 내 세계관을 표현하는데 아주 중요한..."


"흥! 그럼 나도 만들거다. 뭐!"


"사람 말은 끝까지 좀 들어라..."


메리와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순진하고 맹랑한 여자아이와 성격이 뒤틀린 늙은 화가. 대화의 아귀가 맞을 리가 없을 터인데 시답잖은 잡담은 끊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아이와의 대화는 더 이상 성가시지 않았다. 삐치고서도 또 금세 풀어져서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바보같은 녀석을 놀려주고 싶어서 그런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버지 이건 좋은 기회라니까."  


"그런거 하지 않을거다." 

  

"우선 듣기라도 해봐. 이건 백명의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서..."


"끈질기다!"


간만에 전화를 걸어온 아들 녀석은 여전히 말이 통하질 않았다. 나의 자식이면서 나를 보아오고도 무엇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놈. 더 이상 말을 섞는건 무의미하다고 여겨 전화를 끊어버렸다.


"왜 그래? 게르테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는 메리는 어느샌가 내 옆에서 서있었다. 아무래도 전화의 내용을 전부 들어버린 모양이다.


"후우... 시시한 전시회 얘기다. 내가 자화상 같은걸 그릴까보냐."


"그치만 게르테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잖아." 


넓은 의미로는 맞는 말이지만 이 경우에는 확실하게 못박아둬야 한다.


"자화상이고 뭐고, 실존하는 것은 절대로 안그린다!"


"왜?"


"작품에 혼이 깃들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집중해서 그려도 나오는건 단순한 모작. 실존하는 것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는 법. 그건 생명이 없는 카피일 뿐이다. 애당초 현세의 물건따위를 나의 세계에 집어넣을 생각조차 없다!!"


"으응... 그렇구나아..."


내 예술을 똑바로 이해나 한걸까. 석연찮은 반응을 보이며 눈을 돌리던 메리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면서 신나게 말했다.


"그럼 나는?"


역시 이해하지 못했잖냐... 


대답을 기대하는 메리는 곧바로 눈을 반짝이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웃기도 하고 볼을 부풀리기도 하며, 두 눈을 손가락으로 치켜 올리기도 한다. 내가 자기를 그려 준다는걸 철썩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다. 


"음."


질감을 확인하듯 두손으로 메리의 얼굴을 더듬었다. 쓸데없이 부드러운 볼을 꼬집고 잡아당기며, 몽크가 그린 절규하는 남자처럼 양쪽 볼을 손바닥으로 눌러보기도 했다.


"게흐헤나, 아흐단 말히아!"


"안되겠군. 마네킹 대신 진열해두는 걸로 써주도록 하지."   


"대머리 까지는건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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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나도 만든다고 그랬지~?"


보란 듯이 스케치북을 내민 메리는 매우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붉은색의 눈'을 따라 그린 그 그림은 선은 쓸데없이 삐뚤거렸고 배색도 엉망이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당당한 얼굴이지? 사실을 말해줘야겠다.


"잘했어?"


"형태도 이상하고 특히 색 사용이 엉망이군. 색채의 기본부터 나의 예술 세계의 극치까지 그 머리에 박아주도록 하지!"


"에엑..."



"이 세계를 정리하자면 이것, 즉 만물의 교환이다. 존재를 교환하는 것으로 공상을 현실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현실이 공상으로 바뀌는 것도 가능하며,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존재 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너무 조용한게 이상해 소파를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메리는 곤히 잠을 청하고 있었다. 수업을 경청하는 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가 않다. 심지어 아주 침까지 흘려가며 자고 있는 모습이 더더욱 괘씸하다. 벌을 주어야 할거 같다.


"이세계를정리하자면이것즉만물의교환이다존재를교환하는것으로공상을현실로바꾸는것이가능하며일어나라일어나라일어나라일어나라일어나라."


"으으..."


속삭이며 직접 귓가에 갖다 대고 읊어대니 악몽을 꾸는 것처럼 메리는 괴로운 신음을 내었다.


"와악! 놀래라..."


신음소리를 내다 못해 깨어버린 메리는 가까이 있는 내 얼굴을 보더니 놀라서 냅다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자지 말고 똑바로 들어라."


"그치만 게르티나가 하는 말은 하나도 모르겠는걸..."


확실히 어린아이가 이해하기엔 어려운 내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먼저 가르쳐 주겠다고 말한건 이쪽이다. 이대로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고, 가르치는 도중에 일일히 잠을 깨우는 것도 부아가 치밀어 오를 노릇이다. 


"그럼 수업을 잘듣는다면 가지고 싶다던 그 인형을 주도록 하겠다."


"정말로??"  


"그래, 그러니까..."


"뭐하고 있어? 게르테나. 계속 이야기 해줘!"


어느새 자세를 잡고 앉더니 오히려 재촉을 하는 뻔뻔한 모습에 내가 다 황당해져 어안이 벙벙해진다. 그래서 그만 읽고 있었던 책의 페이지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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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한건 멍청한 아들녀석의 전화 뿐만이 아니였다. 아니 오히려 목소리만 들린다면 좋았을 것을. 오랜만에 찾아온 화상의 여주인은 가식적인 웃음을 흘리며 인사를 했지만 일부러 본 척도 하지않고 작업에 몰두했다. 


"아직도 추상화 같은걸 그리고 계시는 군요."


"집중하고 있으니 말 걸지마라."


"저기, 선생님. 이제 세상에 눈길을 주시는게 어떻습니까? 시대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 여자도 내가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말하고 있는건가. 애써 무시하려고 했지만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건방진 소리를 지껄여댄다. 


"설교같은거 필요없다. 돌아가라."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생각해서..."


"시끄럽다!!"


들고 있던 붓을 있는 힘껏 바닥에 패대기치자 그 소리에 여자는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입을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전 아무것도... 선생님의 돈을 생각해서 이러는게 아니에요."


값비싼 옷과 휘황찬란한 악세사리. 허영심을 흘려대고 다니는 꼴로 잘도 그런 소리를 하는군. 그 입에서 나오는건 더러운 것들을 계속해서 듣고 있자니 참을 수가 없었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은 하지마라."


"선생님, 이대로 가다간 세계로부터 잊혀져 버려요."


"꺼지란 말이다!!"


"...다음에 또 오도록 하겠습니다."


희미한 한숨소리를 끝으로 여자는 발걸음을 돌렸다. 또각 또각 듣기 싫은 구두소리가 서서히 멀어져 가다가 이윽고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내가 잊혀진다고?


여자가 떠나가고도 한참동안 머리가 아파와 그저 주저 앉은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아무런 의욕이 생기질 않는다.


"게르테나."


머리가 울리는 발랄한 목소리. 메리인가.


"시끄럽다... 혼자 있고 싶으니 조용히 좀 해라..."


"이거!"


사람의 기분을 알지도 못하는지 연신 생글거리는 얼굴을 하고선 뭘하고 있는거지? 저리 가버리라고 호통을 내지르려다가 작은 손에 쥐어진 것을 보고 할말을 잃었다. 그것은 메리의 머리칼과 똑같은 색의 노란 장미였다.


"자, 줄게. 게르테나를 위해서 꺾어온 장미야!"


여태까지 정수리밖에 보이지 않던 꼬맹이 주제에.


"괜찮아, 게르테나. 나는 게르테나 편이니까."


주저앉고 나서야 눈높이가 같아진 그 아이는 나에게 건방지게 꽃을 들이밀며,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 미소에 눈가가 간질거려 곧장 일어나서 소리쳤다.


"이대로 곧 시들어 버릴거다. 화분은 어디있냐! 물! 손으로 떠서라도 가져와라!"


"응! 가져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