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광반조 9장 보러가기


"응? 뭐라고? 못 들었어."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아버지가? 갑자기? 왜? 아니, 무슨 소리야 이게."

"노환이시지. 잠깐 낮잠 주무시는가 했는데 저녁상 다 돼서 깨우려고 보니까 이미 돌아가셨더라..."


수화기를 잡은 손이 떨린다.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도 아버지는 수시로 전화해 손녀의 상태를 물으셨다. 다 나아서 시골에 내려가겠다는 전화를 하니까 하루라도 빨리 만났으면 좋겠다고 재촉하시던 것은, 당신의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던 것일까. 손녀와 당신의 목숨을 맞바꾸기라도 한듯 손녀가 완벽히 완쾌를 하자마자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ー 눈 떠서 좀 보세요. 연희가 다 나아서 지금 아버지 옆에 있어요. 아버지ー"


아버지는 그저 눈을 감고 온화한 얼굴을 하고 계신다. 아버지의 굳게 닫힌 눈꺼풀 속으로는 지금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을까.






여섯남매는 문상객을 받는 중에 정신이 없다.


"어머? 오빠. 저 아저씨가 여긴 왜 왔어?"


평생토록 아버지와 만나기만 하면 싸우던 뒷 집 아저씨가 아닌가. 의외의 인물이 대문 안으로 들어오니 영문을 알 수 없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본다. 혹여 앙금이 남아 상갓집에 깽판이라도 치러 온 게 아닌가 걱정되는 찰나에 뒷집 아저씨의 얼굴은 힘없이 일그러진다.


"이 사람아. 나랑 더 싸우다 가지. 왜 벌써 갔나. 이 사람, 왜 나를 두고 그냥 갔어..."

백발의 노인이 영정 앞으로 다가와 쓰러지듯 엎어진다.


죽음이란 앙숙마저도 찾아와 울게 만드는 것인가보다. 아무리 앙숙이었다지만 50년 미운 정도 정이라고 그래도 아쉬움만 남는 모양이다.


상갓집의 풍경은 살면서 볼 수 없는 온갖 진귀한 풍경으로 가득하다. 우리 문화에서 장례식은 축제와 같다. 평생의 앙숙이 찾아와 고개 숙이는가 하면, 명절에도 모두 모이지 못하던 가족들이 한꺼번에 모여 얼굴을 보고 서로의 고단함을 풀어준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영혼이나마 이 자리에 함께하시어 이 모습을 보고 미소 지으시기를.








아버지를 땅에 묻고 집으로 돌아와 서울로 올라갈 준비를 한다. 여섯남매는 또 다시 생업에 종사하기 위해 각지로 흩어져야 한다. 큰 오빠는 시골 집에 남겠지만, 둘째 오빠와 명자는 서울로, 넷째는 인천으로, 다섯째는 멀지는 않지만 읍내의 집으로, 막내는 대전이 집이다.


"엄마 아버지가 어려서 항시 당신들 어찌되면 너희 여섯만 이 세상에 남는다, 그리 말씀하셨는데 그 날이 기어코 오고야 마는구나."


각자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동생들의 뒷모습을 보니 장남은 쓸쓸하다. 동생들 역시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마당에는 아이들이 뛰논다. 아버지 어머니가 뿌린 씨는 여섯남매에게 이어졌고 그들이 뿌린 씨는 이렇게나 많아져 이제는 명절에 다 모이면 이 집에서 다 같이 잘 수조차 없다. 우리 여덟 식구한테서 이렇게 많은 자식들이 나오다니, 아버지 정말 큰일 하셨소.




"오빠. 올케언니. 건강하시구요. 자주 오진 못해도 전화는 자주 할게. 우리들 몸은 다들 흩어져도 마음은 항상 여기에 있으니까."

"그래. 서울 도착하면 무사히 왔다고 전화 한 통 넣어줘라. 아버지가 무사히 집에 가도록 지켜주실 게다."


"아빠~ 우리 큰집에서 하루 더 자고 가면 안 돼?"

"너희들도 내일부터는 다시 학교에 가야지."

어린 조카들도 이제 눈물 짓지는 않았지만 차를 타면서 못내 아쉬운 표정이다. 항상 차 탈 때 마중 나오시던 할아버지가 안 계시니 더욱 그럴 것이다.


고향의 흙길을 달려 서울로 향한다. 차 뒤로 흙먼지가 자욱한데, 그 사이로 손 흔드는 큰 오빠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보니 큰 오빠는 영락없이 젊은 날의 아버지와 빼닮았다. 내가 시집 가던 해의 아버지 연세가 꼭 지금 큰 오빠 나이랑 같다.


慈親鶴髮在臨瀛 (자친학발재임영)

백발되신 어머니 강릉에 계신데


身向長安獨去情 (신향장안독거정)

서울로 홀로 떠나는 이 마음


回首北平時一望 (회수북평시일망)

고개 돌려 때때로 북평 땅 바라보니


白雲飛下暮山靑 (백운비하모산청)

흰 구름 저무는 저녁 산이 푸르다


유대관령망친정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 신사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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