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고종대왕일대기>의 미약한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포를 원치 않으시면 닫아주세요. 배경은 대략 18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입니다.


"필리프! 이게 얼마만인가? 하도 얼굴이 안보여서 죽은 줄 알았네!"


"루이? 시험기간 아닌가. 끝나면 술이나 한 잔 하세."


시험기간이라는 그의 말을 반증하듯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의 상태는 주변에 돌아다니는 이들보다는 멀쩡했는데, 그것은 그의 건장한 체격에서 알 수있는 단련된 몸 덕분이었다. 


"공부가 아무리 바빠도 사람은 만나야지 이 친구야. 곧 있으면 자네 귀국한다고 하지 않았나."


"조국에서 부르는데 별 수 있나. 그래도 과정을 다 마치고 가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네."


"그나저나 큰일일세. 러시아와의 국경 분쟁지역으로 떨어지는 날에는 큰 낭패가 아닌가. 아직까지도 소규모 교전이 일어나고 있다고 들었네만."


"걱정해주니 고맙군. 허나 자네 조국도ㅡ특히 자네가 보기에는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지 않은가."


그랬다. 이 무렵 프랑스는 황제 나폴레옹 4세에 의한 일인독재정권으로 넘어갈 낌새를 보이고 있었다. 의회에서 황제의 권한을 견제하던 이들은 쥐도새도 모르게 쓸려나가거나 제거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프랑스였다. 열렬한 자코뱅이던 루이에게, 지금의 상황은 악몽과도 같았다. 


"...우울한 얘기는 그만하세. 자네가 간다고해서 선물을 하나 준비했네. 따뜻하게 쓸 수 있는 걸로 말이야. 자네는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 옷은 누가봐도 추워보인단 말일세."


"한복 말인가? 이게 보기엔 이래도 꽤 따뜻한 옷이라네."


"한국에서는 또 모르는 일이지. 이곳보다 추운 곳이 한국 아닌가. 원래는 가는 날 주려했는데 마침 잘됐군. 자자. 거절하지 말고 받게."


루이는 필리프에게 자신이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건네며 말했다. 주위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으나, 그것은 공공장소에서 장정 둘이 오붓하게 있는 광경 때문이 아니라 필리프가 입고 있던 옷 때문이었으리라. 한국과 프랑스가 동맹을 맺은지 20년이 지났어도, 파리 한가운데서 한복을 입은 동양인 남자는 이질적으로 보였다. 


"어쨌든 시험 끝나고는 꼭 한 잔 하는걸로 하세나. 기다리고 있을테니."


안타깝께도 그들의 약속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필리프가 날짜를 착각하여ㅡ정확히 말하면 전보가 오는 시간을 고려하지 못해 곧 떠나야했기 때문이었다. 



땡땡땡땡땡! 


"적습이다! 전원 대기하라!"


대한제국ㅡ러시아 국경선 일대의 대한제국군 주둔지에서는 비상 걸리는 일이 일상이었다. 평상시에도 소규모 총격전은 있었으나, 그리 빈번하지는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귀족들과 시베리아의 청년 장교들의 충돌은 필연적으로 내분을 불러왔고, 이는 가뜩이나 정신없던 국경선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콰앙!


"미친! 저 불곰새끼들 오늘 작정했구만. 포병! 대포병사격 아직 멀었나?"


"거의 다 됐습니다!"


"젠장, 우리 목책 다 박살나게 생겼다고! 뭐라도 날려!" 


제국군의 맹렬한 사격 끝에 러시아 군 잔당들로 구성된 이들은 곧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패주했으나, 제국군 역시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피해 보고하게."


"총원 107명, 부상 15, 사망 무, 이상!"


"특이사항은?"


"군의관 서 중위가 어깨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후방 이송을 필요로 합니다!"


"서 중위가? 젠장, 하필이면 어깨인가. 신속하게 후방으로 이동시키고 상부에 보고해서 훈장이라도 내려 달라그래. 포탄 떨어지고 있는데 나가서 애들 치료하다 맞은 거니까 승인해줄거다."




"서 중위는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전우들을 살리려 달러나가 눈 먼 총알에 어깨를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음. 완치여부는 불투명... 태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서류가 황제의 눈에 띈 것은 순전히 우연이였다. 정기적으로 올라오는 보고를 듣는 도중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해당 서류를 가져오라 명한 것이었다.


"뭐 서 중위에게는 안타까운 일이나, 훈장이면 족하지 않겠사옵니까."


대수롭지 않게, 황태자가 대답했다.


"예끼, 이놈. 이런 인재가 부상을 입었다는데 반응이 겨우 그거냐? 됐다. 짐이 직접 찾아가겠노라."


"예? 하오나...."


태자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국경지대에서 부상당하는 병사가 매일 몇 명씩 나오는 마당에 굳이 황제가 친히 일개 중위를 치하하는 까닭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성국군병원은 소란스러웠다. 일반 병실에 누워 잠을 청하던 필리프는 주변의 웅성거림에 잠이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오후 2시. 가장 나른한 시간에 이렇듯 소란한 이유를, 그는 곧 알게 되었다.


건장한 장정들이 총검을 들며 길을 만들었고, 그 뒤에서 걸어오는 인형이 보였다. 거기까지 본 중위는 납득했다. 황제폐하께서 친히 방문하셨는데, 소란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아무튼 황제 폐하를 그렇게 가까이에서 뵐 수 있어 영광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황제 폐하께서 자신의 앞으로 걸어오는 것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설프게 경례를 올린 후 벙쪄있던 그에게, 황제가 물었다.


"자네 혹시 신문 만들어 볼 생각 없나?"


"....예?"


"중위?"


"예, 중위 서재필,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그 대답을 들은 황제의 미소를 보며, 뒷골이 서늘해지는 건 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