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 씨, 잠깐 할 말이 있어요.”


 “네.” 


 “요새 힘든 일 있으세요?”


 “아뇨.”


 “아마 제가 왜 이런 이야기 하는지 아실 거에요. 그냥...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네.”


 “저희가 다 같이 잘 되자고 지금 여기 스터디 모인 거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한 명이라도 제대로 준비해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모두 다른 조원들이 그만큼 피해를 보시겠죠?”


 “네.”


 “오늘 원래 근현대사 부분 문제 준비해 오기로 하셨죠?”


 “네.”


 “다른 분들은 모두 다 자기 부분은 확실하게 준비해서 갖고 오셨어요. 그런데 민재 씨만 준비해 오신 게 너무 부족했어요. 저도 이렇게 찍어서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그럼 말을 하지 말던가. 이 말은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처음에 말씀드렸을 거에요. 조금이라도 분위기 망치는 분들은 모두 나가셔야 된다고. 모두들, 여기까지 오는 데 괜히 시간 허비하고 싶은 분들 없어요. 다 같이 계시는 곳에서 여기까지 오는 것조차 힘드신 분들도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민재 씨 저번에는 아예 출석 안 하시고, 오늘은 준비가 안 되어 있으셔서 말씀드렸어요. 혹시라도 방법이 맘에 들지 않거나, 따로 시간 빼기 힘들다고 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인원수 조정하고 다시 과목선정 해야하니까요. 이런 말씀 드리는 건 죄송한데, 다른 분들까지 피해 주지는 말아 주세요.”


 대답은 깊은 한숨 뒤에 나왔다.


 “알겠습니다.”

 



 스터디룸을 나와서, 작별 인사를 하고서는 모두 다른 곳으로 흩어진다. 몇몇 분은 신림역 쪽으로, 이 곳 신림에 고시원을 잡은 분들은 사거리 안쪽으로. 나? 나는... 원래는 역 쪽으로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가서 버스를 타는 게 맞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어서 아예 다른 길을 택했다. 눈 앞의 이정표에는 서울대입구역 방향이라고 적혀 있다.


 민아 씨가 한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본다. 


 그래,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과 함께 녹인 질책에, 입맛이 쓰다. 당연한 말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사람 마음은 언제나 그게 쉽지가 않다. 그나마 고마워 해야 하는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민아 씨는 그나마 내 체면을 생각해서, 스터디 인원들이 없는 다른 자리에서 조용히 나에게 말을 꺼내었던 거다. 하지만, 모두의 앞에서 말한 것이나 다를 바는 없다. 모두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변명이라도 해 보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유는 있으니까. 아주 정확한 이유가. 하지만,  누군가가 얘기했다. 자신의 앞날은 선택과 집중으로 결론지어진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건지를 파악하고 선택하는 일이 절반, 그리고 그 선택에 집중하는 것이 나머지 절반. 이 사람들은 공무원 시험에 목숨을 걸다시피 한 사람들이다. 다른 어떤 이유를 갖다 붙인들, 그것은 오로지 나에게만 이유가 된다. 어차피 나는 준비하지 못하였고, 그것 하나만으로 질책을 받은 거다. 그게 전부다.


 갑자기 리돌 생각이 난다. 지금 내가 스터디 준비 부족으로 한 소리 들은 것 때문에, 억하심정으로 그 녀석 탓으로 끌어다 붙이려고 생각난 것은 아니다. 물론 그 녀석 밥 챙겨주고, 가끔씩 집안일은 어떻게 하는지 알려주고, 잘못하면 지적을 할 때 드는 시간 소모가 적지는 않다. 하지만 그건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반 강제로 시작한 동거이긴 하지만, 같이 있는 살고 있음에도 이 녀석은 신기하리만치 나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는다. 왜 갑자기 리돌이 생각났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냥 리돌이 순수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새삼 부러워 졌기 때문일까.


 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니, 한 녀석이 더 떠오른다. 그래, 나비. 그 녀석이나 리돌이나 별반 다를 바는 없지.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흰웃음이 터진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진짜. 먹고, 자고, 놀기만 하는 인생. 좋네. 지금 당장 모텔 일부터 그만 두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몇 달 안으로 굶어 죽겠지. 남은 돈 다 쓰고.


 “문제는 돈이구먼. 돈이야.”


 알게 모르게 내 옆을 스쳐가는 가을 바람은 아직 더위를 품고 있었다. 혼잣말을 하며 걷는 내 앞으로 그림자가 지친 내 발자욱마냥 길게 끌린다. 원래 스터디가 끝나는 시간은 아예 어두워 질 때 쯤이었는데, 아까 말한대로 내가 준비해 온 파트가 없어서 이렇게 일찍 끝나 버렸다. 거리에 사람들은 하나 둘씩 늘어 어디론가 제 갈길을 찾아 가고 있었고, 내 걸음은 어느 새 다음 역을 지나쳐 버렸다. 



 덕분에 집에는 원래 스터디 할 때의 시간과 얼추 비슷하게 들어왔다. 어떻게 계단을 올라왔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집에서 오늘 안으로 정리해야 될 것이 무엇이 있는지에 골몰하다 보니, 분명히 버스 정류장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어느 새 문 앞에 서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비밀번호를 누르려다, 어디선가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왠지 무대에서나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깊은 울림의 노래가 집 안에서 새어 나온다. 


 뭐야, TV에서 오페라를 해주나? 


 그런데... TV소리 치고는 너무 큰데? 나는 잠시 문을 열기를 멈추고 도대체 집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귀를 기울였다.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그리고 잘 들어보니, 오페라가 아니라 가요잖아. 그것도 아주 옛날. 가수도 다른 것 같은데?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여다 본 집 안에는, 식탁 위에서 앞발을 꼿꼿이 펴고, 불어오는 선풍기 바람에 수염을 흔들며 무반주로 단독 콘서트를 열고 있는 나비의 모습이 보였다. 관객은 리돌 하나 뿐이었지만, 크게 상관은 없어 보였다. 몇만 관객이 와도 저것보다 더 감동했다는 표정을 지을 수는 없을 테니까.


 나비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그런 건지, 아니면 노래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그런 건지 달나라 소녀와 가수 고양이는 내가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 듯 해보였다. 나는 어이가 무척이나 없어져서 문을 닫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 보고 있었다. 


 이런 기묘한 대치 상태는 노래의 1절이 끝날 때 까지 지속되었다. 노래가 끝나자, 나비는 앞발을 가슴 아래 대고 정중하게 목례하였고, 멋들어진 포즈로 인사하는 가수에게 유일한 관객은 만세를 하고 온 팔을 부르르 떨었다. 저게 달나라 식 환호인가?

 

 “뭣들 하는 거야?”


 리돌과 나비는 그제서야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알아차렸다고 하기 보다는, 내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전혀 놀란 기색 없이 내 말을 넘기는 것을 보면.


 “오셨습니까.”


 “왔는가, 인간.”


 내가 원하는 대답은 이런 `평범한` 인사가 아니었기에, 나는 인내심을 갖고 다시 한 번 물어보기로 하였다.


 “그러니까, 내가 뭐 하고 있느냐고 물어 봤잖아? 그럼 그거에 대한 대답을 해 줘야지?”


 “나는 그것이 마치 나비처럼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장자가 물었다. 꿈 속에서 날아다니는 나비가 나인지 나비가 꿈을 꾸는 게 나인지. 난 모르겠다. 지금 얘기 하는 말이 무엇인지. 나는 리돌을 추궁하는 것을 그만 두고, 그나마 말이 통하는 녀석에게 진위를 물어 보았다.


 “됐고, 야, 뭐 했어? 뭘 했길래 노래를 부르고 앉아 있었던 거야?”


 나비는 무척 자랑스럽다는 듯이 가슴을 쭉 펴고 이야기하였다.


 “주군과 같이 TV를 시청하던 도중, 주군께서 음악이 어떤 것인지를 이 몸에게 물어 보셨다. 일단은 아는 대로 설명을 해 드렸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이 몸이 알고 있는 노래를 한 소절 불러 드렸을 뿐이다.”


 “그래? 그런데 도대체 니가 어떻게 그런 노래를 알고 있냐?”


 “그런 노래라니?”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때 까지 올라가야 되는 옛날 노래를 어떻게 알고 있냐는 말이지.”


 어디 아저씨들 가는 곳에서나 가야 들을 수 있는 노래를 말이지. 나비는 의아하다는 눈초리로 대답하였다.


 “내 비록 땅에 발디딘 세월이 짧아 실질적인 견식은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니다만, 그래도 계속해서 지금까지 반복하듯 들어 왔던 것이 있다. 인간들의 TV에서 나온 노래들은 모두 이런 식의 노래들이었다만. 들어 보아라.”


 그러면서 나비는 노래를 한 소절 더 부르기 시작했다. 


 “불러 봐도~ 울어 봐도~”


 이건 더 옛날 노래잖아? 이런 노래들만 듣고 살았다고? 


 그런데, 막 눈물이 나려고 하면서 엄마가 보고 싶어진다. 옛날 노래건 요새 노래건, 가수의 감정선과 가창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게 이런 데서 느껴질 줄이야. 나비 녀석은 눈을 감고 진중하게 한 음 한 음을 뽑아내고 있었고, 그 울림에는 이 녀석의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호소력이 진하게 묻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