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미약한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포를 원치 않으시면 닫아주세요.

소년의 부모는 노비였으되, 노비가 아니었다. 아비가 북쪽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끌려가 싸우는 동안 그 어미는 소년을 낳았다. 노비제도가 폐지된지는 좀 지났으나 노비라는 신분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그 전과 후의 삶이 바뀐건 아니었다. 어미가 높으신 분들의 손에 끌려가 범해진 것도 그래서였으리라. 

주인을 죽이고 도망치려던 아비는 어미와 함께 그 댁 마님에게 맞아죽었다. 차마 인정에 못할 일이었는지, 아니면 평생 낙인으로 간직하고 살아가라는 뜻이었는지는 모르나 소년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다섯 살 난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다만 어미의 마지막 유언대로 걷고 또 걸었을 뿐. 그러다 쓰러진 것이 교회 앞이었다는 것이 소년의 인생에 찾아온 첫 번째 행운이었다. 막연히 멀리가고자 했던 소년은 불란서 선교사의 손을 잡고 불란서로 넘어갔다.

소년이 장성하여 청년이 되었을 때, 그는 불란서 육군의 장교가 되어 있었다. 소년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없었다. 그저 위에서 시키는대로 복종하고, 죽여달라는 듯 싸운 것이 그가 한 전부였다. 막 임관한 황인종 소위는 가장 위험한 곳에 배치되었고 가장 먼저 달려나갔으며 가장 나중에 물러났다. 파사에서 결정적인 공훈을 세운 그는 2계급 특진을 했고 불란서 대육군의 소령이 된다.

그런 그에게 잠시나마 휴식을 주려는 의도였는지, 혹은 같은 핏줄이라 환심을 사기 좋을 것 같아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주한 불란서 대사관의 주재무관으로 임명되었다. 저주스러운 모국을 떠난지 꼭 24년째 되던 날이었다.


소녀는 내로라하는 사대부 가문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조부는 최익현과 함께 유림의 대부로 존경받았으며, 부모는 개화의 선봉에 서있던 인물들이었다. 유학자 조부와 개화파 부모의 갈등은 없었다. 각자 방식이 다를 뿐, 국가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마음은 같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소녀의 관심사는 여느 또래와는 달랐다. 한성의 마드모아젤이 구주에서 들어온 화장품을 찾을 때 소녀는 보로서의 선비 칸트의 책을 찾았다. 마드모아젤이 구주의 로망스 소설을 읽으며 자신만의 사랑을 꿈꿀 때 소녀는 불란서의 영웅 나폴레옹의 일대기를 읽으며 잠에 들었다.

그런 그녀였기에 남자에는 도통 눈이 가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와 조부 모두 결혼에 관해서는 엄했기 때문에 강제로 본 맞선에 나온 이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머리에 든 것이 없었거나, 몸이 그녀보다 허약했거나, 그도 아니면 둘 다였다. 열성적으로 남자를 붙여보던 어른들도 이내 포기했다. 

집안어른들은 자신들이 마음에도 없는 남자를 붙였기 때문이리라 생각하곤 스스로 만나게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 여겼다. 그렇게 해서 고안해 낸 방법은, 한성 내에서 열리는 파티란 파티는 모두 참석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그곳에서도 그녀가 찾던ㅡ혹은 만족할만한 남자는 없었기에 소녀는 파티가 시작하기만 하면 이내 빠져나가 거리에서 자유를 만끽하곤 했다.

"불란서 대사관?"

"예, 애기씨. 이번에 주재무관이 새로 부임하는거 기념이라 합니다."

"하여튼 축하할 것도 없네. 왜 별일 아닌 일로 파티를 벌여대는지 모르겠군. 그 시간에 서책이나 더 읽을 것을."

올해 20살이 된 소녀ㅡ여인은 읽던 책을 덮으며 투덜거렸다. 이번에 들여온 책은 나름대로 흥미가 갔는데 별것 아닌 일 때문에 그녀의 독서를 방해당했기 때문이었다.

"자네는 옷이나 준비해주게."

"예? 또 나가시려고요? 아이고. 저는 애기씨 혼자 돌아다니는거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대로변에 남복이라해도 위험한 일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 줄 안답니까."

"일없네. 내가 그리 다닌 것도 하루이틀이 아니지 않은가."

"아아니, 그래도..."

"어서."

지루한 실랑이 끝에 길을 나선 그녀는 가져온 남복을 덤불 속에 숨겨놓고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일부러 단상과는 먼 입구 쪽에 자리를 잡고, 개회사가 끝나기 만을 기다렸다.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포도주 한 잔을 들어 옷에 부은 후 밖으로 나섰다. 주위의 마드모아젤과 영식들은 그녀의 기행을 이제는 그려려니하고 넘겼다. 판서댁 애기씨가 그렇게 빠져나간 것이 하루이틀이 아닌 까닭이었다. 남들이 어떻게 쳐다보든 상관없이, 그녀는 상쾌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그녀가 준비해간 옷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자신의 옷을 들고있던 사내른 본 것이 그때였다.

"이 꾸러미가 그대의 물건이오?"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자 군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물었다. 여자는 옷을 찾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자신을 곤란에 빠트린 남자에 대한 분노가 함께 들었다.

"이리 주시오! 그대는 어찌 남의 물건에 손을 댄단 말이오!"

"글쎄, 덤불 속에 있는 옷을 보면 버려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라오."

"어쨌든 돌려주시오! 내 물건이오!"

"뭐 알겠소. 그나저나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것 같은데, 지금 그 복장으로는 당연히 안되고 남복이라 해도 함부로 나가지는 못할것인데? 이곳은 대사관이오. 수상한 사람이 나가는 것을 위병들이 허락하지 않겠지."
 
말을 마치자마자 등 돌려 떠나려는 남자를 여자는 황급히 돌려세웠다.

"잠깐! 그럼 나 좀 도와주시오. 그대는 대한의 군관이니 한 명 정도 신원보장 해주는 건 가능하잖소? 내 사례는 꼭 하도록 하겠소."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앞장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남자의 모습에 여자는 무언가 께름직함을 느꼈으나, 좋은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뒤를 따라 걸었다.

"충성! 소령님 외출하십니까?"

"그렇다네. 통과해도 되겠는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 남성분은 누구십니까?"

"아아, 옛 친우네. 이 남성분의 신원은 내긴 보장하지. 모든 책임은 내가 질테니 통과시켜주게."

"예!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대사관 문을 나서자마자 여자가 물었다.

"그대, 불란서 말을 꽤나 유창하게 하던데, 유학이라도 다녀 온거요?"

"유학이라.... 그렇게도 볼 수 있겠군."

회한이 찬 눈으로 말하는 남자를 본 여자는 무언가 사정이 있었겠거니ㅡ생각하곤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

"내 군문에는 식견이 없어 궁금하여 그러한데, 원래 다른 국가의 군인들끼리도 경례를 주고 받는거요?"

꽤 날카로운걸? 남자는 생각했다.

"그렇소. 서로 존중하고 있다는 예의이지."

불란서 대사관이 시야에서 완전히 멀어지자 여자가 말했다. 

"여기까지 빼내주어 고맙소. 내 언젠가 사례하겠소. 그럼 이만."

그런 여자를 붙잡으며 남자가 물었다.

"그대는 이곳의 지리를 잘 아시오? 초행길이라면 안내해주겠소. 괜찮은 안내자라 자부하는 바요."

"그럴 필요 없...."

"부디 거절하지는 마시오.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것은 신사의 의무 아니겠소?"

"뭐 그렇다면..."

남자가 자부한대로, 그는 꽤나 훌륭한 안내자였다. 그는 구석구석 숨어있는 아기자기한 상점들, 희귀한 서책을 그득히 품고 있는 서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그녀에 맞춰 걷는 배려는 덤이었다.

"오늘 즐거웠소. 덕분에 좋은 시간을 보낸 것 같소."

"별말씀을."

인연은 하늘이 맺어주는 것.

"그대의 이름을 알 수 있겠소? 꼭 보답하고 싶소."

노비였던 소년과 고귀한 소녀ㅡ 

"대 프랑스 제국 대육군 소령, 유진 초이라 하오. 그대의 성함은?"

결코 만날 수 없던 두 사람이 만나 실이 이어졌으니,

"애신. 고애신이라고 하오."

어찌 인연을 하늘의 작품이 아니라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