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하게 닦은 유리창이 쬔 맑은 빛을 보고, 그는 손에서 걸레를 놓았다.


인적 드문 거리의 연립주택. 너무 한적하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을 그는 마음에 들어했다. 물론 그것이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된 이유는 아니었으나, 좋은 게 좋은 것이리라. 오후 5시에 내리쬐는 태양빛은 그의 의지를 채워주었다.

이내 저려오는 팔을 난간에 걸치고, 그는 찬찬히 밖을 둘러보았다. 주변의 건물도 높지 않고, 그가 사는 층수는 4층이었기에

마음에 드는 풍경을 눈에 듬뿍 담을 수 있었다. 


이곳은 조용히 살고 싶어하는 부자들과 일반 서민들이 적절히 섞여 있는 평화로운 동네로서,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그 검소하면서도 따뜻한 풍경은 직접 찾아오지 않으면 모를 값진 것이었다. 그도 늙어서 이런 곳에서 노후를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곧잘 하곤 했다. 막상 눈앞에 그 광경이 펼쳐지자 늙지 않게 된 것이 되려 섭섭하다고도 생각했다.

그는 여지껏 스스로의 몸과 그 힘을 정의를 위해 내던지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이렇게 고요한 곳에 살기로 한 것은

자신 스스로에게 주는 휴가이기도 했다. 주변에 으리으리하게 지어 놓은 집들이 없어서 도둑들이 분간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모두 검소해서 외관상으로 재력을 판단하기도 어렵기에 범죄자들이 딱히 노리지 않는 곳이라고 알고 있었고,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굳이 팔다리를 찢어가면서 싸울 필요도 없었고, 그도 그런 걸 원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살살 간지럽혔다. 이런 게 얼마나 그리웠는지 그 누가 알겠냐는, 마치 그 말을 입으로 꺼내지 않았는데도 말하고 있는 듯한 미소를 은은하게 띠고 있는 그였다. '감정'이 능력의 주체가 되는 그에게 마음의 안정이란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 그였다. 정말 꿈같은 시간이 아닐 수 없으리라.


그는 이내 창문 밖으로 본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볼까 하여 민첩하게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나름 아주아주 오래 전의 엄청난 유명인이고, 웬만해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누군가 알아보거나 사진을 찍는다거나 하면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물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기만 하고 거리를 활보해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이곳으로 이사 온 것은 어디까지나 범인 검거에 대한 일이었다. 

'바로 맞은편 4층에 있는 아이가 납치의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 그가 이곳으로 갑작스레, 그리고 몰래 이사 온 이유였다.

그는 단순한 경찰 같은 것하고는 격을 달리했지만, 영문을 알려줄 수 없다며 통사정하기에 그는 그러려니 했다.

원래 그러한 식의 막무가내로 하는 주문을 정말 싫어했지만, '그 86번 거리'라는 걸 듣자마자 흑심이 솟아나서 마지못해 하는 척하면서 받아들인 것이기도 했다.


'여자애가 안 불쌍한 건 아니지만 이건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얼마나 돈이 많길래 날 다 부른 것일까, 아니면 '선생님'과 친분이라도 있어서 특별히 날 불러 달라고 말한 것일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본인에게 듣는 게 아니라면 모두 부정확할 뿐이었다. 그에게 민폐를 끼치거나 당황시키는 행동은 용납되지 않았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학교에 갈 때와 돌아올 때, 그리고 밤이 아니면 크게 신경쓸 것도 없지 않은가. 18살이라던 그녀는 7시쯤 되면 집에 도착할 것이므로, 6시쯤 되어 학교 정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슬쩍 따라가면서 지켜 주자고 그는 생각했다.


'아, 생각해 보니까 학교가 어딘지 물어보지도 않았지. 벨 선생님, 알고 계시겠지?'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아직 시간이야 많이 남았기에 딱히 걱정할 것도 없었다.



쨍그랑.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였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뒤를 돌아보았다. 반대쪽 집 3층이었다. 


그는 아파트 난간을 딛고 뛰었다. 당황한 나머지 출력이 조절되지 않아서,  난간이 찌그러졌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멋진 포물선을 그리며, 깨진 창문 사이로 몸을 던져 넣었다. 갑작스런 상황이었다. 너무나.


고개를 들었다. 행여 쓸데없는 감상과 나태에 빠져 일을 그르친 것이 아닌가 하여, 그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러나 집 안에는 그걸 풀어 줄 만한 범인도, 주민도 없었다. 심지어 폭발의 흔적도 없었다. 일일이 쳐서 내친 듯이  주변 가구들과 유리창만 집 바깥 방향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감정과 냉정함은 별개였다. 그는 유심히 관찰했고, 개수대 쪽의 유리창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건 다른 곳과 다르게 조금 기형적으로 컸다. 누가 봐도 확실한 위화감이 들었을 듯했다. 망설임없이 바깥으로 낙하하려 들었다. 반드시 죽여주겠다는 표정으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 아래는 좁은 골목으로, 연립주택의 뒷부분과 복잡하게 얽힌 다른 주거지들이 찰싹 달라붙어 굉장히 좁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밑에는 검은 모자에 검은 마스크를 쓴 남자들이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다행이다. 아직 안 늦었어.'

안도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네깟 년 때문에 내가 얼마나...!"

남자들 사이에 끼여 있던 그 우두머리쯤 되어 보이는 여자는 아마 그가 구하려던 가족들의 얼굴을 걷어차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실패했다.


없어졌다.


그들의 눈앞에서 표적은 없어졌다.


1초의 시간 차도 없이.


그들은 동료의 얼굴을 연신 번갈아 쳐다보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여자의 얼굴은 보기 흉할 정도로 엄청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세상 그 누구보다 억울해 보일 정도로 울부짖었다.

가족을 납치해서 집단구타하려던 상황이라는 걸 빼고 보면 정말 애처로울 듯한 모습으로, 그녀는 땅을 치며 눈물을 흘렸다.



'...'



이내 눈물이 툭 떨어졌다.




"괜찮아요, 최선을 다했잖아요."

"..."

그는 분한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 한 명과 참혹한 꼴이 된 부모.

그 범인들은 잔혹하게도 그 가엾은 가족들을 그 자리에서 죽여놓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눈앞에서 피를 온몸으로 흘리고 있는 여자는 이미 틀렸음을 확인했다. 

시간을 아주 조금 멈춰서, 큰 체력 소모를 감수하더라도 확실하게 인질만을 데려온 것은 현명했을지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그 범죄자들 사이의, 정체 모를 능력자에 의해서 '지져져' 있었다. 물리적으로 생긴 상처라면 원상복구시키는 것은 그닥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나, 마나의 형질과 배열 자체가 일그러져 있으면 '되돌리는 방식'으로는 고칠 수가 없었다.


어렵게 말할 것도 없이, 그는 한 아이의 어머니가 비참하게 죽는 걸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쪽은 이미 숨통이 끊어져 있었다.


"......"

생각했다.

사실 403호 맞은편인 앞집 4층을 지키는 것이 임무였기 때문에,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체면을 구길 일은 아닌 것이다. '임무 실패' 같은 오명을 떠안을 일은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의'라는 감정 그 자체에서 힘을 얻는 그에게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또한 만일, 그들이 표적의 위치를 잘 알지 못하여 3층을 공격하게 된 것이라면 이것은 그의 책임이기도 했다. 그만큼의 접근을 허가했으니, 어쩌면 3층이 아니라 4층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가정하더라도 막을 수 있었다는 보장은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에게는 운이 좋은 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 사실에 분노했다.


"고마워요......우리 딸을 살려 주셔서."


그녀는 빙긋 웃어 보였다. 셀 수 없을 만큼 싸움을 거듭한 그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보랏빛 눈은 애처롭게 빛났다.

아마 유리창이 터진 것은 그녀의 격렬한 저항이었을 것이다. 딸과 남편을 지키기 위해서, 일반인으로 살면서 쓸 기회도 별로 없을 염동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따른 질책과 더불어서, 이러한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해졌다. 그녀의 얼굴을 쉽사리 바라볼 수 없었다.


"......흑, 끅......"

그녀의 손을 잡고 파들파들 가엾게 떨면서, 그녀의 딸은 공포와 슬픔에 질린 눈빛으로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크게 울어대고 싶은 욕구를 참는 듯한 표정으로, 나이에 맞지 않게 스스로의 마음을 죽이려는 모습이었다. 아마 이 곳이 주변 옥상이라는 걸 알고, 패거리가 자기 울음소리를 들을까 하여 그리 행동하는 것이었다.

이 가족들은 이미 언젠가 이러한 날이 올 것을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는...... 전......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구급차를 부르기에도 이미 너무 늦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차가운 손이 닿아서, 그의 기분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오... 따뜻한 사람, 나 하나 때문에 수많은 사람을 구해왔던 그 영혼을 더럽히진 말아요."


그녀의 새파란 입술 사이에서 나온 말은 정말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어떻게 내 과거를 아는가. 그가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것은 행여 자신을 노리는 누군가에게서 스스로의 흔적을 지우려는 의도에서이지, 설마 그 오래 전 사람을 얼굴만 본다고 해서 쉽게 알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녀는 과거를 '엿본' 것이다.


"안 돼, 엄마! 제발......제발, 포기하지 마......"

딸이 말하기가 무섭게 그녀의 입에서는 피가 세게 튀어나왔다. '능력의 반동'이리라. 이윽고 그녀는 자신의 딸을, 어딘가 멀리 떠나보내려는 듯이 위태한 모습으로, 살며시 껴안았다. 팔이 후들거렸다. 아마 모녀에겐 지금 이 포옹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모두 정해진 일이란다. 내가 보았던 미래를 따르지 않으려 하는 것은 여지껏 널 지켜 왔던 나의 '눈'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지......

그러니 각오하려무나. 너에겐, 너무, 어렵겠지만......"

"싫어......그런 거.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팔에 힘을 주었고, 귀에 입을 갖다대었다.


"살다 보면 '이별할 날을 알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이란 걸 알게 될 거란다. 네 슬픔을 지워주지는 못하겠지만, 작은 위로라고 생각하렴."

"아...... 안 돼, 조금만, 조금만 더...... 아아......"


"'키니스'. 엄마는 이름처럼, 재로 돌아가는 거야, 안녕."




일순간 그녀의 눈이 갑작스레 빛난 것도

보랏빛의 화염이 우릴 삼키려 든 것도

그녀가 딸과 나를 필사적으로 튕겨낸 것도

단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